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09.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22)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3절 인내천사상의 요지[要領]

  

리는 왜 이상에 말한 여러 가지 존의 주의(主義)를 부정하는가? 그것은 물론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만족치 않는가? 좀 더 큰 요구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대단히[切] 불만을 느끼는 것은 이면에 강렬한 요구가 발효(醱酵)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기성의-편역자 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큰 것을 긍정하는 까닭이다. 그 부정은 긍정을 위한 부정으로 그 부정 속에는 새로운 광명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인내천주의 생활이 그것이다.

  

인내천 생활이라는 것은 이상에 말한 것과 같이 인간격 본위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니 인간격 본위의 생활은 우주와 인간, 세계와 인간 내적으로 결합하는 생활을 말한다.* 인내천사상은 자연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 지력주의[주지주의?] 등을 인간격 본위에 귀납하게 하여 그를 융화하고 그를 부분적으로 작용케 하는 생활이다. 즉 인간격이 주체가 되고 인간격 이외의 모든 격은 인간격의 작용에 의하여 인간격 스스로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가감승제] 생활이다. 그리하여 인간격으로서 세계를 건설하고 우주 생활을 향상케 하려는 생활이다.


인간은 자연주의자의 말과 같이 자연의 노예도 아니며, 지력주의의 주장과 같이 사고의 노예도 아니다. 인간생활은 인간 그 자신의 것이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나 때문에 사는 것이다. 결코 자연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며 사고를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나 때문에 산다는 것이 다만 나 한 개체의 존재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인간격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나는 나 개체 속에서 우주생활, 즉 인내천의 생활을 표현하게 되어야 비로소 인간격 생활이 이루지는 것이다.


대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능동적 주관이라 이름한다. 인간성은 결코 돌거울[石鏡]과 같이 무능한 수동적 물건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비추어내는[映出]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은 능동적으로 바깓 세계[外界]의 사물을 분별하여 어떤 물건은 배척하고 어떤 물건은 받아들이[入]는 작용을 는 것이다. 인간성은 다물다(多物多事) 중에서 자기에게 적응한 것만을 선택하여 그 부분만을 마음의 창고에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활동은 곧 선택이다. 선택작용에 의하여 주위 환경으로부터 인간성 자체에 적응한 사물만을 추출(抽出)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된 사물이 곧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인데 의식은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에서 생긴 것이다. 즉 의식은 인간성이 외계로부터 선택하여 맞아들인 사물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의식은 결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의식의 내용은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이 외계로부터 선택한 사물의 집합에 불과한 것인 고로 인식보다 먼저 앞서는 것은 선택관념(選擇觀念)이다. 그러면 선택은 무엇을 표준하고 일어나는 것인가? 그는 능동적 주관성의 자기에 대한 이해관계(利害關係)일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반대론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이유야 여하튼지 금도 우리가 목격하는 바 객관세계가 현재 눈 앞에 있지 않느냐?  우리의 인식 또는 진리론이 이 현실세계에 응하여 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것은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을 부인하는 재료 되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서 말[前述]함과 같이 이 현실 객관세계라는 것은 곧 우리의 인식 위에 떠오른 세계일 뿐이므로 우리의 인식을 떠나서는 이러한 객관세계가 실재할 까닭이 없다. 필경 우리의 인식은 객관세계의 사진이 아니요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이 자기의 이해관계를 선택하여 그것을  더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주관적 노력으로 가공한 것이니 즉 우리 눈앞[眼前]에 있는 객관세계는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생활의 필요에 몰 우리가 주관적으로 서서히 연구하고 만들어낸[出]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선조[조선] 이래 끊임없이 이 객관세계, 즉 객관적 실재를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의 요구에 응하도록 끊임없이[絶] 개조하여 왔으며 지금도 또한 개조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이 세계가 인간성의 능동적 주관생활의 요구에 응하여 개조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이른바 진리라 하는 진리에 대해서도, 또한 이러한 이법으로 논하게 된다. 무엇이냐 하면 이미 주어진 세계로서 만족치 못하는 우리 이미 주어진 진리로서 만족할 리가 없다. 주어진 세계를 가지지 못하는 우리 어찌하여 주어진 진리를 가지게 되겠느냐.


그러면 진리란 것은 반드시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보통으로 흔히 '(善)'이라든지 '(美)'라든지는 가치라는 이름을 붙여 말하나 진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가령 어떤 물건이 아름답다, 어떤 행위가 하다 할 때에는 그 물건 또는 그 행위는 우리의 요구를 만족케 하는 것, 즉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판단이 '참[眞]'이라 하는 때는 이와 달리 그 판단이 정말로 사실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의 요구와 좋고 나쁨[好惡]에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편역자 주 1] 이것을 '동귀일체'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 다시 읽는 신인철학 (21회) https://brunch.co.kr/@sichunju/3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