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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08. 2018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11)

[개벽신문 제75호, 2018년 6월호] 지상강좌

조 성 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지난호에 이어서)



僉座下 輪照

卽因 分付內, 各接諸員中, 望碩之士, 獻誠告天後, 擇出幾十百人, 列錄居址姓名, 而或有誠德, 或有信義, 或有文算, 或有知事之意, 各各懸註於姓名下以來, 月初五日內, 秘密修正以來之意, 如是截嚴.

모든 분들에게 돌려 보십시오

오늘 분부하신 내용에 “각 접의 사람들 중에서 명망이 있고 덕이 큰 선비가 정성을 바쳐 하늘에 고한 뒤에, 몇 십 명을 선별하여 거주지와 성명을 나열해서 기록할 것이며, 혹 성덕(誠德)이 있거나 혹 신의(信義)가 있거나 혹 글을 알고 셈을 하거나 혹 사태를 안다는 뜻을, 각각의 성명 아래에 주를 달아서, 다음 달 초 5일내로 비밀리에 작성하여 오도록 하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이 준엄하였습니다.


박맹수 : “망석지사”(望碩之士)는 신망과 덕망과 학식이 있는 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로 하여금 먼저 고천(告天), 즉 천제를 지내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성덕(誠德), 신의(信義), 문산(文算), 지사(知事)의 능력이 있는 이들의 명단을 적어서 보내는데, 왜 이런 도인들의 명단을 보내게 하냐면 교조신원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통문이 쓰여진 것이 1893년 9월인데, 다음 달인 10월부터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동학 지도부 내에서 합법적인 동학 공인 청원운동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望須僉員, 極敬極誠, 至公無私, 一一擇出, 限內其於送來鄙邊, 無或葛藤煩擾, 

而各邑吏役中 道人, 雖不入於擇望之中, 別修姓名, 一時持來, 千萬切仰.

壬辰八月 二十九日 接下 南啓天

바라건대 모든 분께서는 공경과 정성을 극진히 하여 지공무사하게 일일이 선별해서 기한 내에 기어코 우리 쪽으로 보내주셔서, 혹시라도 갈등을 일으키거나 번거롭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각 읍의 아전 일을 하는 도인들은 선별 중에 들어가지 않아도 별도로 성명을 작성하여 일시에 가져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임진년 8월 29일 접하(接下) 남계천(南啓天)


박맹수 : 제가 지난 30여 년 동안 전국을 답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특히 전라도의 경우에는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의 각 군현을 휩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은 아전, 즉 향리들의 동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답사하면서 향토사 연구자나 지역 원로들로부터 각 군현의 중간층들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향리들의 공이 대단히 컸다는 것입니다.

수운 선생의 22명 제자들 중에도 퇴리(退吏), 즉 퇴직한 향리가 여러 명 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 문산(文算)과 지사(知事)의 능력을 갖춘 분들입니다. 심지어는 일부 양반들도 동학에 가담했습니다. 그렇다면 향리나 양반들이 동학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향리들은 서민보다는 상위 계층에 속하지만 양반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양반들 내부에서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 1870년대에 경상도 영해 등지에서 일어난 ‘향전’(鄕戰)이라는, 구양반과 신양반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것을 보면, 향리나 양반들이 동학에 들어온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평등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에서 자기들의 사회적 또는 신분적 처지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직전인 1991년과 1992년에 여러 차례 전라북도 고부를 정밀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방, 형방, 예방 세 향리를 ‘삼공형(三公兄)’이라고 하는데, 당시 고부의 삼공형은 모두 고부 은씨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씨들이 초기에 모두 전봉준에 협력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고부에 지금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답사 때 고부 은씨 후손 댁에서 1870년대 고부읍 지도를 발견하여 당시 전북일보에 특종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을 양반과 민중,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라고 하는 계급적 시각에서만 보아 왔는데,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현실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다중적이었습니다.

참고로 동학농민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동학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시기는 ‘동학창도기’(1860~1864), 둘째 시기는 ‘지하포교기’(1864~1891), 셋째 시기는 ‘교조신원운동기’(1892~1893), 넷째 시기가 바로 ‘동학농민혁명기’(1894~1895)입니다. 

첫 시기는 수운의 득도에서 처형까지에 해당되고, 둘째 시기는 수운이 처형당하면서 동학이 불법화된 시기이며, 세 번째 시기는 동학공인운동을 합법적으로 벌이는 시기입니다. 이 운동의 특징은 『경국대전』「형전」의 ‘신소(申訴)제도’, 즉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관청에 호소할 수 있는 제도”에 근거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이 운동을 장장 2년에 걸쳐 전개합니다. 1892년 10월에 충청도 공주에서 시작하여, 11월에 전라도 삼례, 이듬해인 1893년 2월에 서울 광화문에 갔다가, 3월에는 충청도 보은, 그리고 전라도 금구와 원평으로 이어졌습니다.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인 공주취회는 3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동학교도들이 어느 날 아침에 천여 명이 모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삼례취회는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삼례취회 때부터 일본 언론에도 보도되기 시작합니다. 최초의 보도는 《도쿄아사히신문》입니다. 1893년 1월 신문에 나옵니다. 사실 혁명이라는 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2017년 말에 시작된 촛

불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뿌리는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그 뒤로 “이게 나라냐?”는 인식이 퍼지며,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그것이 국정농단 사건과 맞물려서 증폭되고 폭발한 것입니다. 동학 역시 2년간에 걸친 합법적 청원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읽을 「입의통문」(立義通文)이 이 합법운동의 시작 단계에 나온 문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입의통문」을 계기로 교조신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것은 동학혁명을 향한 일종의 전초전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성환 : 이 통문이 남계천이 쓴 글이라고 한다면, 남계천이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관여를 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박맹수 : 예. 그런데 이 해(계사년, 1893년) 겨울에 돌아가십니다.

조성환 : 그런데 교조신원운동을 하는데 아전과 같은 이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맹수 : 당연히 필요합니다. 가령 다음에 읽을 「입의통문」이나 「의송단자」와 같이 격식에 맞는 문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는 긴급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모든 판세를 파악할 수 있는 리더입니다. 이들이 ‘지사지사’(知事之士)입니다.


立義通文 입의통문

右敬通事. 夫大道有三. 儒道始自五帝三王, 至于孔子, 人倫明於上, 敎化行於下; 佛

氏始自漢明帝時, 通於中國, 以大慈大悲之德, 濟衆生於苦海; 仙家始自皇帝時, 以

導引修煉之法, 免生民於夭札矣.

다음은 삼가 통지하는 일입니다. 무릇 대도(大道)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도(儒道)는 오제(五帝) 삼왕(三王)에서 시작하여 공자에 이르러 위로는 인륜이 밝혀지고 아래로는 교화가 행해졌습니다. 불교는 한나라 명제(明帝) 때 중국에 통용되어 대자대비의 덕으로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구제하였습니다. 선가(仙家)는 황제(皇帝)때 시작되어, 도인수련법으로 생민(生民)들을 요절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박맹수 : 이 통문은 해월 선생이 교조신원운동을 공식적으로 전개하면서 동참할 것을 전국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촉구하는 공문입니다.


至我東方數千載之後, 天下文明之運, 盡回我國, 聖道大明於世. 世降俗末, 大道泯滅, 何幸天運循環, 無往不復. 我先生降于東邦, 受道于天, 統合三道, 磨而琢之, 修而煉之, 傳以心法, 將欲布德天下矣.

우리 동방에 있어서는 수 천 년 뒤에 이르러 천하 문명의 운수가 모두 우리나라에 돌아오고, 성도(聖道)가 세상에 크게 밝아졌습니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풍속이 나빠지고 대도(大道)가 없어져 갈 때에, 다행히 천운이 순환하여 다시 회복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동방에 태어나서 도를 하늘에서 받아 삼도(三道)를 통합하여 연마하고 수련하여, 심법(心法)을 전하였으니 장차 천하에 덕을 펴고자 하셨습니다.


김봉곤 : “운수가 우리나라에 돌아왔다”는 생각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신 한학자 선생님도 명나라의 운세가 끝나고 그 운이 조선으로 왔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박맹수 : 여기에 ‘아국(我國)’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체제 속에서의 ‘국’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세계체제 속에서의 ‘국’으로 전환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조경달 선생은 동학에서 비로소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원시적 형태가 보인다고 한 것 같습니다.


不幸, 甲子春, 橫被邪道之誣禍, 命耶, 天耶, 時耶, 運耶! 嗚呼, 哀哉! 念痛奈何, 罔

極奈何! 且夫壬申之禍亂, 乙酉之營厄, 己丑之冤枉以外, 年來指目固何如, 而寃死

者, 幾人乎! 憤恨無比, 感歎何極!

불행히도 갑자년(1864) 봄에 사도(邪道)라는 무고의 화를 당하였으니 천명입니까, 시운입니까! 

아, 슬픕니다! 이 분통함을 어찌할 것이며, 망극함을 어찌할 것입니까! 

또한 저 임신년(1872)에 당한 화란(禍亂)과 을유년(1885)에 있었던 영액(營厄), 기축년(1889)에 있었던 원통한 일, 그 밖에도 요사이 몇 년 동안 지목됨이 실로 어떠하였으며, 원통하게 죽은 사람이 몇 사람이었습니까! 분통함이 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한들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박맹수 : 여기에 동학의 세 차례 수난이 나오는데, 모두 1864년 갑자년에 수운 선생이 처형당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첫 번째는 1872년 임신년에 있었던 “임신의 화란”으로, 1871년에 이필제가 일으킨 영해교조신원운동의 여파로 겪게 되는 수난입니다. 

두 번째는 1885년 을유년에 겪었던 “을유의 영액”으로, 충청도 단양 일대에 동학이 보급된 것을 안 단양군수 최희진, 충청감사 심상훈 등이 탄압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월 선생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강시원(姜時元) 차도주(次道主)가 체포되고 해월 선생은 단양에서 보은 장내리로 피신하게 됩니다. 

마지막은 1889년 기축년의 “기축의 원앙”으로 강원도 일대에 행해졌던 대대적인 탄압입니다. 이때 서장옥이 체포되고 강원도 동학도인의 상당수가 희생당합니다.

그러다가 1890년대에 들어오면 대응 방식에 변화가 생깁니다. 도망과 피신의 방식에서 정식 항의와 청원의 형태로 전환하게 됩니다.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달라고 정면으로 관청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어찌되었건 동학은 1864년 수운 선생의 순교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탄압과 수난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大凡君師父之義, 卽吾明倫之大經也. 自古及今, 忠君忠父者之竭力盡命, 不爲不多, 而師弟之義, 亦是一般也. 今吾先生主遭禍, 于今三十年, 爲其弟子者, 當竭力盡誠, 以圖伸寃之方便, 而若不伸寃, 則願從泉臺之下, 優遊薰陶之列, 爲弟子當然之義.

대저 군사부(君師父)의 의리는 인륜을 밝히는 우리의 큰 법도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에게 충성하는 자 중에 온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 바친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만 사제(師弟)의 의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화를 당하신 지 지금까지 30년이 되었으니, 그 제자된 자는 마땅히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신원하는 방편을 도모해야 하는데, 만약 신원하지 못하면 저승에 따라 가서 훈도의 대열에서 한가롭게 노닐기를 바라는 것이 제자된 자의 당연한 의리입니다. 


박맹수 : 여기에서 ‘신원’은 『경국대전』「형전」에 나오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하는 ‘신소(申訴)제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원의 방편을 도모한다”는 말은 이런 제도에 근거한 “합법적인 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자”는 뜻입니다. 신원운동이 합법적이었다는 사실도 기존의 동학연구자들이 간과한 부분입니다.

조성환 : 유독 이 시기에 신원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 전에도 합법적인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요….

박맹수 : 1880년대 말~90년대 초에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세가 급격하게 확대되는데, 이것을 동학의 전문용어로는 ‘마당포덕’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가 되면 동학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방관들이 다시 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사태가 전개됩니다. 그 탄압의 수법 중에 동학과 무관한 사람들을 동학도인이라는 누명을 씌워 부당한 수탈을 하는 가렴주구 행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까 접주들이 해월 선생에게 찾아와서 도인들과 일반 민중들이 당하는 피해를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서인주와 서병학입니다.

이 건의를 받고 해결할 길을 찾은 것이 합법적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892년에 신원운동의 방안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허남진 : 1883년에 영국과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는데, 이 조약 중에 “개항장에서 영국민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린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1886년에 프랑스와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에서 천주교의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아마 이런 영향도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맹수 : 중요한 지적입니다. 동학혁명을 종교의 자유와 연결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근대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요소들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통문들을 편년사 식으로 정리한 것이 1910년대에 나온 『본교역사』라는 책입니다. 1880년에서 1890년대에 쓰여진 통문들을 국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시기 시기별로 해월 선생이 고민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가령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안 하고 있지만, 이런 시국을 ‘의식해서’ 해월 선생이 이런 일을 하고 계신다는 식의 서술이 나옵니다. 따라서 동학 내부에서도 당시 시대의 변화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교조신원운동을 모색하게 된 요인을 간적접인 외부적 원인과 직접적인 내부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박맹수 : 네, 그렇습니다.


嗟! 吾道儒全忘大義, 只趍利慾. 所望者肥己閏産, 所祝者宿病自效. 且日夜跂足而望者, 但先生主出世之後, 富貴功名之願也. 罔念師父伸寃之大義, 只願自爲身謀之僥倖, 然則君父之恩愛乎! 

且甘聽奸巧人之浮言妄辭, 屈指而待者, 光緖之出來, 悖逆之作亂. 若然則有何安保國家之策, 有何伸寃先生之所乎! 不忠非義, 無知沒覺, 莫比爲甚. 

其曰: “造化將至云” 如此不忠不義之人, 有何造化之所望乎!

아! 우리 도유(道儒)들은 완전히 대의를 잊고 단지 이익과 욕망을 쫓을 뿐입니다. 바라는 바는 자기를 살찌우고 재산을 늘리는 것이고, 축원하는 바는 지병이 절로 낫는 것뿐입니다. 또한 주야로 발돋움하며 바라는 것은 단지 선생님께서 세상에 (다시) 나오신 뒤에 부귀와 공명을 비는 것뿐입니다. 스승을 신원하는 대의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일신을 위하는 요행만을 바랄 뿐이니, 군부의 은혜와 사랑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간교한 사람의 터무니없는 망언을 듣기를 즐겨하여 손가락을 꼽으며 기다리는 것이 광서 연간에 (태평천국이) 출현하여 역적의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디에 보국안민의 계책이 있으며, 어디에 선생을 신원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불충하고 불의하며 무지하고 몰지각함이 이보다 더 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조화가 장차 이를 것이다”라고 하나, 이와 같이 불충하고 불의한 사람에게 어찌 조화의 기대가 있겠습니까!  


조성환 : 제가 생각하기에 ‘도유’는 “유교적 소양을 지닌 동학도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통문에 “知事之道儒”라는 말이 보이는데, 직역을 하면 “일머리는 아는 도유”라는 뜻으로 동학 리더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면 ‘도유’는 동학도인들 중에서 특히 한문을 알고 학식이 있으며, 공무를 처리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望須僉君子, 克圖先生伸寃之方便, 而不能敬惕, 惟言造化, 是乃不義也. 

如此不忠不義者, 當齊聲鳴鼓, 共討其罪, 天理之當然. 各須惕念, 修人事待天命, 人理之所當爲. 以此諒悉, 千萬千萬.

壬辰十月十七日

北接主人

바라건대 모름지기 모든 군자께서는 선생을 신원하는 방편을 잘 도모해야 하는데, 공경하고 삼가지 못하면서 오직 조화만을 말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이와 같이 불충하고 불의한 자는 마땅히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북을 두드려 그 죄를 함께 성토하는 것이 천리의 당연한 일이고, 각자 모름지기 마음을 삼가면서 인사를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잘 헤아려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임진년(1892) 10월 17일

북접주인 



박맹수 : 이 통문은 동학혁명사의 통설을 뒤집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동학연구자들이 이 사료를 안 읽고 얘기를 하니까 해설이 다 잘못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해월 선생은 신원운동은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하고, 해월 선생은 반대했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 자료를 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봉준 장군이 갑오년의 거의(擧義) 때에 동학을 옷으로만 활용했다[동학외피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교감이나 연락이 없었으면 그 많은 농민군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운동에서는 사상과 실천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此亦中, 各該接主, 簡率已往擇望中, 誠德信義知事之道儒, 通到卽刻, 等待于公州議送所. 而頭目來待淸州聽命處事次. 路需段, 各其該接中, 密密優辦. 而入呈議送時, 正衣冠, 濟濟蹌蹌, 無或錯亂違法事.

이때에 각 해당 접주는 이미 선별한 사람 중에서 성실하고 신의 있고 일을 아는 도유(道儒)를 거느리고,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공주 의송소(議送所)에서 기다리십시오. 두목이 청주 청명처(聽命處)에 와서 기다리는 일로 드는 노자돈은 각기 해당 접에서 비밀리에 넉넉히 마련하십시오. (관청에) 들어가서 의송을 올릴 때에는 의관을 바르게 하여 위풍당당하게 하고 혹시라도 착오가 생기거나 법을 어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박맹수 : ‘두목’은「 의송단자」를 공주감영에 제출한 공주취회의 지도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의송을 올릴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서 일주일에서 보름까지 머물러 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 분담도 되어 있었고요. 그것을 위해서 앞의 통문에서 “명단을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해월 선생은 청주의 손천민 집에서 배후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교조신원운동은 대단히 치밀하게 준비가 된 모양입니다.

박맹수 : 맞습니다. 2016년의 촛불혁명도 이전까지의 노하우와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과 같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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