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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1. 2018

꽃피는 의미

[개벽신문 제74호, 2018년 5월호] 내 마음 열리는 곳

심 규 한 |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아이들의 질문이 우리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질문을 새롭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올해 만난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종종 의미 없다는 말을 잘 한다. 친구는 주관이 뚜렷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의미 없다고 말할 때, 나는 그의 강한 주관과 의미에 대한 집착을 읽는다. 그런 식으로 그 친구가 말하는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친구가 의미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친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다양한 의미들이 만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생각해보니 의미란 객관적으로 정해진 무엇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무엇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내 삶을 생기 있게 북돋아 주는 대상을 가리킬 때 의미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당장 우리 자신이 의미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부모, 애인, 친구, 돈, 아끼는 물건, 선물 등 의미 있는 것들의 목록이 차례대로 떠오를 것이다. 이럴 때 의미는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지키거나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의미를 추구하는 행동은 보편적이며 바람직하며 권장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의미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의 뜻일 것이다. 의미에 대해 묻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잊지 않은 친구는 그 누구보다 강한 삶의 열정을 가신 셈이다.


나는 의미라는 한자어보다 뜻이라는 우리말이 더 좋다. 뜻이라고 말할 때는 말할 때의 어감과 거기 담긴 의미가 일치하는 느낌이 든다. 내게는 뜻이 생명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뜻이 담긴 말이 생명있는 존재로까지 느껴진다. 언어적으로 말이 형체라면 뜻은 본질일 것이다. 따라서 말과 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사회생활과 생명활동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뜻을 묻고 뜻을 알고 싶어 한다. 그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볼 때 나 또한 세상의 의미 없음에 실망을 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염세주의자의 모습이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맹목적 경쟁을 부추기는 시험과 주입식 교육에서는 아무런 의미(뜻)를 찾을 수 없었다. 어른들의 삶과 사회는 권위에 찌들고 허위로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돌파할 만큼 나 자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지했다. 그렇다고 직관에 따라 행동할 만큼 용기도 없었다. 자신의 확신과 철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을 견디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 사이 나는 점점 나만의 탐험을 감행하게 되었다.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 진실이라는 것을 들려주는 책을 찾아 읽어나갔다. 또한 학교에서 말하지 않는 새롭고 생생한 경험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고 싶었다, 생생하게. 실감하며 살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그러한 갈증과 욕망의 추구가 결국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다. 길은 외롭고 어두웠으나 그 사이 별처럼 작은 나만의 의미들이 쌓여 갔다. 그리고 어느 홀로인 밤 나는 내가 발견한 별들이 밤하늘에 걸려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생이 외롭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난 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짝이는 별들보다 어둠에 묻힌 별이 더 많듯. 그중 자연의 발견이 있다. 나는 지금 강진에 내려와 있다. 얼마 전에는 완도수목원을 다녀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난대림이 자생하는 수목원에는 동백을 비롯해 수많은 나무의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다채로운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난다는 것은 생을 마치기까지 축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자연도 쉼 없이 나를 자극한다.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길가에도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잡초 또한 경이롭다. 민들레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아침이 되어 민들레꽃들이 모았던 꽃잎들을 해를 향해 일제히 펴는 장면은 위대한 합창 같다. 바닥을 별처럼 노랗고 하얗게 수놓은 민들레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불쌍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에 고립된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걸어 다니는 길에는 제비꽃이 한창이었다. 단순한 모양을 한 잎과 자줏빛 제비꽃들은 그 자체로 얼마나 단아한가? 그런데 요새 몇 주 나는 개미자리라는 조그만 풀의 매력에 빠져 있다. 개미자리는 이름처럼 쬐그만 풀이다. 한 모숨이 손가락 한마디가 되지도 못하는 게 많다. 꽃도 1~2㎜로 작다. 그래서 땅바닥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일단 그 꽃을 발견하게 되면 이제는 매일 그 꽃을 다시 보려는 마음을 내며 바닥을 훑게 된다. 개미나 알아볼 만큼 눈에 띄지 않게 작아서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괭이밥의 노란꽃도 요즘 만나는 예쁜 꽃이다. 괭이밥은 잎과 꽃이 모두 선명하고 깨끗하다. 이런 친구들이 교정의 길가에 바닥에 흔해서 가꾸지 않은 꽃밭을 이룬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잡초로 불린다.


개미자리


하지만 이들에 비해 좀 더 키가 큰 선갈퀴와 갯완두는 꽃은 아름답지만 눈에 잘 띄게 일찌감치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잡초의 운명도 이렇게 갈린다. 좀 더 바닥에 버려진 땅에 척박한 곳에 작게 틈을 비집고 자라는 잡초가 눈부시게 살아남아 남는 것이다.


내가 잡초를 말한 이유는 의미 때문이다. 내가 외롭고 쓸쓸한 날에 나를 일으키고 내게 감동을 준 꽃은 크고 화려한 꽃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벚꽃을 찾아다니고 동백이니 철쭉이니 꽃밭을 찾아다니지만 나는 오히려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잡초의 꽃들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꽃들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발견할 때 더 감동하는 것 같다. 그때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없이 내가 발견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의미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 쓸쓸한 날에 나를 일으켜준 눈부신 꽃들은 모두 변경에서 피었다. 척박하고 버려진 곳에서 살아낸 눈부신 생명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잡초를 잡초라 부르지 않는다. ‘잡초는 없다’는 책을 낸 윤구병 선생의 말씀과 같다. 가까운 곳 영광에 살고 계시는 황대권 선생은 독재정권 시절 수형생활을 하며 감옥에서 잡초 농사를 지으며 오히려 삶을 치유하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지 않았는가? 김지하 선생의 생명철학도 감방의 쇠창살 창문 틈에 쌓인 먼지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띄개가죽나무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생명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내게 의미는 생명과 같이 발견해 가야 할 무엇인 것이다.


봄날, 지천에 흐드러진 꽃들을 보면 의미를 갈망하는 친구들에게 꽃들이 외치는 것 같다. 외롭지 말라고, 너 또한 아름답다고, 힘껏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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