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셋째 인내천주의는 물(物)을 본위(本位)로 한 사상이 아니다.
물(物)을 본위로 한 사상이란 것은 물질주의로서, 정신주의를 배척하는 사상이니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유파(流파)가 있다. 개인주의도 있으며 사회주의도 있으며 자연주의도 있으며 지력주의(知力主義)도 있다.
(1) "인내천주의는 개인주의가 아니다"…개인주의는 개인을 지상실재(至上實在)라고 하는 개인 본위의 사상이다. 슈티르넬은 개인주의를 고조(古調)하여 "신(神)에 관한 일은 신의 문제이다. 인류에 관한 일은 인류의 문제이다. 그런데 나는 신도 아니요, 인류도 아니다. 진선미도 아니며 정의 또는 자유도 아니다. (따라서 나의 문제는; 편역자] 다만 '나[我]'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일반에 관한 문제가 아니요 단일무이(單一無二)의 문제이다. '나[我]' 자신이 단일무이함과 같이 '나'에게는 '나'보다 지상 실재가 없다"하였다. 즉 그는 자기절대론(自己絶對論)을 주장하여 개인은 개인 이외의 일절(一切)의 지배를 벗어던지지[脫却] 않으면 아니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자기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나[我]'의 의무라 하여 그의 독특한 무정부주의사상(無政府主義思想)을 고취하였다.
그다음 개인주의의 장본인으로는 니체의 '힘 만능주의[력萬能主義]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강자(强者)는 우주의 힘을 대표한 것이라 하여 영웅주의(英雄主義) 강자주의(强者主義)를 고조(古調)하였다. 인내천주의가 이러한 사상과 배치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 "인내천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다"…사회주의사상은 그 대표자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사회의 많은 변화곡절(變化曲折)은 모두가 인간의 사상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니요 다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란 것은 일종의 상부건축(上部建築)으로 다른 제도나 문화와 한가지로 경제적 사정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다. 사상적 변화가 있은 뒤에 경제적 사정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사정의 변화에 따라[伴] 사상 제도 문화가 변하게 된다"는 대의(大意)로 유물사관적(唯물史觀的) 경제관을 세우고 유물사관을 세계사에 응용코자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상이 본위가 아니요 경제가 본위가 된다고 한 점에서 경제적 유물론이 그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인내천주의의 일부는 될 수 있으나 인내천주의와 동등의 입각지(立脚地)는 되지 못한다.
(3) "인내천주의는 자연주의가 아니다"…자연주의는 우리[吾人]의 정신이 우리의 생활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것은 아직 고대의 유물인 종교적 망상 및 미신을 벗어던지지[脫却] 못한 까닭이이라 하였다. 이와같이 자연주의는 종교와 형이상학을 부인하고 유물적 기계관을 긍정하였다. 즉 근본적으로 정신적 요구는 미망에 불과한 것이라 단정하고 어디까지든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 그대로의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간단히 말하면 정신을 부정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주의이다.
그러나 이 주의의 무리한 점은 누가 생각해도 얼른 알아 낼수 있으니 자연주의는 정신의 요구를 미망이라 부인하나 종교 도덕 예술과 같은 정신적 문화는 막론하고라도 자연주의자가 가장 존중하는 과학도 또한 정신적 요구에서 생긴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그 중에서 어떤 이법을 알아낸다는 것은 정신적 요구를 절대 부인하고 될 수 있는 일일까? 자연주의자의 주장과 같이 우리의 내부나 외부가 오직 맹목적인 인과율(因果律)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지배된다 하면 과학과 같은 것도 인간에게 생길 리가 없다. 외계의 자극을 자기의 요구에 응하여 변화시키고 가공하며 개조하는 정신적 활동이 어떻게 나을 것인가?
더욱이 자연주의와 같은 주의와 신조가 생길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연주의는 우리의 감각의 세계만을 절대 실재로 보아 우리의 생활을 감각의 세계, 즉 자연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라 하였다. 사실 야만인이나 동물세계의 생활은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문화인(文化人)이다. 문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찾아 본다면 문화란 결국 우리의 감각생활이 사상에 의해서 개조되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감각에서 해방되어 사상으로 향상할수록 문명은 진보되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 즉 자연을 벗어나서 사상의 세계, 즉 정신의 요구를 쫓아 갈수록 문명진보가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주의는 감각의 일부만을 주장한 점으로 인내천주의에서는 긍정치 아니한다.
(4) "인내천주의는 지력주의(知力主義)가 아니다"…지력주의는 자연주의와 동일 경향이면서 자연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 문명이 감각생활로부터 차례로 상상생활에 나아간다 하는 말은 앞에서 말[前述]한 바어니와 지력주의는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사고가 감각의 직접 제약을 떠나 독립적 발달을 함에 이르러 생활 상태는 개조되며 실재는 신의의(신意義)를 얻는다는 것이 지력주의의 견해이다. 그리하여 사고는 전실재(全實在)에서 생활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고가 전실재이며 생활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지력주의도 필경은 다수의 난점(難點)이 있다. 우선 이렇게 사고만을 유일의 지배자로 한 생활은 형식적이요 실질이 빈약해 진다. 왜 그러냐 하면 사고는 복잡한 형식을 전개하는 힘은 가졌으나 그 형식에 생기(生氣) 있는 내용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즉 사고는 다만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을 중심으로 하고 유기적으로 관계를 짓고 있는 감각․감정․의지․사고 등의 심적 작용 가운데서 다만 사고만을 잘라내서 절대적 독립을 시키고 또는 거기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조건 그 사고 아래에 복종케 하는 것은 산 인간을 죽은 '틀'에 맞도록 하는 말이다.
자연주의가 자연이라는 답답한 범위에 인간을 가두는 것이나 지력주의가 사고의 '틀'에 가두는 것이나 동일하다. 사람은 결코 자연의 노예가 아니며 또한 사고의 노예도 아니다. 인간은 결코 어떤 기성품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힘을 어디까지나 자유로 발휘해야 한다.
(다음 '제3절 인내천사상의 요지'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