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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9. 2016

동학, 봄 꿈(3)

-수운이 맞이한 다섯 번의 봄 이야기

3. 그리고 또 다시, 봄(壬戌, 1862), 비껴서서 틈을 만드는…


동학을 창도(1860.4.5-음)한 후 세 번째의 봄(1862)을 수운은 전라남도 남원 외곽에 있는 교룡산성(교 안의 산중 암자 은적암에서 맞이하였다. 긴긴 겨울 동안 <동학론(東學論=論學文)>을 비롯한 동학의 경전을 쓰고, 달밤에 교룡산 꼭대기에 올라 “무수장삼 떨쳐입고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 가며 칼춤을 췄다. 


비껴서는 것은 ‘비켜서는’ 것이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 서서 ‘눈에는 눈’으로 대적하는 것도 아니다. 은적암으로 오기 전에 수운 선생은 무리를 모아 사도(邪道)를 한다는 혐의를 받기도 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싫어하는’ 인심풍속 때문에 비방의 한가운데에 놓이기도 하였다. 어쩔 것인가? 세상 형편이 그러할 때, 슬쩍 비껴선 걸음이 바로 은적암행이다. 


비껴서기. 그것은 수운 자신이 이곳 은적암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학이 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의 교범이기도 하다. 무릇 동학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비껴선 사람들이다. 비껴서서 틈을 보며, 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새싹이 언 땅에 틈을 만들며 돋아나는 것처럼, 이 풍진 세상에 봄을 만드는 싹수 푸른 사람이 바로 동학하는 사람들이다. 비껴선 자리에서 생명이 돋아난다. 아니, 비껴선 자세가 바로 생명의 본 모습이다. 


그 비껴서서 부르는 칼노래에 화답하여, 아니, 우주를 넘나드는 그 춤사위 끝에서 봄기운이 풀어져 나와, 그렇게 또 한 번 맞이한 봄이 또 수운 선생의 마음에 좋았나 보다. 수운 선생은 또 봄을 노래한다. 


바람 지나고 비 지난 가지에 바람 비 서리 눈이 오는구나. 

바람 비 서리 눈 지나간 뒤 한 나무에 꽃이 피면 온 세상이 봄이로다

(風過雨過枝 風雨霜雪來 風雨霜雪過去後 一樹花發萬世春, 偶吟).


그러나 이 노래는 또, 지난 한 해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 세상을 그리워하는 동학쟁이들이 앞으로 맞이할 풍우상설(風雨霜雪)의 시절을 예감하는 것이니, 봄이라고 온통 봄에 취하기만 할 것도 아니요, 겨울이라고 끝내 새봄을 의심하며 낙담할 일도 아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이 이러해도, 어제는 그렇지 않았음을 생각하라(不知心之得失 在今思而昨非, 後八節).” 하신 수운 선생의 말뜻이기도 하다. 


수운은 은적암에서 한겨울을 나고 새로 맞이한, 세 번째의 봄을 타고 경주로 돌아와 다시 개벽의 꿈을 조직화해 나갔다. 바람에 몰린 구름(風雲)처럼 사람들이 또다시 용담의 사립문을 열고 동학으로 몰려들었다. 


도의 기운이 높아지자, 필연적으로 마(魔)가 끼어 들었다. 수운 선생은 경주 관아에 붙잡혀 갔다. 그 일은 일시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어 석방을 요구하자, 겁먹은 경주영장은 수운 선생을 풀어 주고, 선생의 위력으로 영장(營長)의 부인의 병마저 치유하게 되자, 용담으로, 용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수운 선생은 그 승승장구 속에서 오히려, 자신과 도의 장래를 예감하였다. 

4. 네 번째 봄, 계해년(癸亥, 1863)에 춘삼월을 노래하다 


준비 끝에 다가온 그해 섣달그믐, 그 한겨울에 동학의 접(接)이 조직되었다. 16명의 접주(接主)가 임명되었다. 동학의 또 다른 새 봄이 이렇게 잉태되었다. 이로써 동학은 한 사람이 만인(萬人)에게 펼치는 담론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통해 실현되는 도학(道學)이 되었다. 


제서(題書, 아래 참조)가 나온 직후 동학의 장래를 기약하는 조직화(接)가 이루어졌다. 가르침을 담은 여러 경전들에 이어 두 번째 도구(道具)이다. 접은 훗날 포(包)로 확장되고, 외연이 넓어지나 내포(內包)도 세분화하여 육임제를 비롯한 세포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동학은 생장하여 봄 나무에서 여름 나무로 자라 나아갔다. 그 ‘사이’에 답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맞이한 동학 창도 후 네 번째 봄날에 수운은 다시 봄노래를 부른다. 


도를 묻는 오늘에 무엇을 알 것인가. 

뜻이 신원 계해년에 있더라. 

공 이룬 얼마 만에 또 때를 만드나니, 

늦는다고 한하지 말라, 그렇게 되는 것을. 

때는 그 때가 있으니 한한들 무엇하리,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바람 기다리라.


무슨 뜻인가? 이 노래는 이렇게 여운을 남긴다. 


지난해 서북에서 영우(靈友)가 찾더니, 

뒤날에야 알았노라 우리 집 이날 기약을. 

봄 오는 소식을 응당히 알 수 있나니 

‘지상신선’의 소식이 가까워 오네. 

이날 이때 영우들이 모였으니 

대도 그 가운데 마음은 알지 못하더라.


네 번째 만의 봄에 동학의 봄노래는 절정으로 나아간다. 봄소식은 ‘지상신선’의 소식이다. 지상신선(地上神仙)은 동학의 도를 이룬 도통군자이며, 그 도통군자가 사는 봄세상, 지상천국이기도 하다. 


입도(入道)한 세상 사람 그날부터 군자(君子)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교훈가).


지상천국은 봄처럼, 스스로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살림의 세상이다. 

살림의 세상을 수운 선생은 ‘춘삼월’이라고도 표현했다. 


거룩한 내 집 부녀 근심 말고 안심하소. 

이 가사 외워 내서 춘삼월(春三月)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보세(안심가).


작심으로 불변하면 내성군자 아닐런가. 

귀귀자자(句句字字) 살펴내어 정심수도 하여 두면 

춘삼월 호시절에 또 다시 만나볼까(도수사). 


귀귀자자 살펴내어 역력히 외워 내서 

춘삼월 호시절에 놀고 보고 먹고 보세(권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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