-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이제 인내천주의와 그 밖의 다른[其他] 주의와의 관계를 밝혀 말하고자 한다.
첫째, 인내천 사상은 신본위의 사상이 아니다.
신본위 사상이라는 것은 구식의 종교사상을 일컫는 것이니 종교사상은 가장 최고의 인간 생활이다. 고대인은 실로 종교에 의지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었다. 그리하여 종교생활은 안일과 즐거움[逸樂]보다도 희생을 주로 한 점에서 고상엄숙(高尙嚴肅)한 생활이었다. 확실히 인류가 비열한 동기로부터 해방을 얻게 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현실생활을 멸시하고 현실의 가치를 인정치 아니하였다. 내세에 대한 신앙의 힘으로 세상 밖의 별세계[世外別界]의 지미(至美)를 믿고자 하는 심령적(心靈的) 신앙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힘은 경험에 의하여 파지(把持)되는 것이 아니므로 경험으로부터 나온[生] 지식은 이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세에 대한 신앙이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에 의하여 생겼다 할까? 어떤 사람[或者] 이를 교권(敎權)에서 생겼다 할는지 몰라도 교권은 이를 지지(支持)함에 불과한 것이요 원천은 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일까 하고 따져 묻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수요(需要)로부터 생긴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의 곤액(因厄)과 죄악으로부터 해방[解脫]하고자 하는 요구가 그 신앙을 낳게 한 어머니가 된다 할 수 있다.
이 세상[此世]의 곤액과 죄악을 맛본 결과 필연적으로 내세의 안락(安樂)과 청정(淸淨)을 요구하게 된 것이니 요구는 즉 신앙이다. 이미 종교신앙이 해탈의 요구로부터 생겨나고 해탈의 요구가 이 세상의 곤액으로부터 생긴 것이라 하면 이 세상의 곤액은 면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것이 신앙의 전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이 세상의 곤액은 결코 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인간 사회의 암흑 면은 인간의 힘으로서 능히 광명(光明)의 구역[域]을 만들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한갓 현세를 부인하고 이것을 해탈하고자 하기보다 차라리 현세를 개조(改造)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찌 될까? (구식; 편역자 주) 신앙은 필연적으로 그 동기를 잃을 것이 아닌가?
현대는 바로 그(구식 신앙의 동기를 잃는; 편역자 주) 막을 열게 된 때이다. 해탈에 급급할 시대가 아니요 개조의 분망(奔忙)에 인생의 즐거움[樂]을 부칠 시대이다. 인간세상[人世]은 결코 타락의 항구[巷]도 아니며 죄악의 경지[境]도 아니다. 새로운 생활을 건설[築上]할 만한 귀중한 재보(財寶)가 가득찬 보물창고[寶庫]이다.
이 보고를 열 만한 열쇠는 우리[吾人]의 손바닥 안[掌中]에 있는 고로 우리의 손[手中]으로 문을 여는 것이 인생의 가치이며 의의 있는 생활이라 하는 신념은 세계에 가득 차[彌滿] 있다. 이 점에서 (구식의; 편역자 주) 종교는 현대인의 생활법이 아니다. 현대인은 구식의 종교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의[新主義] 하에 새로운 세상[新天地]을 발견하여야 한다. 인내천주의는 종교를 이와같이 보며 또한 이렇게 부인한다.
둘째, 인내천주의는 영본위(靈本位)의 사상이 아니다.
영본위의 사상이란 절대 유심적(唯心的) 사상을 이름이니 유심론은 만유(萬有)를 영(靈)으로 보는 점에서 역시 종교와 같이 현세를 부정하는 태도로 나아간다. 현세는 죄악이며 만유는 물거품[泡沫]이라 하여 오직 영의 세계에서 살고자 하며 볼 수 없는[不可見] 실재에 생활의 기초를 두고자 한다.
사람은 이 신념 때문에 자연적 충동을 억압하고 정신적 활동을 촉진하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내재적 유심론은 인간의 생활을 보다 높게 한 공(功)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현대생활을 지도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러냐하면 유심론의 세계는 순수관념의 세계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념으로 알 수 있는[可知] 이상(理想)을 동경하여 그 관념의 세계를 이 세계에 실현코자 하는 것은 현대인으로 따르기[應從] 불능하다.
원래 세계관이란 종교에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생활의 암흑 면만 보는 것도 오류인 동시에 절대 유심적 이상론자와 같이 관념적 낙천(樂天)만으로 생각해도 아니된다. 현대인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한층 더[一層] 현실의 토대 위에 그 근본 바탕[根底]을 세웠으므로 현실을 떠난, 보이지 않는[不可見] 세계를 관념적으로 음미하기는 너무도 시대에 뒤졌다 할 수 있다. 현대인은 관념적 이상을 동경하기보다는 먼저 발아래[足下]에 있는 현실을 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기분 하에 살고 있으므로 유심론도 어느덧 옛날의 태양[昔日]과 같은 권위와 효과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인내천주의는 시대에 뒤진 관념적 유심론이 아니다.
(다음, 셋째, 넷째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