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동학유산 답사기
2017년은 안산 울림의 소모임 ’동학 언니들‘이 경기도 성평등 기금을 후원받아 강좌도 듣고 답사도 다니고 인터뷰도 하는 등 동학 공부를 실컷 할 수 있었다. 그중 동학의 유산이 서려 있는 역사적 장소를 답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생한 즐거움을 주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진행하는 동학 테마답사에 2차에 걸쳐 다녀왔다. 1차는 1박(6/24,25)으로 전봉준-김개남 테마답사, 2차는 당일여행으로 손화중 테마답사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서 시작해서 황토현 전적지, 만석보터, 전봉준 고택, 사발통문 작성지,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백산성, 구미란 전투지, 원평집 강소, 김개남 고택터, 조규순 영세불망비 등을 답사했다.
우리 울림의 일행은 총7명이었는데 주최 측에서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질문이 많고 적극적이었다. 답사를 가이드한 사람은 기념재단의 연구부장으로 전봉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부장은 우리 팀의 열정을 기뻐해서 열심히 안내를 해 줬고 묻지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을 했다.
황토현에 대한 해설이 인상적이었는데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승지여서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 전두환이 군사구테타로 정권을 잡았음에도 혁명의 가치를 덧씌우고 싶어서 이곳에 정부지원으로 탑을 세우고 부지를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아버지가 동학 접주였다는 이유를 들어, 전두환은 같은 전씨라면서…. 전봉준이 살아 있었다면 타도 대상 첫 번째였을 인간들이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동학을 제대로 이해한 대통령이었고 2004년에 한국 민주화 투쟁의 역사적 성과로 동학농민기념관
을 건립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숙소 밖을 산책하던 우리는 연구부장을 만나서 막걸리 한 잔 하자고 청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다가 우리는 격렬한(?) 토론을 하게되었다. 토론 내용을 좀 거칠게 정리하자면 동학혁명을 조선 전체의 저항정신으로 볼 것인가, 전라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사건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답사 안내를 받으면서 시종 마음에 걸렸던 얘기를 한 것이다. 전봉준은 죽음을 각오한 자로, 해월은 살기 위해 도피한 자로 표현하며 동학의 모든 것이 전봉준의 공으로 정리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울림의 동학언니들은 해월이 동학의 정
신을 조선에 뿌리내리기 위해 34년의 세월을 온통 바쳤던 분으로 배웠다. 동학란은 1894년만의 반란사건이 아니다. 민족저항정신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랜 기간 공들였던 민중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물론 전봉준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전봉준만을 높이고 동학을 세운 선사들을 배타적으로 말한다면 돌아가신 전봉준 장군이 좋아할까?
둘째 날은 김제로 넘어가서 원평집강소, 구미란 전투지 등을 답사했다. 이날은 최고원이라는 여성 해설자가 안내를 했다. 구미란 전투를 해설하기에 구미란댁이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마을 이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마을 입구의 나무, 꽃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했는데 감성적 접근이 당시 민중의 삶을 가슴으로 깊이 다가오게 했다. 동학접주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타지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운명처럼 동학을 해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평집강소는 백정 출신 동록개라는 사람이 김덕명 금구대접주를 찾아와 “신분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헌납한 집으로, 동학봉기 당시 폐정개혁을 실천에 옮겼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을의 보수적 어르신들은 동록개가 백정이라고 집강소에 그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구미란댁은 원래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멋진 여성이다.
박길수 대표는 출판사(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천도교 자료담당자로서 동학역사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분일 것이다. 서울은 동학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장소이다.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이 갇혀 있던 감옥(전옥소)과 재판받고 처형당한 곳이 있으며 광화문복합상소를 올렸던 곳이 있기 때문이다.
박길수 대표는 서울동학답사를 ‘서울동학올레 순례지’라고 표현하면서 올레길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지방에 한정된 것같이 알고 있는 동학의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적으로도 1894년으로 국한하지 않고 그 이후로도 연장하며, 동학이 우금치에서 좌절된 것이 아니라 서울을 거쳐 새롭게 꽃피었음을 구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학하면 1894년 전라도 봉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공부할수록 동학은 일부 도민만 관련이 있었던 것도 1894년에만 반짝했던 사건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잘 알려주는 것이 서울 동학올레길이다. 답사는 천도교 중앙대교당, 태화관, 보성사(현 조계사 경내, 수송공원), 고등재판소(현 제일은행 본점), 전봉준 장군 처형지, 경무청, 해천교, 광화문복합상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는 3.1 독립서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다.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의암 손병희에 의해 만들어지고 묵암 이종일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일제에 의한 보복으로 소실된다. 묵암은 제2의 동학혁명을 일으키자고 수 차례 의암을 설득했던 인물이고 근대 여성평등의 내재적 기반이 동학이라고 말했으며 33인의 대표중 한 분이다. 결국 3.1만세로 동학이 재현되었는데 민족 대표 33인 중 15인이 천도교인이었으며 그중 7명은 동학 대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한 분들이었다. 3.1만세의 물적 인적 기반이었던 천도교는 이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잡혀가고 재정적으로도 매우 힘들어졌다고 한다.
옛 고등재판소터는 해월 최시형이 한달 보름 동안 총 10여 차례 재판을 받던 곳이라고 한다. 서소문 감옥에서 목에 칼을 쓰고 재판을 받기 위해 무교동을 경유하여 청계천 다리, 모전교를 지나 종로통 피마골을 지나왔다고 한다. 70이 넘은 노인이 계속되는 설사와 다친 다리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황에서 쓰러질 듯 걸음을 옮기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저 먼 이국땅에서 행한 예수의 고난길은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는데 이 땅에서 귀한 우리 잘살아 보자고 목숨 바친 해월의 고난길은 과연 누가 기억하는가? 억울하고 답답했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대한 얘기도 꼭 알아야할 역사였다. 동학은 처음부터 봉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적법한 절차로 민원(교조신원)을 제기하기 위해 공주와 삼례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고 충청감사와 전라감사에게 의송단자를 제출했다. 중앙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라는 답을 듣고 광화문에서 복합상소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최대 인원의 보은취회가 열렸으며 고부군수의 학정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결국 전봉준에 의해 동학 봉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고종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대응이라는 것이 청을 불러들이는 것이었고 이를 기회로 생각한 일
본놈들이 들어와 조선은 청일전쟁터가 되고 만다.
박맹수 교수는 일본의 나카츠카 교수와 ‘한일 시민 공동 동학답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해서 2017년은 12회가 되었다. 나카츠카 교수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의 저자이다. 일본인들이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경복궁에 진입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일본학계에 알려낸 분이다. 청일전쟁의 전초전인 경복궁 침탈의 장소와 을사늑약의 장소인 덕수궁을 일본인들과 함께 답사한다는 얘기를 듣고 꼭 참석하고 싶었다.
울림 동학언니들 일행 6명은 나카츠카 교수를 뵙고 깜짝 놀랐다. 89세인 교수는 놀랍게 꼿꼿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물론 주류학자들도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데 홀로 진실을 외치려면 저 정도의 풍모를 가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맹수 교수도 일본 참가자들에게 그들의 침탈에 의해 조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열심히 들었고 질문도 많았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의 표정을 계속 살피게 된다.
당시 일본은 국제법을 어기고 경복궁 영추문을 폭파하고 도끼와 톱을 이용했으며 사다리를 타고 넘어왔다. 조선군과 하루종일 전투가 벌어졌으며 숨은 국왕을 찾기 위해 경복궁을 샅샅이 뒤지다가 국왕을 찾아 포로화한 것이다. 이것이 경복궁 침탈의 진실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2차 동학봉기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시작으로 풍도해전, 성환전투를 일으키며 청군을 제압하고 동아시아 판도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청일전쟁 이전에 조일전쟁이었고 막강한 무력에 의한 대학살이었다. 동학군이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함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과 함께 시해장소를 탐방하는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들이 숙연한 모습으로 참배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해에 민비는 아들 순종의 혼사에 돈을 물쓰듯 하며 최고로 사치스럽게 치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민비의 영정을 모신 곳에서 우리는 조의를 표하고 나와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민비의 과오와는 상관 없이 내 나라의 국모를 함부로 살해한 것에 대한 분노, 착잡함 등이 올라왔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곳이 덕수궁 중명전이라는 것을 과연 몇 명이나 알까? 중명전을 답사하면서 중요한 역사에 무지한 우리들은 자책했다. 그곳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당시의 모습, 즉 이토히로부미와 을사5적이 긴 탁자에 앉아 회의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5, 6명을 아이들을 인솔하고 와서 을사 5적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주면서 꼭 기억하라고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답사가 끝나고 일본인들과 혜어지는데 그들이 뭔가를 우리 손에 쥐어줬다. 사탕이었다. 한국인은 우리 일행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우리에게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던 거다. 그들 중 몇 명은 일본 아베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가도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감사한 답사였다.
박맹수 교수와 나카츠카 교수! 일생을 동학 제대로 알리기에 헌신하고 계신 두 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두 분의 열정과 노고에 감사드린다.
이번에는 경기도 답사다. 성환, 평택, 당진을 다녔는데 청일전쟁의 첫 지상전이 성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격전지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5시간만에 청군 주진지인 월봉산을 빼앗았다. 청 패잔병 2천여 명은 강원도 지역으로 우회하여 후퇴해 평양 주력부대로 합류하는데, 평양전투에서도 참패한 청군은 조선땅을 다시 밟지 못한다.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침탈, 7월 29일 성환전투, 9월 15일 평양전투, 10월 동학농민군 봉기. 이렇게 일본에 의한 학살이 계속되었다. 당시 월등한 무기를 갖춘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최소 3만명이 학살당했다. 이런 사실을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우리도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성환, 그 학살의 현장에는 표지판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전쟁이자 동아시아 정세가 바뀐 사건임에도 역사의 현장이 방치된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박맹수 교수는 말한다.
“국내의 청일전쟁 현장은 완전히 잊힌 장소다. 다른 나라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더 문제다. 가해의 책임을 물으려면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관련 사실조차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