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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8. 2018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9)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9)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지상강좌

조 성 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지난호에 이어서)


天依峰上開花天  천의봉 위에 꽃이 핀 날에

道士胸中滿天道  도사의 흉중에는 천도가 가득하네.

寂滅宮前脫塵世  적멸궁 앞에서 속세를 벗어나고

虛靈臺上貫天氣  허령대 위에서 천기를 꿰뚫는구나.

今日琢磨五絃琴  오늘 오현금을 탁마하니

當年透徹一太極  올해에는 일태극에 투철하리라.


박맹수 : 여기에 ‘천의봉’과 ‘적멸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배경이 있습니다. 1871년 겨울에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있는 정암사 적조암에서 해월 선생이 제자들과 49일 수련을 하는데, 적조암에 있는 꼭대기 봉우리가 ‘천의봉’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암사’를 ‘적멸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체험이 배경이 되어 지어진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적조암 수련은 해월 개인에게 있어서, 나아가서는 동학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해월이 1871년 3월에 영해에서 이필제의 요청에 응하여, 스승 수운 최제우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준다고 하는 교조신원운동을 벌이다가 처절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100명 이상이 희생되고 수백 명이 귀양가는 엄청난 사건으로, 수운이 죽은 뒤에 7-8년 동안 간신히 재건되었던 동학조직이 이 운동 때문에 한꺼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을 보면 해월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오류가 없는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월은 젊었을 때는 대단한 혁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실패가 이후 행보에 밑거름이 됩니다.


해월은 영해교조신원운동의 실패 후에 더 이상 경상도에 있지 못하고 강원도로 숨게 되는데, 강원도 정선 출신의, 지금으로 말하면 정선의 진보적 지식인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참회수련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적조암 수련입니다. 이 참회수련은 단지 지난날의 실패에 대한 성찰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동학 재건의 바탕을 다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로 해월은 1870년대 초반부터 1890년대 초반에 걸쳐 자신이 아끼는 제자들을 모두 이 적조암에 데려다 49일 수련을 시킵니다. 김연국, 서장옥, 손천민, 손병희 등이 모두 적조암 49일 수련을 거친 인물들입니다. 다만 전봉준의 경우에는 여기에서 수련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적조암 수련은 해월의 일생에서나 동학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이 수련이 제대로 된 덕분에 이후에 동학이 뻗어나갈 수있었지요.



壬辰 正月 日 임진년(1892년) 정월

運開天地一 운이 열리니 천지가 하나요,

逮道水一生 도에 미치니 물이 하나 생기네.

水流四海天 물은 사해의 하늘에 흐르고

開化修人心 개화하여 사람의 마음을 닦도다.



降訣  강결

敬義剛  공경하고 의롭고 굳세어라

  시

觀貫一理正心處  일리의 정심한 곳을 꿰뚫어 보고

知兼三道敬天理  삼도의 경천의 이치를 겸하여 알았으니

叩感百體從靈地  육신이 신령함을 느끼네

春來消息問春主  봄이 오는 소식 봄님에게 물으니

大東春色布天下  대동의 춘색을 천하에 퍼트리네

天爲父兮五行綱  하늘은 아비라서 오행의 벼리가 되고

地爲母兮五行質  땅은 어미라서 오행의 바탕이 되네

人爲子兮五行氣  사람은 자식이라 오행의 기운이 되니

父母懷中何患有  부모 품속에서 무슨 걱정이 있으랴

父兮母兮命又涉  아비와 어미가 명하고 관여하니

子在其中何患有  자식이 그 속에서 무슨 걱정이 있으랴

父母尊前誠孝道  부모님께 정성스럽게 효도하니

三才大德示無窮  삼재의 대덕이 무궁함을 보이네




김봉곤 : 첫째 줄과 둘째 줄의 “觀貫一理正心處”와 “知兼三道敬天理”은 댓

구를 이루는데, 그 다음의 “叩感百體從靈地”과 대구가 되는 구절이 없는 것은, 아

마 한 구절이 빠진 것 같습니다.


조성환 : 첫째줄과 둘째줄에서 4글자-3글자로 끊어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하나의 이치로 관통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곳이요, 삼도를 겸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하늘을 공경하는 이치이다” 같이….


박맹수 : 제 생각에는 ‘觀’과 ‘知’를 제일 나중에 해석해서, “일리를 관통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곳을 보아라. 삼도를 겸하고 하늘을 공경하는 이치를 알아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후반부는『 해월신사법설』의 제2장 「천지부모」의 사상과 상통합니다. 「천지부모」에서는 “천지부모일체”, 즉 천지와 부모를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天地卽父母, 父母卽天地, 天地父母一體也). 

[원문과 번역은 이규성『, 최시형의 철학』(이화여자대학출판부, 2011) 131쪽 참조.]



通文

壬辰 正月 日


右文爲通諭事. 蓋嘗論之, 人是 天人也, 道是大先生主無極之大道也, 其在敬天修身之道, 不敢小忽. 而酒魚肉草, 忘失天性, 濁亂元氣者也, 衣服之侈靡, 必是意移之端也, 實非守眞之本也. 此若仍置, 末流之弊, 將不知至於何境, 豈不悶哉! 可不惜哉!


통문

임진년(1892) 정월 일


이 글은 통유하는 것이다. 한번 논해보건대, 사람은 곧 천인(天人)이요 도는 대선생의 무극대도(无極大道)이니, 하늘을 공경하고 몸을 닦는 도에 있어서 감히 조금

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술·생선·고기·담배는 천성을 잃게 하고 원기를 어지

럽히는 것이고, 의복의 사치는 반드시 뜻이 바뀌는 단초이니, 실로 참됨을 지키는

근본이 아니다. 이것을 만약 그대로 두면 말류의 폐단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조성환 : 원문을 보면 “人是 天人也”와 같이 ‘天’ 자 앞에 한 칸이 비어 있는데, 이것은 ‘하늘님’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에서는 이런 관습이 없는데『, 도원기서』에서도 항상 ‘天’ 앞에 한 칸이 띄어 있었습니다.『 해월문집』에서는 이곳에서 처음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박맹수 : 먼저 이 통문이 쓰인 것이 1892년 임진년인데, 이 해는 조선말기의 민중운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해입니다. 임진왜란이 지난 지 3백년이 되는 해인데,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던 시기입니다. 전국적으로 민심이 요동치던 시기입니다.


가령 이 해에 “남조선에서 구세주가 나온다”는 신앙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구세주가 되려면 비결을 얻어야 하는데, 그 비결이 선운사 도솔암에 있다는 소문이 나자, 1892년에 손화중 대접주 세력이 그 비결을 손에 넣고자 몰려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운사 석불비결 탈취사건’입니다.


한편 이 시기쯤 되면 동학이 제도종교로서 거의 완전한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이 통문은 그것의 구체적인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가령 본문에 동학 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계율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그것의 핵심은 술·생선·고기·담배(酒魚肉草)를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금지하라는 계율로만 이해해 버리면 소극적 해석이고, 사실은 그것들을 금해서 모아진 재물을 가지고 유무상자(有無相資)의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돈으로 체포된 도인들의 석방자금으로 삼고 그 가족들의 생계비로 주고, 동학공동체의 활동 자금으로도 삼았습니다(박맹수, 「서구적 근대의 신화를 넘어서」『, 녹색평론』 79호, 2004년 참조).


참고로 스페인에 가면 ‘호세 마리아’라는 가톨릭 신부가 만든 ‘몬드라곤’이라는노동자협동조합이 있는데, 이 협동조합도 금주금연부터 시작했습니다. 사실 모든 협동조합의 공통적인 실천조항은 술·생선·고기·담배(酒魚肉草)를 금하는 것이었지요. 1917년에 시작된 원불교의 저축조합운동도 마찬가지였고요.



古經曰 : “聖人無慾, 君子遏慾.” 今此吾道道儒中, 聖人君子之質, 有幾箇員乎? 苟非性者, 擧皆强作者. 惟我諸君, 處在作不已之品, 豈不防微, 杜漸以害, 大道成就之理乎! 潛滋暗長, 凡於害道等物, 條條列錄于左, 大願諸君, 各須明察, 逐條遵行之地, 千萬幸甚.


옛 경전에 이르기를 “성인은 욕심이 없고 군자는 욕심을 막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 도의 선비 중에 성인, 군자의 자질이 몇 사람이 되겠는가. 참으로 성품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억지로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 제군들은 처지가 만들어야할 자품이니, 어찌 기미와 조짐을 막지 않아서 대도를 성취하는 이치를 해치겠는가. 점점 불어나나고 몰래 자라나서 무릇 도에 해를 끼치는 물건 조목을 왼쪽에 나열하여 기록한다. 크게 원하건대 제군들은 각기 모름지기 분명하게 살펴서 조목마다 준행하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다.


一. 魚肉酒艸四物, 有害於道人氣血精神, 少無有益, 一切防塞事.

생선과 고기, 술과 담배, 이 네 가지는 도인의 기혈과 정신에 해가 되고 조금도 유익함이 없으니 일체 막을 것.

一. 木屐革鞋, 大有傷氣之物, 亦有天厭之理, 從今以後, 雖雨下之日, 勿着木屐革鞋事.

나막신과 가죽신은 크게 기운을 해치는 것이 있고 하늘님이 꺼리는 이치가 있으니, 지금부터는 비록 비가 오는 날이라도 나막신과 가죽신을 신지 말 것.

一. 凡侈靡之物, 流荒者之所嗜也, 非治心者之所當也. 道儒豪奢之弊禁防事.

모든 사치스런 물건은 탐닉하는 자가 즐기는 바이지,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다. 도유(道儒)들은 호화롭게 사치하는 좋아하는 폐단을 금할 것.

一. 吾道中道儒, 統樣笠․洋紗․唐木․彩緞等物, 一切嚴禁, 只着麤布․麤木事.

하나. 우리 도중(道中)의 도유들은 통양립과 양사(洋紗), 당목(唐木), 채단(彩緞) 등의 물건은 일체 엄금하고, 단지 거친 베옷과 거친 무명을 입을 것.

一. 老者, 非帛不暖, 六十以上老人特許着紬事.

하나. 노인은 비단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으니, 육십 이상의 노인은 특별히 명주 입는 것을 허락할 것.

一. 少者着紬, 亦近於華侈. 以堅固論之, 猶下於木布矣. 少者着紬, 永永防塞事.

하나. 소년이 명주를 입는 것 또한 사치에 가깝다. 견고함으로 말하면 무명과 베옷보다 못하니, 소년이 명주를 입는 것을 영구히 막을 것.

一. 公服禮服, 特爲分揀事.

하나. 공복과 예복을 특별히 분간할 것.




박맹수 : 여기에서 “어육주초를 금한다” “나막신과 가죽신을 금한다”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동학이라는 종교공동체의 계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절약되는 금액은 유무상자 경제공동체의 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즉 검소한 생활에서 얻어지는 금액을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동지들의 구명운동, 뒷바라지 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비단옷을 허용한다”는 것은 동학적 돌봄, 또는 동학식 사회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월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인 ‘손씨 부인’이, 손병희 선생의 누이동생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증언을 남겼습니다.


“해월 선생은 반주를 즐기셨다. 그래서 집에 계실 때는 반주가 끊이지 않게 했다. ”


동학은 학문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 그리고 경제공동체이자 종교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1861부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발전해 왔는데,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탄압과 탄압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1892년에 동학교도들과 접주들에게 발송된 이 통문은 동학이 마침내 제도종교로서의 틀을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은희 : 장 보드리아르가『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소비라는 것은 사회의 계급질서와 상징체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가령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려면 브랜드 아파트의 열쇠를 보여주어라, 친구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물어오면 당신이 타고 있는 차를 보여주어라, 이런 식으로 자기가 소비하는 것이 자기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통문을 보니까 당시 동학공동체 안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도인들이 많아지고 양반과 평민이 같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비단옷을 입고 온 양반과 갈옷 입고 온 평민 사이에 심리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 같고, 해월 선생께서 비단옷보다 갈옷 입는 것이 더 도인답다고 해서 갈등을 완화시키고, 부자도인들이 위세를 떠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를 만들려 한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여기에 ‘도유(道儒)’라는 말이 나오는데, 조선시대에 유교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한의학을 한 사람을 ‘유의(儒醫)’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선비 한의사”인 셈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유교문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학에 입도한 사람을 ‘도유’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儒)’의 문화가 깔려 있는데 그 바탕 위에서 동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通文

右敬通事. 今春享禮, 姑爲停止, 別設齋所, 終當有指揮, 各處道儒之祭需錢, 比前倍加出力. 該接主, 晦初間, 速速收合後, 姓名錢數, 昭詳列錄, 而各處道家, 每夜亥時, 敬獻淸水, 必於墻垣內淨潔處, 定所, 只用新沙鉢, 不爲鋪席, 不避風雨, 克敬克誠, 跪祝曰廣濟蒼生之大願.


통문

이 글은 삼가 통지하는 것입니다. 올 봄의 향례(享禮)는 잠시 중지하고 별도로 재소(齋所)를 설치하여 종당 지휘함이 있어야 하니 각처의 도유(道儒)들은 제사비용을 이전보다 두 배로 내야 합니다. 해당 접주는 그믐과 초하루 사이에 속속 수합한 뒤에 성명과 금액을 소상히 열거·기록하고, 각처의 도인들은 매일 밤 10시 전후에 경건하게 맑은 물을 바치고, 반드시 담장 안쪽의 정결한 곳에 장소를 정하고, 오직 새 사발만을 쓰고 돗자리를 펴지 않고 비바람을 피하지 말고, 경건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무릎을 꿇고서 “널리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큰 바람”을 말합니다.


三月初一日, 爲始設行, 而若有故, 則初九日爲始. 又若有故, 則十五日爲始. 限百日, 至誠設行. 或無疎忽指目之意, 布諭之地, 幸甚.


壬辰二月二十八日.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시행하고, 만약에 무슨 일이 있으면 9일에 시작하고, 그래도 일이 있으면 15일부터 시작하여, 100일 동안 지성으로 시행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행여 소홀히 하여 지목되는 일 없이 포고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진년 2월 28일.



최은희 : 100일 기도를 하라는 통문인데, 동학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도 주제가 세상과 백성을 구하는 광제창생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박맹수 : 이 통문은 광제창생이 갑오년 농민혁명 때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진년(1892)쯤 되면 동학 내부에서 사회적 문제들과 맞물려서 활발한 준비를 하고 있었음말해주고 있습니다. 교조신원운동도 이 단계에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최은희 : 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보면, 이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광제창생을 기도하고 있다.


박맹수 : 이전까지는 49일 기도였는데 이 무렵부터 100일 기도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야규 마코토 일본에서는 “100일 기도”라는 관습은 없는 것 같습니다.



通文

右敬通事. 各處道儒中, 以碩望篤行之人, 擇出任命者, 一以爲接濟之方策, 一以爲勸學之綱領矣. 

近日以來, 規模踈濶, 弊源滋蔓, 各該接主, 或因私情而妄薦, 或拘事勢而輕差. 不顧體法, 勿論優劣, 家家帖文, 人人任名, 昨日入道, 今日差任, 甚至有兼帶之擧. 

近日指目, 安知不由於此乎! 自今以後, 差任一款, 姑爲停止, 第觀人望, 終有陞薦之道矣. 以此諒悉, 火速布諭之地, 幸甚.


壬辰二月二十八日



통문

다음은 삼가 통지하는 것입니다. 각처의 도유(道儒)들 중에서 명망 있고 행실이 돈독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접제(接濟)할 방책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학(勸學)의 강령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규모가 엉성해지고 폐단이 더욱 늘어나서, 해당 접주들이 혹은 인정에 이끌려 제멋대로 천거하고, 혹은 사세(事勢)에 구애되어 가벼이 뽑기도 합니다. 체통과 법도를 돌보지 않고 우열을 따지지 않은 채, 집집마다 임명장이 있고 사람마다 임명받아, 어제 입도한 사람이 오늘 임명되고, 심지어는 직책을 겸하는 일도 있습니다. 

근래에 지목받는 것이 어찌 이것 때문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앞으로는 사람을 가려 임명하는 조항은 잠시 중단하고, 단지 인망(人望)만을 보고서 결국에는 승진을 천거하는 도가 있게 하겠습니다. 이 점을 잘 헤아리시고 (이상의 내용을) 속히 포고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임진(1892) 2월 26일




박맹수 : “接濟(접제)”는 “접화(接化)”의 다른 말로, 만나는(接) 사람마다 포덕해

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김봉곤 : ‘濟(제)’는 정신적인 ‘救濟(구제)’와 생활적인 ‘경제(經濟)의 의미가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瞻座下

輪照

瞻仰德義, 靡日不切. 恪詢庚炎.


여러분들께

돌려 보십시오

멀리서 당신의 덕스러운 모습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하루라도 간절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무더운 더위에 삼가 묻습니다.


侍中僉候, 衛道萬旺, 仰溸區區願聞, 侍狀僅依大幸. 第有緊通之事, 信勿泛聽,


모시고 계시는 여러분께 안부를 묻습니다. 도를 지키고 만사가 잘 되시는지요?

우러러 그리운 마음 그지없어 묻고자 합니다. 모시고 사는 모습이 겨우 유지되어서 크게 다행입니다. 그런데 긴급하게 통지할 일이 있으니 대충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봉곤 : ‘侍中(시중)’이나 ‘侍狀(시상)’은 “부모님을 모신다”는 뜻으로 편지글에서는 늘 쓰는 말입니다.

박맹수 : 참고로 해월 선생은 조실부모(早失父母)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는 ‘가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조성환 : 유교 문헌에서는 “부모님을 모신다”는 뜻이 되겠지만 이곳은 동학 문헌이니까 “하늘님을 모신다”(侍天主)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지금도 천도교(동학계열) 관계자분들은 “모시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던데요….



夫吾道開闢之運, 無極之道也. 如此 聖運聖道, 于今三十餘年. 指目種種有之, 慥慥莫甚.


무릇 우리 도는 개벽의 운수이고 무극의 도입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운과 성스러운 도가 나온 지 지금까지 30여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라로부터) 지목되는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경우는 없었습니다.



조성환 : 앞에서는 ‘天’ 자 앞에 한 칸 띄워 쓰는 예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聖’자 앞에서도 띄어 썼네요.


김봉곤 : 조선시대에도 ‘피휘’라고 해서 부모님이나 성인의 이름 앞에서는 한 칸 띄웠습니다.


박맹수 : 이곳의 “무극(無極)”이라는 말은 ‘동학’의 다른 말인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무극”으로(『용담유사』「용담가」),『 동경대전』에 나오는 “無往不復之理(무왕불복지리),” 즉 “가서 다시 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이다”와 상통하는 말입니다(「논학문」). 원불교나 증산도의 말을 빌리면 “원시반본(原始返本)”이라고 할 수 있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지요.


서구에서 근대(近代)가 시작될 때 그것의 사상적 뿌리, 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습니다. 일종의 “온고지신”이나 “법고창신”으로, 고대 그리스를 “오래된 미래”로 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개벽지운, 무극지도”라는 말로부터 당시 동학교도들이 동학사상을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진리에 바탕을 둔, 미래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라고 본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인류의 미래가 동학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이 유럽이나 중국에서의 오래된 미래는 열심히 찾으면서 한국에서 나온 오래된 미래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김봉곤 : “원시반본”의 ‘原(원)’은 “시초를 더듬어 올라가다,” “본원으로 돌아가다”는 뜻입니다. 대종교에서도 많이 쓰입니다. 가령『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신과 같은 마음으로 창조했다, 그 마음을 이미 부여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초, 본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맹수 : 여기에 ‘지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학은 1860년에 창도된 이래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6-7차례 정도 ‘ 지목’을 당합니다.


첫 번째 지목은 1861년 가을로, 이때 수운 선생이 체포됩니다. 석방된 뒤에도 계속 탄압이 있어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지목은 1863년 12월로, 수운이 20명의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음력 3월 10일에 수운은 처형당하고 나머지 20명은 유배당합니다. 


세 번째는 해월이 7-8년간 노력해서 어느정도 조직을 복원하게 되니까, 이번에는 과격파 이필제가 나타나서 스승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면서 1871년 3월에 영해교조신원운동(寧海敎祖伸寃運動)을 일으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시 지목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필제가 다시 1871년 8월에 문경에서 또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 때문에 네 번째 지목을 당합니다. 


이후로 강원도로 숨어들어서 1872년부터 해월을 중심으로 10여 년간 동학조직을 복원해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을 때 1885년에 다섯 번째 탄압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1887년에 보은에 동학본부를 최초로 설치하는데, 이것 때문에 1889년에 다시 지목을 당합니다.


이렇게 30여년 동안 6-7번의 지목을 통해서 스승이 죽고 동지 수백 명이 붙잡혀 희생당하는 가운데 동학 조직을 끌어온 해월의 화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탄압 속에서 견뎌낸 동학의 저력과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문제를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똑같이 탄압을 받았지만 천주교는 그래도 프랑스라는 서구열강의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학은 천주교와는 또 다른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은 기댈 수 있는 곳이 오로지 민중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동학의 위대한 점입니다. 외세도 아니고 집권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오로지 민초들에 의해 지탱되었다는 것이 동학의 가장 큰 강점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2005년에 광복 60주년 기념 한국독립운동사 강연 때 하신 말씀입니다. 30여년 간의 탄압의 역사가 오히려 동학을 단련시켰다고-.



望須僉員, 以何計法, 頓無指目, 快保大道, 以顯聖德耶. 察其器局, 別定差任矣. 各處頭目, 一一輪示, 不計有無識, 各言其志, 又錄姓名, 秘密重封, 而書到後, 限十五日, 沒授首接處, 封送切企, 餘不備書禮.

壬辰閏六月初二日 北接法軒


바라건대 모름지기 모든 도인들께서는 어떤 계책과 방법으로 결코 지목됨이 없이 대도를 깨끗하게 보전해서 성덕을 드러낼 것입니까? (그러기 위해서) 각자의 기량을 살펴서 별도로 임명할 것이니, 각 곳의 두목은 하나하나 돌려보고 학식의 여부를 따지지 말고 각자 자기 뜻을 충분히 말하게 하고, (도인들의) 성명을 기록하여 비밀리에 이중으로 봉해서 이 편지가 도착한 날로부터 15일 내에 모두 수접처에 접수되도록 봉송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머지는 편지 쓰는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임진년 윤6월 2일 북접법헌




박맹수 : 이 통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목을 피하기 위한 방책을 어떻게 강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목을 피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는 접주를 임명할 터이니, 접주들은 휘하에 있는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파악해서 비밀문서로 만들어서 수접처로 보내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에 ‘북접법헌’이라는 호칭이 나오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를 ‘남북접대립’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당시 동학조직을 대표하는 남접과 북접이 대립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수십년 동안 동학을 연구한 결과 내린 결과는 이런 ‘남북접 대립설’은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북접’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북접’은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에서 온 말입니다. ‘북도중주인’이라는 말은 1879년의『 도원기서』에 나오는데, 이 말이 1900년대 동학 기록에서는 ‘북접주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런데 이 통문을 보니까 이미 1892년 임진년에 ‘북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880년부터 1887년 사이에『 동경대전』이 여러 차례 간행되는데 거기에도 ‘북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북접’이라는 말은 이미 1880년대에 동학교단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월은 수운으로부터 직접 경상도 “경주 북쪽 지방의 총괄책임자”라는 의미에서 ‘북도중주인’이라는 직책을 받습니다. 그리고 해월은 정기적으로 용담에 가서 수운의 가르침을 직접 받습니다. 그것이 1880년대에 오면 ‘북접’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때의 ‘북접’의 의미는 방위나 지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도통’, 즉 정통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수운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직접 ‘북도중주인’이라는 직책을 받은 정통 후계자다”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남접’이라는 말은 1894년 3월의 1차 혁명 이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나오는 ‘남접’의 의미는 “3월에 전국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 동학농민군”이라는 뜻입니다. 전봉준 이외에는 매천 황현, 일본군, 조선왕조 지배층 등이 ‘남접’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1차 봉기는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고부 일대의 동학군만 봉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해월 휘하의 경상도와 충청도 동학군도 같이 봉기했습니다. 1차 혁명세력이 전라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가령『 백범일지』에는 “전라도에서 전봉준이 봉기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해월선생이 말씀하시기를, ‘호랑이가 처 들어와서 사람을 물어죽이고 있는데 앉아서 죽을 수만 있느냐!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야한다”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 100여년 동안 ‘남북접 대립설’이 정설로 유지되어 온 것은 일제시대라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당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은 동학농민군들이었는데, 일본은 이것을 가능하면 일부 지역적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과격파 몇 사람의 행위인 것처럼 축소시키려 했던 것이 식민지시대 내내 일본의 정책이었고, 그 밑에서 공부한 1세대 한국사학자들이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 이후의 2세대, 3세대 학자들은 종교외피설에 입각해서 동학하면 저급한 민간신앙처럼 취급하면서 동학사를 제대로 공부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북접’이라는 말은 특정 지역의 동학 세력을 가리키는 지역적 개념이 아니라, 수운으로부터 직접 도통을 전수받았다는 정통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제가 일본에 있는 1차 사료 등을 토대로 1997년에 세 차례에 걸쳐 논문으로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박맹수,『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일깨우다』, 모시는사람들, 2011, 315-352쪽 참조).


최은희 : 제가 생각하기에 ‘남접-북접’의 대립구도를 오늘날 고착화시킨 것은 오지영의『 동학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동엽의 「금강」이라는 시도 이『 동학사』를 보고 쓴 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시에 보면 북접의 해월이 남접의 전봉준을 호응해주지 않아서 혁명이 실패했다고 나오는데, 아마 이것이 이른바 ‘남북접대립설’을 가장 대중화시킨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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