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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8. 2018

‘허무’의 철학과 인문디자인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인문학이야기④

조 성 환 |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오늘날 ‘허무’라고 하면, ‘허무주의’(nihilism)나 ‘허무하다’는 말이 시사하듯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이 수용되기 이전인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인들에게 ‘허’와 ‘무’는 반드시 배척되어야 할 개념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터전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한 사상가들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노장(老莊)으로 대표되는 도가학파로, 도가사상가들은 ‘허(虛)’와 ‘무(無)’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실(實)’과 ‘유(有)’가 가능하고, 그런 점에서 가능한 한 ‘허무’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12세기에 성립한 주자학에서는 도교나 불교를 “허무적멸(虛無寂滅)”을 주장한다고 비판하였는데, 그런 점에서는 서양의 ‘nihilism’이 ‘허무주의’로 번역되기 이전에 이미 동아시아에서 허무주의 비판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주자학의 비판적 입장 때문에 조선시대에 노장사상은 공식적으로는 주장되지 못했는데(물론 예외적으로 세종이 신하들에게 <장자>를 인쇄해서 나누어 준 사례도 있지만), 아마도 오늘날 우리에게 ‘허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전통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근대화 역사도 허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근대화란 무엇이든 채우고 만드는 ‘실(實)’과 ‘유(有)’의 역사로, 가시적이고 양화 가능한 ‘실’과 ‘유’가 있어야 성장과 발전을 하고 있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심지어는 종교에서조차도 “네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라”고 하는 실과 유가 강조되곤 하였다). 반면에 허와 무는 퇴보하고 무기력한 가치로 배척되었다. 그런 점에서 전통 유학과 서구 근대는, 적어도 노장이나 불교와 비교해 보면, ‘허’와 ‘무’보다는 ‘실’과 ‘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무위자연

동아시아사상사에서 ‘허’와 ‘무’ 개념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룬 텍스트는 아마도 노자가 썼다고 알려져 있는><도덕경>이 최초일 것이다.



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 ‘없음’(無)으로 인해 수레의 쓰임(用)이 있다.

진흙을 개어서 그릇을 만드니, 그 ‘없음’(無)으로 인해 그릇의 쓰임(用)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니, 그 ‘없음’(無)으로 인해 방의 쓰임(用)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롭게 되는 것은 ‘없음’(無)이 쓰임(用)이 되기 때문이다.


(三十輻共一穀, 當其無有車之用; 埏稙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故有

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도덕경> 제11장



여기에서 ‘무’(없음)는 ‘허’(텅빔)의 다른 말로, 수레바퀴(車)나 그릇(器) 또는 집(室)과 같은 ‘유’(有)들의 “텅 빈 공간(虛)”을 가리킨다. 노자가 보기에 인간에게 도구(有)가 유용할(用) 수 있는 이유는 도구(有)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무’(無)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청동기문명에서 철기문명으로 진입하는 시기로, 지금으로 말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획기적인 도구가 발명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노자는 이 도구들을 도구이게 하는 것은 사실은 전혀 도구적이지 않은 것, 즉 ‘비어 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구’가 ‘문명’(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비어 있음’은 ‘자연’(본래 그런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자의 통찰은 인간의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연이고, 자연에 반하면 제아무리 고도의 문명이라고 할지라도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자는 당시에 인간의 문명이 자연의 영역으로 급속도로 침투되기 시작하는 시대상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연의 영역을 얼마나 확보한 상태에서 문명을 유지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삶의 양식을 ‘무위’(無爲)라고 하였다. ‘무위’란 ‘본래 그런 상태’(自然)에 따르는 삶의 말한다. 이 무위자연의 삶의 양식에서는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자연성이 온전히 발휘되어, 생명력이 충만하고 주체성이 발휘되며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연을 인위(人爲)로 채우려 든다. 가령 인간이 자기 몸에 ‘본래’ 필요한 것 이상을 과도하게 먹거나 마시면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자기 능력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욕망하면 반드시 과부하가 걸리게 마련이다. 노자가 보기에 이러한 과도한 욕망을 조장하는 것이 유위적(有爲的) 또는 반자연적 문명이고,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자연’ 상태를 파괴한다. 그래서 마음의 수양이 요구되는데, 노자는 그것을 ‘허심’(虛其心)이라고 하였다. ‘허심’(마음을 비우다)은 과도한 욕망과 의지를 비우고 생명이 충만한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Photo courtesy Tadao Ando Architect & AssociatesProposal for Ground Zero, World Trade

Center site (2002)3



장자의 허심응물

노자의 ‘허심’을 외물과의 관계에 관한 논의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이다. 장자는 허심의 상태에서 외물(외부 세계)에 반응할 때 가장 적절하고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상태는 거울과 같다.

싫다고 미리 보내지도 않고 좋다고 미리 맞이하지도 않는다.

반응만 할 뿐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외물을 이길 수 있지만 (자신은) 손상되지 않는다.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迎,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

-<장자>「응제왕」



거울은 외물이 오면 “있는 그대로”(自然) 비출 뿐 자기의 취향에 따라 미리 거부하거나(將) 먼저 다가가지(迎) 않는다. 그리고 외물이 사라지면 다시 처음의 텅빈(虛無)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외물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본래 상태를 유지한 채 외물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장자가 생각하는 성인의 경지이다.


이것을 정식화하면 “허심-응물”로 요약할 수 있다. 장자의 “허심응물론”은 이후에 중국의 신유학과 조선의 주자학에도 계승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가령 율곡도 “허심응물”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히 동아시아사 상사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울러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중심으로 전개된 서양철학, 특히 근대철학과도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서양철학이 인식론이나 존재론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동아시아의 철학은 응물론 또는 그것을 위한 수양론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이 욕망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연 상태에 있을 때에는 마치 텅 빈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明鏡止水), 외물을 있는 그대로(自然)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인식이 동반되어야 정확한 사태 판단이 가능하며, 이러한 인식과 판단이 가능할 때 비로소 외물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성인의 경지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장자의 시대는 제자백가가 만개하여 사상의 종합이 진행되고 있던 시대였다. 유학 진영에서는 순자가 그 일을 하였는데, 도가(道家)쪽에서는 장자가 그 역할을 맡았다. 다만 순자가 ‘유학’을 중심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요소를 수용했다고 한다면, 장자는 특정한 ‘학’을 중심에 두지 않는 ‘학’을 제창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이 장자의 ‘무(無)’의 사상이다.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으며 성인은 이름이 없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 소요유)



여기에서 ‘지인’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뒤에 나오는 ‘성인’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없다”는 말은, Brook Ziporyn의 해석에 의하면, “고정된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뜻이다. 즉 “無常己(무상기)”의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부정되는 것은 ‘기’(己) 그 자체가 아니라 ‘상(常)’, 즉 ‘고정성’(fixidity)이다. 즉 장자는 고정된(常)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지, 불교의 공(空)이나 무아(無我)처럼 ‘자기’ 그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를 평가하면서 “何常師之有!”(어찌 ‘상사’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논어> 자장). 여기에서 ‘상사’(常師)란 ‘고정된 스승’ 또는 ‘일정한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정되는 것은 ‘스승’(師) 그 자체가 아니라 ‘고정된(常) 스승(師)’이다. 즉 공자는 어느 한 스승만 정해서(常) 배운 것이 아니라 - 마치 대학원의 지도교수처럼 -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배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모두가 스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는 공자의 말도 이러한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장자가 말하는 성인은 아이덴티티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의 스승을 고집하지 않는 공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자에게서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던 반면에, 장자가 말하는 성인은 그런 아이덴티티 자체를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공자는 스승은 하나로 고집하지 않았지만, 아이덴티티는 어디까지나 유학자였다. 바로 이 점이 유학(유가)과 장자(도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여기에서 장자가 말하는 ‘무기(無己)’는 ‘허심(虛心)’의 다른 말로 볼 수 있다. 장자가 “마음을 비우라”고 할 때의 ‘마음’은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고집하는 마음, 즉 ‘성심(成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성심’은 “하나의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束於敎. <장자> 추수)”로, 공자 식으로 말하면 한 명의 ‘큰 스승’을 고집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의 가치체계에 헌신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장자의 이러한 성인관의 장점은 변화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여 무한한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가를 논하면서 “與時遷移(여시천이), 應物變化(응물변화)”, 즉 “시대와 함께 변천하고 외물에 응해서 변화한다”고 평가하였다. 허심(虛心)과 무기(無己)의 리더야말로 시대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고 다양한 외물과 장애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7세기에 장자의 주석가이자 도교사상가인 성현영은 이것을 허‘ 통虛通’이라고 하였다. <장자소>).





풍류의 포함삼교

장자의 이러한 허통사상은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화랑정신으로 알려져 있는 ‘풍류’이다. 9세기 신라말기의 사상가 최치원은 신라의 문화를 ‘풍류’라고 소개하면서 풍류는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包含三敎)고 설명하였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설파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나와 있는데 핵심은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다는 것이다.

가령 들어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의 일에 처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종지이며,

어떤 악업도 짓지 않고, 모든 선행을 봉행하는 것은 인도 태자(=붓다)의 교화이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

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삼국사기> 제4권 '진흥왕'



이에 의하면 풍류는 중국의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를 말 그대로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의도는 풍류가 삼교의 ‘종합’이나 ‘근원’임을 말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장자의 허무의 철학을 참고하여 해석해 보면, 화랑에게는 유교나 불교 또는 도교와 같은 “고정된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일종의 “화랑무기(花郞無己)”인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를 하나도 배제함이 없이 모두 수용하겠다는 문화수용의 개방적 태도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당시 당나라 문화의 국제성이나 다양성과도 상통한다. 다만 중국에서는 유불도(儒彿道) 삼교 이외에 제 4의 ‘도’를 중국의 ‘도’로서 따로 설정하지 않았던 반면에, 최치원은 그것을 ‘풍류’로 상정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것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 산물일 것이다. 즉 중국과는 다른(“異乎中國” <훈민정음 해례본>) 한국의 정신문화를 자기 나름대로 개념화해 보려고 한 것이다.


최치원이 제시한 이러한 ‘포함’ 정신은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졌는데, 그것이 이른바 ‘회통’ 개념이다. 가령 조선 후기의 다산 정약용은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융합하여 “영성적 유교” 또는 “수양적 그리스도교”를 탄생시켰고, 일제강점기의 이능화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근원에서는 하나로 통한다고 하는 “백교회통(百敎會通)”을 말하였다(1912년). 이어서 나온 원불교에서는 종교는 가급적 많이 가질수록 좋다고 하는 “포함적 다교주의(多敎主義)”를 표방하기도 하였다(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과 그의 제자 조옥정의 대화에 나타난 태도). 이것은 장자적으로 말하면 허무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종교라는 외물에 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최치원 식으로 말하면 풍류의 에토스를 가지고 모든 종교를 포‘ 함’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허무의 디자인

한편 최근 들어 동아시아의 허무사상을 디자인과 접목시킨 기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의 무인양품(無印良品)이다. 무인양품은 직역하면 “인(印)이 없는(無) 좋은(良) 제품(品)”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인(印)이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특징이 없다” 또는 “이렇다 할 브랜드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영어로 “No Brand Quality Good”으로 번역한다. 실제로 무인양품의 상품은 심플하고 소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무인양품의 브랜드명이 시사하는 것은 이 심플하고 소박함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변화와 다양성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할 특징이 없기 때문에 모든 특징과 어우러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디자인을 최소화는 ‘무위의 디자인’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디자인을 줄이겠다거나 아예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장적으로 말하면 ‘무’를 디자인하겠다는 뜻이다. 즉 문명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채움이나 욕망이 아닌 비움이나 거울을 디자인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무인양품의 디자인은, 마치 노자가 말하는 “거대한 소리는 소리가 없고 거대한 사각형은 각이 없다”는 이치처럼, 고도의 디자인이 요구된다. ‘실’과 ‘유’의 시대에 ‘허’와 ‘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철학과 수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무인양품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허무사상을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예로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安藤忠雄, 1941~)를 들 수 있다. 그는 9·11 테러로 폐허가 된 ‘그라운드 제로’에 지을 건축물을 공모하는 공모전에서 “아무 것도 짓지 말 것”을 제안하였다. 제2의 세계무역센터는 또 다른 테러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짓지 않을 용기”라고 말하였다(“I think that what we need now is the courage to construct nothing more..1)


그 대신에 희생자들의 영혼을 쉬게 하는 나지막한 무덤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a tomb for the repose of souls).2 이것은 노장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허무(虛無)를 짓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눈에 보이는 실유(實有)의 건축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허무(虛無)의 건축, 무위(無爲)의 건축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텅 빈 공간 위에서 죽은 자와 산 자들이 함께 휴식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허무의 공공성

허무가 지니는 공공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일견 소극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깊게 생각해보면 가장 적극적이고 궁극적인 처방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우리는 “본래 상태”라고 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유(實有)와 유위(有爲)의 바탕이 되는 허무(虛無)와 무위(無爲)의 상태이다.


한국사회가 자살률이 증가하고 출산율이 감소되는 것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유가 과도하고 허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위의 삶의 양식인 생존욕구와 출산욕구가 저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근대화가 비우고 성찰하는 인문학적 반성 없이 경제적인 성장과 효율 위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결과 유위가 과도해지고 무위가 줄어들자 인간의 자연 상태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노장의 허무철학이 주는 교훈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본래적 자연을 망각할 때 가장 근원적인 것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경제적 실용을 추구하는 실학(實學)에만 매진해 온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사회가 보다 풍요롭고 관용적이게 되려면 노장이 제시하는 허학(虛學)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았을까?


* 이 글은『월간 공공정책』 150호(2018년 4월)에 실린 조성환,「허무와 공공성」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주석

1‥Gerry Coulter, “A Passage through Modernism: The Art of Architecture Reimagined by Tadao Ando,” 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 4-7, May 2014, p.14에서 재인용.

2https://www.hamiltonsgallery.com/exhibitions/24_tadao-ando_chinmoku/installation_shots

3https://arcspace.com/exhibition/tadao-ando-regeneration-surroundings-and-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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