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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1. 2018

“ 내 한 몸 불살라서 궁을꽃을 피우나니 ”

입암 이도천 선도사 분신 제40주기를 앞두고

[개벽신문 제74호, 2018년 5월호] 동학의비결2-31

심국보 | 본지 편집위원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상이 4월 27일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도보 다리에서 대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본 우거진 숲 속 새는 모두 13 종류였다고 한다. 나는 열세 종의 새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열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으라’한 수운의 말씀이 퍼뜩 떠올랐다. 13이란 숫자에서 나는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다. 서양인들은 반대이겠지만. 모처럼 열린 남북정상회담이라 많은 국민들은 기대는 크다. 남과 북, 북과 미, 남-북-미-중-일-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관계로 회담의 장래는 낙관적이되 과정은 지난할 것이다. 


당장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무기판매로 이익을 얻고 있는 미국은 손해다. 무기를 두고 해월 선생은 ‘사람 죽이는 기계’라 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달린 ‘사람죽이는 기계’의 판매를 포기하기 쉽지 않다. 미국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기사건으로 죽어나는 사람이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도 훨씬 많음에도 무기생산업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미국의 정치인들은 일반인들의 무기소지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1

 같은 이유로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상황이 도래하는 최악(!)의 상황을 그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듯하다. 


한국은 연평균 4조원 안팎의 미국산 무기를 수입하는데, 한반도에 평화가 구축되면 미국의 한국에의 무기 판매

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실제 지난달 27일 남북정상회담 직후 미국 5대 방산업체의 주가는 1~3% 가량 하락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북미정상 회담을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면 미국의 속셈은 다른데 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5월 13일“북한이 비핵화에 나설 경우 미국 민간기업의 북한 투자를 허용하겠다”며 “미국 기업은 수천만 달러를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2

 

군수기업의 손해를 다른 기업의 이익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본다면 평화체제는 올 수도 있겠지만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만큼 고려해야 될 경우의 수는 많다.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기념탑 설명 / 1948년 4월 열린 남북연석회의를 기념하여 평양에 세워진 비. 천도교학생회, 북조선청우당 남조선청우당이새겨져 있다.



오익제와 이도천 

오익제(1929~ 2012) 전교령은 1997년 8월,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월북하여 국내 정치에 파장을 일으켰다. 천도교로서는 최덕신 전교령의 월북 이후 또다시 최고지도자가 월북함으로써 남한에서 천도교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만큼 천도교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그 여파로 천도교인이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의 극적인 만남과 공동선언이 이루어진 이후, 남북 교류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그해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상호방문 행사 때 북한 천도교의 대표이기도 했던 류미영 위원장이 북측 이산가족 상봉대표단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였으며, 천도교인들은 공항에서부터 시내에 이르는 길목에서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진행하였고, 김광욱 당시 교령과 류미영 위원장의 만남도 성사되면서 천도교에 대한 인식이 호전되기도 하였다. 류미영 위원장 개인의 기구한 이력이 언론에 보도되고 천도교가 국내 언론에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두 교령의 월북에 따른 천도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많이 희석되었다. 


2000년 10월에는 주선원 종무원장 대행 등 남측 천도교 대표들이 북측 평양 중앙교당을 방문하여 해방 후 최초의 합동 시일식을 봉행하였으며, 그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남북교류를 봉쇄하기 전까지는 남과 북의 천도교는 해마다 1회 이상의 합동시일식 또한 공동성명 발표 등의 공동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앞으로 천도교단의 남북교류는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의 판문문선언 이행 정도, 오는 6월 12일의 북미 정상회담의 진행 여부에 달려있지만, 천도교 나름의 교류협력의 원칙과 방향 설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해방 이후 천도교단의 남북교류사에서 커다란 사건이 많지만 두 교령의 월북보다는 1978년 8월 5일 임진각에서 춘천교구장인 이도천 선도사가 ‘평화통일’을 외치고 분신한 사건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천도교인들과 평양을 향해 통일행진을 하다가 당국에 의해 저지당하자 철조망을 움켜쥐고 통곡을 하다 통일기원 기도를 올린 후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당시 언론보도는 단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 5일 하오 1시 30분쯤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마정리 임진강변에서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도천씨(50)가 석유(5ℓ)를 온 몸에 끼얹고 분신 자살했다. 이 교구장은 천도교 중앙본부에 보내는 유서 1통과 자신의 사진 4장을 남겨 놓았다.”3



이 사건은 천도교를 넘어 우리나라 남북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유신정권의 방해공작으로 축소 보도되었고4 천도교단에서도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하지 못하고 있다. 천도교의 기관지인 『신인간』지에 그의 분신 10주기인 1988년, 20주기인 1998년에 이도천 선도사에 대한 추모기사가 실렸고, 이도천 선도사를 추모하며 동학민족통일회(동민회) 등에서 2006년 평화통일기행을 실시한 바는 있다. 


오익제 교령은 2008년 12월 1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 면담실에서 통일tv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월북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또 (월북의)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1978년 8월 4일로 기억이 됩니다.5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도천이라는 사람이 임진강가에서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평양을 향해서 통일행진을 하다가 임진강가에 이르러서 반통일 분자에 의해서 저지를 당하자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통일기원 기도를 올리고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했습니다. 그는 불에 휩싸이면서도 꼿꼿이 선 채로 통일을 염원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쓰러지면서 ‘통일! 통일!’ 하면서 외치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대서특필해야 할 언론은 무관심 했습니다. 1단 기사로 축소 보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노동운동을 하다가 영웅적으로 분신자살한 전태일에 대해서는 대서특필한 언론이 통일에 대한 몰지각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어떤 압력에 의해서 축소보도한 것이냐? 어떻든 이것은 언론의 무책임한 자세입니다. 따라서 저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6



이 인터뷰는 2008년 10월 월간 <신동아>에 의해 납치설이 제기된 오익제 전 교령을 남쪽 언론매체인 통일tv가 요청한 것으로, 월간 <신동아>가 제기한 북한 당국이 오익제 교령을 납치했다는 보도에 대한 반론의 일부였다. 인터뷰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란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이도천 선도사의 분신이 끼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우리 사회는 그를 잘 모르고 관련이 많은 천도교인들도 이도천 선도사의 분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마저도 꺼려하는 분위기를 개탄할 뿐이다. 



입암 이도천(立菴 李道天)은 누구인가? 

박인진도정과 조국광복회, 해방 이후의 남과 북의 천도교 청우당, 3.1재현운동과 영우회활동, 허경일도정과 남북연석회의(1948.4), 4·19혁명 이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에의 천도교인의 참여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남북 천도교인들의 교류 등 이도천 선도사 분신 외에도 남북관계 관련하여 천도교에서 새겨야 기억들은 숱하게 많다. 이 글에서는 올해가 이도천 선도사 분신 40주기인 만큼, 이도천 선도사에 대한 기억을 먼저 새겨본다. 


이도천 선도사 사진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임진강가에서 분신한 이도천 선도사에 대한 기억은 소중하다. 앞으로 남북의 정세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로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정세와 상관없이 동학하는 사람들은 이도천 선도사의 분신에 대한 기억을 지워서는 안될 일이다. 이도천 선도사의 간단한 이력을 살펴보자. 


●본명은 이도삼(李道三), 도호는 입암(立菴)

●1908년 2월 2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송호리 출생

●1927년 함흥농업학교 졸업 

●1929년 수원농업전문학교 졸업

●1929년 4월 5일 창도 70주년을 맞아 천도교 입교

●1938년부터는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천도교 활동에 진력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 함흥 선전부장에 선임

●1946년 천도교 함흥종리원장(교구장)

●1948년 청우당 남북연락책임자로 활약하던 중 내무서에 체포되어 감옥생활. 북한 내무서에 체포되었을 때 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여 이를 숨겨 놓았다가 저녁 기도식에 청수를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 때 10월 국군이 북진하자 미8군 정보과에 복무 11월 흥남철수와 동시에 월남, 부산에 거주

●1952년 9월 부산시 좌천동 전교실 창설

●1955년 10월 강원도 홍천군 동막리로 이주하여 정착. 마을 이장과 서면 한서 중학교에서 교편생활, 이 해 3년 전 반공포로로 석방된 둘째 아들 석찬군을 찾고 감격적인 상봉

●1968년 춘천으로 이주

●1976년 춘천교구장. 교구발전에 헌신.

●1978년 8월 5일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머리에는 삼층관을 쓰고 단정히 도복을 입은 채 통일을 염원하며 분신 순도.

●1988년 8월 5일, 천도교춘천교구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리 묘소에 순도비 제막. 비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천년을 하나같이 살아온 내 조국, 저 파란 하늘,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기름진 들판에 무르익은 오곡들, 산 좋고 물 맑은 화려한 이 강산이 어쩌다 두동강이 되어 정성·공경·믿음으로 얽히고 설킨 부모형제, 오가지 못하는 이 서러움. 한 많은 38선에 내 한 몸 불살라서 궁을꽃을 피우나니 겨레여, 한 덩어리 궁을로 모이소서” 



헤아릴수 없는 큰 한울도 조그만 마음보다 낮다

성품이 온화한 이도천 선도사는 해마다 105일 기도를 봉행하고 틈만 나면 교인 댁을 방문, 교화지도를 했다. 평상시에도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뜻있는 천도교인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궁을기를 앞세우고 부산에서 의주까지 휴전선을 넘어 행진했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하며 항상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도천 선도사에 대한 기억은 이런 정도가 다다. 


추가한다면 이돈화가 집필한 『당지黨志』가 1946년 11월 25일 함흥에 있는 대심인쇄소에서 간행되었는데, 발행소가 ‘천도교종학원출판부’로 되어 있지만, 일설에는 이도천 선도사의 출자에 의해 평양이 아닌 함흥에

서 출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7 

이돈화의 『당지』 의 한 구절을 살펴본다. 



“보국 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올 것인가?(輔國安民之策 計將安出乎) 그러면 수운 선생의 소신하는 보국안민의 계책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수운선생의 저서 중에서 그 큰 뜻을 추출하여 보면 수운 선생의 보국안민의 계책은 대체 삼대 요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신인간 창조, 둘째로 조선혼(魂)의 파지(把持), 셋째로 동귀일체운동이다. (…) 세째로 동귀일체운동은 현재 조선은 무엇보다도 민족통일을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일세기 전에 부르짖던 동귀일체사상이 다름 아니다. 


수운선생의 동귀일체사상은 조선민족은 조선혼인 한울님 사상으로 일이관지(一以貴之)하라는 사상이었다.(…) 수운선생의 한울님 사상은 인내천적 세계관이 낳은 신인합일사상인 점에서 이는 조선민족만을 통일할 사상이 아니요 세계 억조를 오심즉여심(吾心則汝心)의 지기일원(至氣一元)의 아래에 총친화 총단결할 세계 일가(一家)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정치적 현실에 활용하여 지상에 이상적 천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청우당의 사명이요 우리교의 사회개벽운동이었다.”

 


『당지』 는 야뢰 이돈화가 천도교의 정치사상을 해설한 책으로 천도교청우당의 정치교재였다. 이도천이 함흥에서 이 책을 출판했다는 것은 단순히 짐작만큼은 아닐 듯하다. 해방 무렵 함흥에서 정미소를 경영하여 책을 출판할 재력이 있었고 신심도 넘쳐났던 그였다. 그의 분신순도 40주년을 맞아 무엇을 해볼까를 생각해 본다. 『당지』를 깔끔하게 새롭게 박아내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판문점 부근에서 그의 분신순도를 기리는 의미 있는 일은 또 있을 것이다. 


이도천은 월남 후 남한을 떠돌며 평생을 지냈다. 강원도 산골에 정착한 이도천은 그 연륜과 풍상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영성은 소소하며 맑고 맑았다. 



<침묵의 새벽> 

한 마리의 두견새 우는 집을 위해 한울님은 수많은 기적의 우주를 만들었던가. 나는 듣는다. 먼동의 빛 속에 침묵의 나팔소리. 오 무궁한 성령이여 지금에야 육체가 된 시간이다. 빨리 선택하라 수많은 다른 불행한 불 속에 그대의 불멸의 보탑(寶塔)을 꽃피우기에 적당한 이 새벽을 /을미(1955) 7월 16일 용문사에서 



그가 남긴 짧은 글 하나를 새기면서 문득 의암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헤아릴수 없는 큰 한울도 조그만 마음보다 낮고 

홀연히 풍운이 일어나 만리를 뒤밟는다. 

無量大天寸心低 風雲忽然萬里蹄 



<주석>

1) 공화당 전국위원회 재무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도 ‘큰손’ 기부자로 알려진 부동산 사업가 앨 호프먼 주니어는 공격용 총기류 규제 법안을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들에게는 후원금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 국무부와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미국에서 총기 사건 및 사꼬로 사

망한 사람은 31만6545명으로 집계됐다. 반면 테러에 의한 사망자는 313명에 불과했다. 총기 규제의 당위성

은 충분하지만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를 이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회원이 420만 명인 NRA는 정

치권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는 것 외에도 전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총기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동아일보 2018.2.19)

2) 중앙일보 2018.5.14

3) 중앙일보 1978.8.7.일자. 이도천 선도사의 나이를 50세로 보도한 것은 잘못. 당시 이도천 선도사는 70세. 

4) 오마이뉴스(2009.9.1.) http://bit.ly/1K60uG ; 이 기사에서는 오익제 교령의 월북동기를 이렇게 보도했다. 

“1994년에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남쪽의 오익제 천도교 교령과 북한의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 위원

장이 남북 천도교인들이 판문점에서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으나 북한 핵문제를 핑계로 김영삼 정부가 반대하

면서 무산되었다. 행사가 무산되자 남한정부에 실망한 오익제 교령은 1997년 미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 후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기도 했

다.”

5) 8월 4일은 오익제교령의 잘못된 기억 

6) 통일뉴스(2012.12.23.)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2014

7) 김용천카페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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