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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8. 2018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3)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한국의 철학

백 승 종 | 역사 칼럼니스트


담양 소쇄원


4. 소쇄원에서 속세를 벗어나다

자연과 하나 되기를 꿈꾸었던 선비들의 마음은 곳곳에 아름다운 유적으로 남았다. 정자, 별서(別墅) 또는 원림(園林)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공간이 곳곳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선비들의 정취가 물씬한 공간 하나가 먼 시간의 벽을 가로질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의 소쇄원이다(명승

40호). 우리는 그 곳에서 자연을 향한 선비들의 경외심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1530년(중종25)경,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소쇄원을 조성하였다. ‘소쇄’(瀟灑)는 본래 남제(南齊)의 공덕장(孔德璋, 447-501)이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이다. 양산보는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바깥세상과 떨어져 순수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맹세한 것이었다. 


나이 15세에 그는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개혁정치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기묘사화(1519년)를 만나 스승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양산보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양산보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을 숨어 지냈다. 그러나 양산보가 도가(道家) 식의 은둔을 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쇄원은 선비들에게 교류의 장으로 제공되었다.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그곳에서 자연의 풍광을 관상하며, 성리학의 이상을 논하였다.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宋純, 1493-1582), 정철, 기대승 등이 소쇄원에서 서로 만나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수련하였다. 아울러, 선비의 풍류를 한껏 즐겼다. 소쇄원은 엄격하고 심오한 담론의 장이요, 여유로운 선비문화의 요람이었다.


무등산의 원효계곡을 따라 광주호로 흘러내리는 증암천(자미탄) 기슭에는 아름다운 선비들의 흔적이 즐비하다. 소쇄원이 있는가 하면, 여러 채의 정자가 흩어져 있다.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등은 제각기 선비들의 쉼터요, 면학의 공간이었다. 이곳이 이황의 도산이나 이이의 석담만큼 우뚝하지는 못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비들이 자연과 호흡하며 심신을 수양하는데 이만한 공간을 다시 찾아보기도 어려운 일이다.


1755년(영조31),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 그림의 모사본이 남아 있다. 거의 20여 채의 건물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소쇄원도>는 본래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라는 말이 전한다. 사실여부는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 그림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양산보의 막역지우이자 사돈이었던 하서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 48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시작(詩作) 연대는 1548년(명종3)이었다. 일종의 연작시였는데, 그중에서도 제2영(詠) <침계문방(枕溪文房)>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의 뜻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았다.



“창 밝아오자 방안의 첨축(籤軸, 책의 표지와 글을 쓴 족자)이 한결 깨끗하네(窓明籤軸淨)

맑은 수석에 그림과 책이 비치누나(水石暎圖書)

정신 모아 생각도 하고 마음 내키면 눕기도 하네(精思隨偃仰)

오묘한 일치, 천지조화(연어비약 鳶飛魚躍) 아닐 손가(竗契入鳶魚) ”



시의 제목 <침계문방>은 시냇가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개울을 머리로 베고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광풍각(光風閣)을 의미했다. 시에 나오는 연어(鳶魚)는 천지조화의 오묘함을 비유한 것이다. 김인후는 광풍각의 품위 있고 한가로운 정경을 묘사하였다. 나아가 그는 그 곳의 생활이 천인합일의 경지를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훗날 송시열은 양산보의 <행장>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그의 심우인 김인후 두 사람이 현인군자였다고 말하였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흥미로운 글이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으나,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간단히 언급해야겠다.


첫째, 김인후의 연시는 소쇄원의 위치며 구성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동작과 행위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둘째, 이 연시를 통해서 우리는 소쇄원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주돈이의  <태극도설>이 압축적으로 표현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소쇄원의 요소요소에 베어 있었다. 아울러,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에 구애받지 않는 여유로운 삶)하는 선비의 가치관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셋째, 소쇄원에는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선비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대봉대 아래쪽 대나무와 오동나무는 태평성세를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광풍각 주위의 석가산(石假山)과 도오(桃塢, 복숭아밭), 그리고 계곡으로 이어지는 매대(梅臺, 매화밭)는 지상선경(地上仙境)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소쇄원은 고산구곡, 도산십이곡 등과 함께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의 한국적인 변형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를 비롯한 송나라의 성리학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송나라 선비들의 꿈과 이상을 자신들의 형편에 알맞게 변용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사회현실에 어울리는 형태로 성리학의 이념을 변주(變奏)하였다.


하늘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려 하나 되는 것. 벼슬에 나갔을 때나 고향 마을에 머물 때나 늘 선비들이 추구하는 바였다.


김인후는 시조「 자연가」에서 선비 특유의 세계관을 질박한 언어로 부조(浮彫, 도드라지게 새김)하였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山) 절로 절로

(水) 절로 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 절로

이 중(中)에 절로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절로”



이상에서 우리는 조선 선비들의 이상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천인합일’에 관한 그들의 철학적 모색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하였다. 이어서 하늘의 명령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들이 그린「 천명도」를 눈여겨보았다. 끝으로, 시끄러운 세상사를 잊고 조용한 자연에 묻혀 살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단련하고 후학을 기르기에 여념이 없었던 선비들의 일상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선비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자연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우리에게 결핍된 많은 미덕이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청아한 인품을 가졌고, 또한 겸손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서로 배우고 가르쳤다. 자연의 고마움을 알았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착취하지도 않았다. 선비들에게 있어, 인간의 삶은 천지자연의 일부였다. 인간은 결코 자연적 질서의 파괴자가 아니었다.


자연과 하나 되기를 바랐던 그들의 꿈을,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망각한 채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제3장 “윤리적 인간”의 시대 . 조선이라는 특이한 나라


조선시대에는 선비의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때는 ‘도리(道理)’, 즉 의리(義理)와 지조(志操)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다. 이런 가치관이 한 세상을 풍미하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선비들의 상당한 희생과 노력도 요구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이 처음 수용되고 200여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15-16세기, 조정에서 배척당한 선비들이 조선사회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강학(講學, 학문을 닦고 연구함)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사회의 분위기가 점차 달라졌다. 방방곡곡에 ‘윤리적 인간’을 으뜸으로 여기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선비다운 선비를 등용하자는 목소리도 커졌다.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대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어떻게 하면 선비를 제대로 기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선비들도 적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논의의 한 복판에는 ‘출처(出處)’의 문제가 자리하였다.

과연 선비는 언제 벼슬에 나아가고, 언제 물러서야하는가. 이를 둘러싼 숙의가 거듭되었다.


‘윤리적 인간’은 선비의 이상형이었다. 보통 우리가 군자(君子)라고 부르는 이를 말한다. 당연히 그는 ‘출처’의 달인이어야 했다. 17세기부터 여러 당파 간의 정쟁이 더욱 격화(激化)되자, ‘출처’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때로 그것은 선비의 목숨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아래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항을 점검할 예정이다. 우선 어떤 사람이 선비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생각이다. 이어서 유수원과 같은 선비는 왜, 추천제를 과거시험의 대안으로 생각했는지도 짚어보려고 한다. 또, 선비가 양산되고 있던 시대에 하필 왜, 학교를 부흥하려는 시도가 되풀이 되었는지도 점검해볼 것이다.


선비란 마음이 안정되고 넉넉한 존재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어쩌면 그들이 스스로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선비의 가치관이 더욱 뚜렷히 확립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점에 관하여도 약간의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끝으로, 올바른 ‘출처’를 둘러싼 선비들의 담론과 고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 오늘날 우리는 남 앞에 나서기 위해 자신의 잘난 점을 선전하기에 바쁘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출처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선비들은 우리가 놓친 인생의 숭고한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장에서는 주로 선비들의 자기부정과 고뇌를 짚어보는 셈이다. 그들의 격렬한 자기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선비의 진면목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 백강 이경여, 선비의 모범


선비의 이상은 안팎의 조화에 있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왕좌(王佐, 임금의 보좌역)가 되고, 물러서서는 한적한 자연을 벗 삼아 호연(浩然)한 기상을 기르는 것이 선비의 꿈이었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585~1657)는 그렇게 살았다. 그의 삶에 관한 세상의 평가가 그러했다. 그는 행운아였다고 말해야 할까.


1657년 8월 8일, 이경여가 세상을 떠나자, 조경(趙絅, 1586-1669)은 <만사>를 지어 바쳤다. 조경이 노래한 망자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조경,『용주유고』, 제4권, <이백강을 애도하다(挽李白江 敬輿)>).



동산에서 소리 높이 글을 읊조려 명성 떨쳤네(東山高詠振名聲)

반월성 강가에 집 짓고 살았었지(卜築江含半月城)

홀로 낚싯대 들고 타고난 성품대로 지내셨지(獨把漁竿循素性)

잠시 백구와 이별하고 창생에 답하셨네(暫辭鷗社答蒼生)

선생의 온화한 절조에 모든 이의 안위가 달렸었지(雍容一節安危竝)

세 임금의 조정에 출입하여 그 영욕 놀라웠도다(出入三朝寵辱驚)

남기신 표문 아름다워라, 시간(尸諫, 죽음을 무릅쓴 간언)보다 나으리(遺表班班過尸諫)

역사에 길이길이 그 충정 빛나리(波濤良史立忠貞)

젊어서는『 사기』 읽으시더니 늘그막에 주자를 읽으셨도다(少讀龍門晩紫陽)

평생 선비답게 출처(行藏)를 가다듬으셨네(平生儒雅飭行藏)

한가로이 살아도 명나라의 책력을 눈앞에 걸어두셨지(居閑眼掛皇明曆)

험한 곳 다녔어도 백번 단련한 굳센 마음이셨도다(履險心持百鍊剛)

두 번이나 정승이 되셨네, 밝은 성상 은택일세(再築沙堤由主聖)

(하략)



이 <만사>에 따르면, 이경여의 삶은 변화무쌍하였다. 이경여는 조정에 들어가서는 정승의 벼슬을 맡아 난국을 수습하였다고 했다. 물러나서는 백구와 벗이 되기도 하고 낚시로 유유자적하였다. 말년에는 주희의 성리서(性理書)를 반복하여 숙독했으니 아름다운 선비였다.


역사에 남긴 이경여의 발자취는 뚜렷했다. 1609년(광해군1), 그는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의 집권층인 북인과 갈등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십여 년 뒤인 1623년(인조1) ‘반정’이 일어났다. 인조가 등극하자 이경여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종5품)가 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끝내 임진왜란 떼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잊지 못했다. 1642년(인조20),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는 청나라에 끌려가 심양(瀋陽)에 억류되는 고초를 겼었다. 조경의 <만사>에서 ‘명나라의 책력’이라고 말한 부분은 그때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646년(인조24), 이경여는 우의정이었는데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없애려 하자 의리로써 이를 반대했다. 이 일로 그는 전라도 진도와 함경도 삼수 등지를 전전하는 유배객이 되었다. 조경이 윗글에서, ‘백번 단련한 굳센 마음’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사년이 지난 1650년(효종1), 새로 즉위한 효종은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렀다. 이경여는 영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청나라는 그를 미워해 조정에 그의 실각을 주문하였다. 효종은 이경여의 벼슬을 갈아치웠다. 아무 실권도 없는 영중추부사로 삼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경여는 내외의 혼란이 극심하던 난세를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선비로서 지조를 지켰다. 함부로 시류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항상 마음의 덕을 길러, ‘출처’의 정도를 걷고자 노력하였다. 그러고는 만년이 되어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더욱 잠심(潛心)하였다. <만사>의 저자 조경은 이런 그를 가리켜, ‘늘그막에 주자를 읽으셨도다’라며 그의 높은 학덕을 기렸다.


조선시대에는 이경여와 같은 우뚝한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나, 한 시도 고아한 기품과 매서운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할까. 현대인의 삶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2. 농암 유수원, 과거제의 폐단을 말하다


누구나 이경여처럼 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많은 선비들은 벼슬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의 개국 이래 늘 과거시험을 통해 유능한 선비들을 발탁하고자 노력하였다.


과거시험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그때는 아직도 실력보다는 혈연이 훨씬 중요했다. 애써 과거에 합격해도 가문이 한미(寒微)하면 벼슬에 나아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요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학문이 높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세평(世評)이 없으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최고의 정승으로 손꼽히는 황희(黃喜, 1363-1452)만 해도 출신이 변변하지 못했다. 형조판서까지 지낸 반석평(潘碩枰, ?-1540)도 노비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이 등용문(登龍門)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1519년(중종14), 조광조는 과거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했다. 그것은 일종의 추천제 시험이었다. 그러나 현량과를 시행한 보람은 조금도 없었다. 그 시험이 시행된 그 해에 조광조가 실각했다.

그리하여 현량과 자체가 무효가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조선의 선각자들 가운데는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다. 현저한 예로, 유수원(柳壽垣, 1694-1755, 호는 聾菴)이 있었다.『우서(迂書)』에서 그는 과거제도를 이렇게 비판했다(유수원,『우서』, 제2권, <학교 학생을 뽑고 보충하는 제도를 논의함>).



“과거시험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인재를 등용하면, 등용의 범위가 좁아지는 폐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설사 삼장(三場, 과거시험장)에서 지은 글이 매우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의(制義)와 같은 문장에 정통하고 익숙한 선비를 뽑는데 불과하다.


이 사람들이 과연 현명하고도 뛰어난 재사(才士)들이겠는가. 오직 과거시험으로만 인재를 뽑으면, 남모르게 조용히 학문을 닦는 선비들을 조정에 등용할 길이 없다. 이 얼마나 미흡한 것이랴.”



이 문제에 관한 유수원의 견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의 주장에 따르면, 17-18세기에는 벼슬을 포기한 선비들이 상당수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학교제도 전반에 심각한 결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수원은 그 당시의 문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근래에 이르러 과거보는 유생과 학문하는 선비가 뚜렷하게 나누어졌다. 이것은 참으로 좋지 않은 폐단이다. 국가가 선비에게 바라고 또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이처럼 천하구나. 선비가 어떻게 자중하겠는가.


학교로 하여금 성심껏 학정(學政)을 닦고 밝히게 하면, 학문하는 선비가 과거에서 나오지 않고 어느 곳에서 나오겠는가. 그러나 학교가 학정을 지니지 못하여 선비들이 모두 자신을 범상한 인간으로 자처하고 학문 두 글자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뜻 있는 선비들이 조용히 숨어 학문을 닦으면서 그 가운데 섞이지 않을 것은 당연한 사세인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학문을 닦은 선비들이 과거에서 나오도록 하여야만 국가가 비로소 인재를 얻는 효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학문이 높은 선비들을 이따금 조정에 초빙했다. 산림에 숨어있는 ‘유일’(遺逸)을 찾아서 등용하였던 것이다. 때로는 그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다. 우암 송시열은 유일로서 조정에 나아가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유수원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송시열과 한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초야에 묻힌 선비를 등용할 때조차 실속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저 형식에 흐르고 마는 경향이 심하였다. 유수원의 비판은 날카로웠다. 조금 장황하지만, 그 당시의 사정을 유수원보다 사실적으로 기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의를 갖추어 현명한 사람을 대접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현명한 사람을 초빙하는 근본을 모르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선비들이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경대부(卿大夫)가 조정에 천거하면, 임금은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 간절하게 맞이하고 그의 학술과 인품이 어떤지를 살필 일이다. 그런 다음에는 공경대부들과 의논하여 크게 등용할 만하면 중대한 직책에 임용하는 것이 옳다. 여러 가지 사무를 담당하기에 적당하면 어느 한 관직에 임명하여야 하는 것이 좋다.


만일 추천된 선비가 성품은 어질고 착하나 재능이 관직에 맞지 않아, 초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선비에게는 그가 숭상하는 것을 따르게 하여 풍속을 장려할 일이다. 그래야 임금과 백성 사이에 서로 해야 할 도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아침에 한 관직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는 다른 벼슬로 이동시킨다. 이런 일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삼가지도 않는다. 심지어 임금은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는 사람을 재상 자리에 앉히기도 한다.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있겠는가.”



학덕이 높은 선비를 등용한다고 했지마는, 조정에서는 선비의 적성과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의 실권자들은 당면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를 불러들이는 척만 할 때가 많았다. 말하자면 학덕이 높은 선비를, ‘국면전환용 카드’로만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선비에게 적절한 대접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반드시 관직으로 그의 학문과 인품에 보상해야하는 것일까. 유수원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아,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가 어찌 관직의 유무에 달린 일이겠는가. 반드시 선비답게 조정에 불러들이고 선비답게 대우해야 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참다운 도리라 할 수 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조선 후기 사회를 지배한 것은 인간의 ‘도리’였다. 도덕이었다. 선비의 가치관이 한 시대를 이끄는 이념이었다. 그러므로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도덕적’으로 위장해야만 세론(世論)의 역풍을 피할 수 있었다. 유수원은 바로 집권층의 그러한 위선을 지적하였다.


유수원의 비판을 뒤집어 보면, 조선사회의 성격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에서는 누구든지 명분과 절조(節操)를 숭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탐욕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선이라는 비판은 가능하겠으나, 무례하고 뻔뻔한 언행은 감히 누구도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다.


참고로, 유수원의 사회비판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말해, 시험을 쳐서 인재를 뽑는 것은 합리적이다. 과거제도에 무슨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느냐는 의아심이 들 수 있다. 만일 시험만 공정하게 관리된다면 큰 문제는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과거시험의 관리가 어떠했느냐는 것이다.


1612년(광해군4) 11월 19일자『조선왕조실록』에서 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과거시험을 주관한 시험관들은 답안지의 우열을 분간 하기가 어려워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들은 17세기 과거제도 시행상의 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서의(四書疑)를 가지고 생원들을 시험한 지 2백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전후 세대가 (모범답안을) 답습하여 같은 글귀를 (답안으로) 쓰게 되었다. 한 과거 시험장에서 자기의 생각대로 (창의적인) 답안을 쓰는 선비는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는 다들 같은 내용을 마구 베끼다시피 하였다. 고시관들은 답안의 우열을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식자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긴 지 이미 오래였다.”



과거시험은 ‘사서’ 곧『논어』『맹자』『대학』『중용』에서 주로 출제되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수백 년 동안 같은 교재를 가지고 시험을 치렀다. 때문에 시중에는 역대의 우수한 답안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경전에 대한 해석의 자유가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모범답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엇다. 그들은 이른바 역대 최고의 모범답안을 구하여 송두리째 외운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답안지가 너무 많았다. 과거시험은 이제 시험을 위한 시험이 되고 말았다. 고시관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과거시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여겼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전이 있을 리도 만무했고, 새로운 해석을 허용해서도 안 될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세력의 저항이 완강했다.


결론적으로, 과거시험공부는 학자의 창의적인 탐구활동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기왕에 출제된 수백 개의 문항을 반복해서 학습하는 것이 시험공부의 핵심이었다. 모범답안을 철저히 외우는 것이야말로 합격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지금의 고시제도도 별로 다르지 않다.


18-19세기가 되면, 서울의 권세가 자제들은 한 가지 해법을 찾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특전을 입어, 1-2차 시험을 면제받았다. 사실상 합격자 신분을 거저 얻었던 것이다. 소수의 특권층 자제는 과거합격자의 석차를 결정하는 최종시험장으로 직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들은 치열한 경쟁을 치르며, 합격의 행운을 얻기 위해 검은 머리가 희어지도록 과거시험장을 들락거렸다.


유수원처럼 양식이 있는 선비들은 이러한 사회풍조를 비판하였다. 책과 씨름하는 선비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그 가운데 진정한 선비가 과연 몇이나 되느냐는 혹독한 자기비판이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선비의 길은 한 시대를 특징짓는 보편의 길이 아니었던가. 누구라도 공자와 맹자와 주자를 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3. “수기”, 그에 관한 인식의 역사


한국인의 이해는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었을까. 우선 고대로 올라가 보자. ‘수기’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세기 후반이었다. 그때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영토를 널리 확장했다. 그러고는 여러 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자신의 치적을 기념했다. 바로 그 순수비문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수기’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때문에 제왕(帝王)은 연호(年號)를 세우고, 나를 닦음(수기)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是以帝王建號 莫不修己以安百姓)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 ’이라고 했다. <헌문편>(『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진흥왕은 과연 유교적 도덕에 철저한 임금이었을까.


그 시대에도 유교적 지식을 갖춘 이들은 소수나마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이해가 후대의 선비들과 똑같았을까. 그 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지식인들도 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유교적 지식은 일종의 교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지배적인 사상은 여전히 불교였다. 10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최승로(崔承老, 927-989)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성종(재위 981-997)에게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려, 유교적 입장에서 국가현안을 제시하였다. 그 글에서조차 최승로는 임금이 불교의 가르침으로 “수신(修身)”하고, 유교 경전으로 “이국(理國)”하기를 촉구하였다. 즉, 당대의 유교는 통치술을 제공하는데 만족했다. ‘치인(治人)’ 또는 ‘치세(治世)’의 도구였다. 그와 달리 불교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수신’의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수기’와 ‘치인’ 두 가지를 유교의 역할로 이해한 것은 한참 뒤였다. 정확히 말해,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일어난 변화였다. 그들은 『대학』과 그 주석서인 『대학연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들은 태조 이성계에게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태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태조1년(1392) 11월 14일자).


“간관(諫官)들이 상소하였다. ‘... 신 등이 듣자옵건대, 군주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따라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온갖 욕심이 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선유(先儒) 진덕수(眞德秀, 1178-1235)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해서 경연(經筵)에 바쳤습니다. (중략)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에 나오셔서 『대학』을 강론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효과를 이루소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새 왕조의 건국 초기부터 태조는 신하들과 함께 날마다『대학』을 읽고 ‘수기치인’의 방법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학』에 대한 조야(朝野, 조정과 그 바깥)의 관심이 커졌고, 이해도 깊어졌다.


14세기의 큰선비 권근(權近, 1352-1409, 호는 陽村)이 그런 흐름을 주도했다고 믿어진다. 그는 자신이 출제한 과거시험문제에서도『대학』의 편차에 숨은 뜻을 물었다. <전시(殿試) 책문의 제>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권근,『양촌선생문집』, 제33권).


"『대학』은 성현들이 만세에 물려준 법이다. 수기치인의 도리가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선유(先儒) 진씨(眞氏, 송나라의 유학자 진덕수)는 이를 더욱 부연하고 보완하여 『대학연의』를 저술하였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자 하는 왕은 물론이요, 학문에 뜻을 둔 선비라면 누구나 이 책을 참고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중략) 그런데 진씨의 글에는 격물보다 앞서 제왕의 정치 순서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제왕학의 근본을 말했다. 그리고 나서 격물과 치지의 요법을 서술하였다. 그 다음에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요령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치국과 평천하의 요령에 관하여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권근의 시대, 즉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이르러 ‘수기치인’에 관한 선비들의 이해는 한층 깊어졌다. 위 인용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대학』이 왜, ‘치인’을 ‘수기’보다 먼저 서술하였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였다. 참고로『대학』은 제왕을 위한 학문적 길잡이였기 때문에 치인을 수기에 앞서 설명했던 것이다.


16세기가 되면 선비들의 ‘수기’ 담론은 더욱 깊어진다. 그들은 주희의 학설의 철저히 내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 선비들은 “정심성의”을 ‘수기치인’의 요체(要諦)라고 확신하였다. 본디 이것은 주희의 주장이었다. 조광조는 주희의 견해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마음은 출신의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부한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 식으로 말하면, 선비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길러지는 존재였다.


‘수기’에 관한 조광조 및 일부 조선 선비들의 인식 수준은 송나라에서 집대성된 성리학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주희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킨 쾌거였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길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1518년(중종13) 5월 4일, 석강(夕講)에 나는 주목했다. 그때 조원기(趙元紀, 1457-1533)와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호는 靜菴) 등이 경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였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유심히 살펴보자(『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5월 4일자 기사).



“특진관 조원기가 (『대학』의) 본문을 살펴보고 나서 아뢰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는 정심성의(正心誠意)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심성의만 하면 이른바 충신의 도까지도 다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주자(朱子, 주희)가 늘 정심성의를 임금에게 권하자,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정심성의란 말을 임금께서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배운 것이 이 넉 자뿐이다.’ 효종과 광종은 송나라의 어진 임금이었으나 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정심성의로 일을 하신다면 장차 교만하게 될 우려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중략)


시강관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아뢰었다. (중략) 사노(私奴) 여형(呂衡)이란 사람은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안국에게서 『소학(小學)』을 빌려다 읽었고, 안국이 (경상감사 자리에서)교체되어 (서울로) 올 때 글을 지어서 바쳤습니다. 그 글에는 유자(儒者)들도 미치지 못할 (탁월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안국이 여기(곧 서울)있다면 그 글을 가져와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광조가 아뢰었다. 그(즉 여형)가 지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일의 선후를 아는 사람입니다. 천한 신분임에도 이와 같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허통(許通, 과거시험에 응시자격을 줌)할 수는 없다 해도, 특별한 포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선 면천(免賤, 양민의 신분을 허락)을 허락하소서. 또, 제가 들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대대로 주인에게 충의를 다하였다고 합니다. 여형처럼 (아름다운)행실을 천한 사람 중에서 어찌 쉽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의 본래 마음은 귀천(貴賤)이 다르지 않은 법입니다. 타고난 천성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의 악한 점을 바로잡는 것은 오직 교화(敎化)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형은 16세기 경상도에 살았던 사노(私奴)였다. 그런데 그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마침 조광조의 동료 김안국(金安國, 1478-1543, 호는 慕齋)이 경상감사가 되었기 때문에, 여형의 인품과 능력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경연에서 여형의 사례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와 그의 부조(父祖)를 표창하자고도 주장하였다. 조광조는 여형의 예를 들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귀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정심성의’로 ‘수기’에 전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주장했다. 조광조에게 사노 여형의 사례는 여간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19년(중종14) 겨울, 조광조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종과 몇몇 측근들의 미움을 받아, 조광조는 유배지 화순에서 사약을 마시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향년은 겨우 38세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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