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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7. 2018

어둠 속에서

- 어둠의 교육학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내 마음 열리는 곳

심 규 한 |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우리는 흔히 삶을 환한 대낮에 벌어지는 일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햇빛과 같은 것을 주려 노력합니다. 식물에게는 햇빛이 필요하다는 식의 단순한 도식을 적용합니다. 어떤 부모들에게 그것은 돈이고, 어떤 부모들에게 좋은 학원이며, 어떤 부모들에겐 설교입니다. 학교에서도 햇빛의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교실에서도 경쟁과 자극으로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따뜻한 햇볕도 있습니다. 이솝우화처럼 더워 스스로 옷을 벗고 성장하도록 북돋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어둠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치도 경험도 생각하는 방식도 너무나 다릅니다. 이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 또한 사춘기 때 저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의 허위성에 역겨움을 느꼈지만 저 자신의 이중성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헬렌켈러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실존처럼 강렬한 것이 있을까요?


개인의 삶이란 철저히 실존적입니다. 개인이 살아가는 세계도 철저히 실존적입니다. 화려한 낮의 공통세계란 어쩌면 환상이 아닐까요? 개개인의 실존세계에 빗장을 지르고 나온 시장의 환상 말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각자가 어둠의 공간에서 빛을 찾아 궁리하고 모색하고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근거 또한 주관의 느낌과 경험과 생각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학기가 시작되어 아이들을 바라보며 저는 씨앗주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보세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생물이 사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널린 식물만 해도 얼마나 많은 종이 살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비록 매일 몇 종씩이 멸종할지라도 어디선가는 몇 종이 탄생하고 있을겁니다. 새로운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며 번성하는 것이 자연이니까요. 변화와 생성이야말로 자연의 속성이니까요. 사람이라고 왜 아니겠습니까?



저는 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지만 텃밭도담당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에게서 여러 가지 씨앗을 얻어 왔습니다. 예천을 떠난로 환경이 여의치 않아 몇 해 텃밭을 가꾸지 않다 보니 씨앗들이 생소해 보였습니다. 저부터 씨앗 앞에 무지함을 토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몇 가지는 알아보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라면 좀 더 밝겠지요. 하지만 농부도 단 몇 가지일 겁니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씨앗들이 있을 테니까요.


3월에 심는 감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자를 으레 한 종류 혹은 두 종류쯤으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원산지인 남미의 감자는 원래 수백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수천 년 동안 남미의 원주민들은 다양한 감자를 섞어 재배했다고 합니다. 단일 재배종에 의존할 경우 돌림병에 취약하기 때문이지요. 농사도 자연의 방법을 따를 때 지속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랜 문화는 자연의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문화를 도외시한 문명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다시 씨앗 주머니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교육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지의 교사입니다. 흔히 좋은 교사는 가르칠 목표가 명확하고 뚜렷한 성과를 위해 명확한 교안으로 학생을 이끌고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사의 참된 미덕은 아이의 실존을 생생히 느끼고 그 실존과 실존으로서 대화하는 교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실존은 살아 있는 미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실존의 영역은 어둠과 흡사합니다. 씨앗을 둘러싼 어둠과 마찬가지입니다. 씨앗 주머니에 든 씨앗들이 어둠 속에 보관되고, 땅 속에 놓여져 흙으로 덮입니다. 그리고 온기와 수분을 섭취합니다. 알이 부화하는 것이나 씨앗이 발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뿌리를 내리고 빛을 찾아 힘차게 솟구칩니다. 우리들의 실존 또한 그러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어둠의 교육학을 먼저 말하게 됩니다. 어둠의 교육학은 스스로 깨어나리라 믿고 기다리는 종교와 비슷합니다. 모든 종교는 혼자에 직면하기를 권합니다. 자신의 실존을 깊이 응시하고 실존의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음성과 깨달음을 생명으로 여깁니다. 선사가 선방에서 참선을 하는 것이나,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나, 수도자들이 단전호흡을 하고 주문 수련을 하는 것이나, 무당이 굿을 하며 악기와 춤에 몰두하는 것이나 원리 면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둠의 영성이라고 하든 참선이라고 하든 독공이라고 하

든 비슷한 과정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처한 이러한 내면의 어둠 속에서 발견하는 새벽 같은 깨달음의 빛을 생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디에나 가득하고 넘치지만 오직 하나인 생명은 바로 ‘나’ 자신의 실존 안에서 철저히 자각됩니다. 바로 이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어둠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씨앗에게 어둠이 필요하듯. 그것이 우리가 발견해야 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아닐까요?


물론 씨앗을 일깨우는 계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단단한 연밥은 실톱으로 일부러 약간의 상처를 내주기도 하지요. 어떤 것은 차가운 겨울을 나야 잘 발아하고, 어떤 것은 새나 동물에게 먹혀 위산을 통과해야 하기도 합니다. 움 안에서 따뜻하게 보호되어야 하는 것들도 있지요. 햇빛이, 햇볕이 언제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비와 강물이 언제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둠이 필요합니다. 어둠이 우리를 잠들게 하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서만 새벽은 눈뜹니다. 세상 모든 낮은 새벽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나요? 세상 모든 새벽은 어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나요?


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저 자신의 어둠에 직면하는 것은 아이들의 어둠과 마주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할까요? 아이들의 미래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하지만 살아보니 미래란 많은 부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오히려 현재의 충실이 미래를 낳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는 어둠에 가깝습니다. 어둠 안에서 벌이는 실존의 고투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미래가 아닐까요?


봄입니다. 남도의 텃밭에는 이미 장다리꽃이 피고 곳곳에 쑥들이 수북하게 올라왔습니다. 봄볕 봄바람 맞으며 연둣빛으로 푸들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지난 겨울 그들이 겪은 어둠의 시련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무슨 씨앗일까요? 궁금합니다. 저 자신이 모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미지의 실존이며 미지의 세계입니다. 각자의 고유한 실존만큼 무게를 지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도 결국 실존의 발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어둠에 깨어 감사합니다. 모두가 안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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