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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06. 2018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4)

[개벽신문 제75호, 2018년 6월호]  한국의 철학

백 승 종 | 역사 칼럼니스트


[편집실 주] 편집 과정에서의 실수로 본지 73호와 74호에 게재된「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 3회와 4회가 이전 게재되었던 내용이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필자 백승종 님과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호는 중복 게재되었던 본지 73호 연재분의 후반부(13쪽 왼쪽단 여섯 번째 줄 부터)에 해당하는 내용부터 이어서 연재합니다.


3. 끝까지 학교의 부흥을 외치는 선비들

학문의 길과 과거의 길이 나뉘자 학교는 점점 더 파행으로 치달았다. 양난을 겪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향교는 교육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조선왕조는 향교에 훈도를 파견하지 못했다. 경전의 학습을 원하는 선비들은 서원으로 몰려 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유지자들은 서로 앞을 다퉈 서원을 건립하였다.


17-18세기에는 서원 건립이 봇물을 이루었다. 한 고을에도 대여섯 개의 서원이 난립할 정도가 되었다. 서당의 수는 더욱 많았다. 19세기 말이 되면 대략 3개 자연 마을마다 1개 꼴의 서당이 있었다. 성리학의 기본경전인 사서와 삼경을 공부할 기회는 상당수 평민들에게도 주어졌다. 18-19세기에는 상당수의 여성들도 한문을 익혀 문집을 남겼다.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등이 그들이었다. 학문에 종사하여 탁월한 성과를 낸 중인들도 많았다. 위항문학(委巷文學)이란 바로 시서(詩書)에 밝은 중인들이 이룩한 성과였다.


선비집안의 여성들과 평민들은 제각기 한글소설을 돌려 읽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소설을 필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윤색과 편집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당한 문예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취미와 이해력에 알맞은 판소리도 인기를 끌었다.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지식이 더 이상 특정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교육받을 기회가 널리 확대되었음은 물론, 창작과 독서를 비롯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가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상당히 위협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근원은 바로 지식은 어느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성리학(유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성리학의 이상인 군자가 되는 길은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정될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배움과 실천에 달린 문제였다.


공자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유독 중궁(仲弓)을 칭찬했다. 중궁의 가계에는 흠결이 있었다. 신분제 사회인 그 당시로서는 크게 쓰일 수가 없는 처지였다. 공자는 이를 안타까이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털이 붉고 뿔이 곧다면,
사람들이 비록 쓰지 않고자 해도 산천의 신들이 그냥 두겠는가?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공자는 출신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던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중궁이 남면(南面)할 만하다고까지 극찬했다. 왕이 될 만한 인재라는 뜻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편으로 양반이라는 세습적인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존의 신분질서를 고집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공자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누구든지 재능이 탁월한 이는 사회가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일견 모순되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바로 그러한 모순 속에서 때로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고, 때로는 인습에 얽매이기도 하였다.


일종의 비틀거림이었다. 학교 역시 본연의 목적인 배움의 장소이기도 하였고, 양반의 집단적 이기심을 고집하는 제도적 무기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18세기에는 당쟁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원이 당파싸움의 소굴로 변질되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시골의 몰락한 양반들은 서원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보루로 이용하였다. 서원이 가진 본연의 기능, 곧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은 갈수록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가 되면, 서원은 적폐세력의 근원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서원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도 고조되었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은 용단을 내렸다. 그는 서원 반대 여론을 배경 삼아 수천에 달하는 전국의 서원을 일시에 철폐하였다. 오직 47개의 서원만을 남겨 두었다.


이미 여러 세대 전에 유수원이 적절히 지적했듯, 학교교육이 정상화되어야 선비문화가 만개할 것이었다. 서원과 학교의 수가 많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운영되는 학교가 전국 여러 곳에 두루 설치되어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대원군의 생각이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 19세기 후반의 조선에는 수만을 헤아리는 서당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초급교육기관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등 및 고등 교육기관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많지 못하였다. 공설학교인 향교 교육의 정상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컸으나,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았다. 제도의 혁신도 어려운 일이었다. 바야흐로 이웃나라에서는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새로운 선비를 양성할 교육기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학교에 관한 논의가 거듭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원론적이고 모호한 주장만 되풀이하는 모습이었다. 일례로, 1879년(고종16) 5월 19일 경연에서 왕과 대신들이 어떤 문답을 주고받았는지를 지상(誌上) 중계한다 (『승정원일기』, 같은 날).


상(즉, 고종)이 말했다.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제왕의 큰일이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숭상하는 것이,
실로 학교를 일으키는 데 달려 있다.
만일 학교를 부흥시키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찌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박주운이 아뢰었다.


‘성상(즉 고종)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로서, 선비가 선비답게 될 수 있는 것은
학교를 부흥하는 데 달렸습니다.’


상이 다시 말했다.


‘선비는 진실로 국가의 원기이고, 선비의 기상을 진작시키는 것은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데 달려 있다.’


그러자 박주운이 아뢰었다.


‘조종조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왕이 현판을 하사한 서원들)은 곧 국학입니다.
열성조께서 학교를 일으키신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예의와 문물이 환하게 갖추어져 기성(箕聖, 기자)에 견줄 만큼
융성하게 된 것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서원을 다시 설치하여, 국가의 원기를 진작시키셔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일 듯합니다.’(중략)


박주운이 또 아뢰었다.


‘(중략) 지금 온 나라에 서원이 있던 곳이 철폐되었습니다.
선비들의 기개가 막히고 눌린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분발하여 결단을 내리셔서 특별히 다시 설치할 것을 명하십시오.

선비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용을 마련하도록 한다면, 나라의 경비에는 터럭만큼도 손해가 없으면서도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비들이 모두 기뻐하고 고무되어 마치 재생(再生)의 때를 만난 것 같을 것입니다.

지금 흔쾌히 시행하여 이미 꺾인 선비들의 기상을 진작시키고 이미 끊어진 유교를 부흥시키는 것이 오늘의 첫 번째 급선무일 듯합니다.’


상이 말하였다.


‘이미 여러 곳에 사액서원이 있다. 이 어찌 급하게 서둘러야 하겠는가.’


박주운(朴周雲, 1820-?)은 수학과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은 유신(儒臣)이었다. 그는 탁월한 성리학자였던 것이다. 그날 경연에 앞서 3년 전인 1876년(고종13), 조선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개항을 결정했다. 때는 근대화의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박주운을 포함한 대다수 신하들은 근대적인 교육은 안중에 없었다. 그들은 대원군이 철폐한 낡은 서원의 복구만을 대책으로 여겼다. 박주운 등은 국가의 재정 결핍을 고려해, 민간의 자발적인 기부와 희사를 통해 종래의 서원을 복구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차마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구태의연하고 안이한 사고방식의 표현이었다. 설사 그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해서, 학교가 되살아나거나 선비들의 면모가 일신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의심된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답답한 일이다.


조선은 책으로 일어났으나, 책으로 망했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지식의 독점이 깨지고 각계각층이 선비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오직 성리서(性理書) 만을 고집하는 구태의연 때문에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안타깝지만, 19세기 말의 우리 역사는 이렇게 평해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

1567년(명종 22) 경남 밀양에 세워진 예림서원


4. 존재 위백규,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다

물론 모든 것을 현대인의 눈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선비를 선비답게 만드는 것은 제도의 힘만은 아니었다. 선비는 부단히 내적 수련을 쌓았기 때문에 특별한 심성의 주인공이 되었다. 실제로 조선의 많은 선비들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했다. 그들은 표면으로 드러난 양적인 성취보다는 질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 가지만 실례를 들어본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 호는 存齋)라는 선비가 있었다. 일반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지 모르겠으나, 18세기 호남 일각에서는 학덕과 품행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비이다.


위백규는 「봉사(奉事)」,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의 글을 조정에 올려 당대 농촌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기도 하였다.「 연년행(年年行)」 등의 연작시를 써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 참여 성향이 농후한 선비였다. 이런 그조차 새로운 제도를 통해 조선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외형의 개혁보다는 오히려 선비 각자의 수양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기본입장이었다.


위백규는「정(靜)」(하편)에서 인생의 한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파헤쳤다(위백규, 『존재집』, 제16권).


“사람의 우환은 정(靜)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임금은 임금답게 안정할 수 없었다.
주공과 소공 이후 신하도 신하답게 안정할 수 없었다.
춘추 시대 이후로 선비는 선비답게 안정할 수 없었다.

정(靜)이란, 욕심이 적은 사람만 그 상태에 도달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말과 행동은 어디에서든지 ‘체’(體, 본질)가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조급하여 서두르면 반드시 넘어진다. 경쟁적으로 달리면 반드시 손상된다.
진수성찬을 차린 큰 밥상이라도, 마음이 불안하면 반드시 목이 멘다.
(훌륭한) 음악이 연주되어도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즐기지 못하고
탄식하기 마련이다.

세상 사람들은 안정되지 못한 마음과 행동으로 부귀를 빨리 이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상태에 도달한 이는 없었다.
뉘라서 그것을 누릴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욕심을 줄이고 마음에 여유를 갖는 것이 안정을 얻는 데 필수적이다. 위백규는 그렇게 믿었다. 그만이 아니라, 조선의 선비들은 대개 그렇게 확신했을 것이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선비들은 경제 발전을 통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비의 삶은 내면의 안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바로 그 점에 조선사회의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매사에 ‘빨리빨리’를 요구한다. 이익과 효율이 사실상 가치의 유일한 척도이다. 그러나 옛 선비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수양을 통해서 인생의 복잡한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위백규가 증언하였듯, 그때도 ‘빨리’를 외치고 ‘부귀를’ 탐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선비들은 보통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길을 버리고 전혀 다른 길을 가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아름다운 일이었다.




5. 선비의 ‘출처’ -- 난세에 길을 묻는 선비들

이해관계가 다르면 언젠가 충돌하기 마련이다. 심하면 거센 소용돌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세상사는 그런 것이다. 선비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살기를 바랐다. 선비가 유독 벼슬길에 들고(處) 남(出)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 데는 그런 까닭이 있었다.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출처’의 달인이 없지 않았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특히 유명했다. 출처의 이치를 궁구한 선비들은 더욱 많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을 비롯해,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과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등도 출처를 어떻게 결정해야 좋을지를 놓고 깊이 고심하였다.


하서 김인후의 ‘출처’

16세기의 큰선비 김인후는 함부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인종에 대한 신하로서의 의리를 다하기 위해, 명종이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종의 제삿날이 되면 홀로 자신의 고향에 있는 난산(卵山)에 들어가 통곡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그렇게 인종을 향한 충심을 다하였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자손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부탁을 남겼다. 자신의 위패에는 인종이 내려준 마지막 벼슬, 곧 ‘옥과현감’(옥과는 현 전남 곡성군)의 직책만 쓰라고 하였다.


김인후의 시대는 사화(士禍)가 점철된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절개 있는 선비들이 이유 없이 화를 입고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김인후는 학문도 뜻도 높았으나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방향을 잃지 않았고, 휘둘리는 일도 없었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충심으로 나랏일을 돌보았고, 물러난 다음에는 자연을 벗 삼아 내면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학문에 종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후학을 길러 성리학의 이상을 고이 전하였다.


후세는 김인후의 출처를 모든 선비의 으뜸으로 삼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도 그를 부러워하였다. 19세기 초,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은 김인후의 출처에 관해 선비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전설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글은 본래 김창협(金昌協, 1651-1708, 호는 農巖)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상소문의 일절이었다 (『농암집』, 별집 제4권).


“김인후는 군신의 의리를 다하였고, 김창협은 부자의 인(仁)을 다하였습니다.
일은 서로 다르지만 자취는 같아, 두 분 모두 인륜을 한결 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지난 날 선정신(先正臣) 이이는 매번 김후지(金厚之, 김인후)의 출처가 매우 고상하여 우리나라에 견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서(곧 김인후)의 문인 오희길(吳希吉, 1556-1623)이
윤근수(尹根壽, 1537-1616)로부터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16세기 후반, 이이는 김인후의 출처를 다른 선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지라고 극찬했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가 윤근수와 오희길 등을 거쳐 후세에 길이 전해졌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청고(淸高)한 뜻을 세우기도 어렵지만, 그러면서도 심신을 온전히 지키기란 더욱 곤란한 일일 것이다.


우계 성혼, ‘출처’의 어려움을 겪다

1583년(선조16) 이이가 반대파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때마침 이이의 심우(心友)였던 성혼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이이의 처지를 변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반대파의 분노를 증폭시킬지도 몰라 깊이 염려하였다. 또, 그동안 자신이 산림(山林)에 묻혀 지내는 처사(處士)로 지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시사(時事)에 적극 개입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되지 않을까 깊이 생각했다. 거취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성혼은 친구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에게 편지를 보내 충고를 구하였다.


그때 송익필의 답장은 이러했다. 


“존형(尊兄)이 주상(즉 선조)의 인정과 대우를 받아 이미 조정에 나갔으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자처할 수 없습니다. 어찌 가슴에 쌓인 바를 다 아뢰어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않으십니까. 존형을 조정에 나오게 한 특별한 명을 그저 형식적인 일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혼은 송익필의 조언에 따라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반대 여론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는 큰 낭패를 보았다. 이 일로 인해 송익필은 더욱 심한 곤경에 처했다. 사방에서 비방이 쏟아졌고, 그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다(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우계연보보유』, 제1권, ‘出處’를 참조할 것).


이 일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 성혼은 자신의 출처에 관해 퇴계 이황의 조언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이황이라면 매사에 신중한 시대의 큰 스승이라서, 정확한 판단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성혼이 받은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위와 같은 글).


작은 벼슬을 사양하고 큰 벼슬을 받으며, 물러가는 것을 이유로 삼아 나아간 것.
이 점은 바로 내가 청의(淸議)에 죄를 얻어 훌륭한 사필(史筆)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물으니, 부끄러워 진땀이 납니다.
무어라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나아가라고 권한다면, 그대로 하여금 내 잘못을 본받게 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나아가지 말라고 권한다면,
이것은 또 나 자신을 꾸짖은 뒤에 남을 꾸짖으라는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오.


이황은 그 자신도 출처를 완벽하게 정하지 못해, 비판여론이 있었던 사실을 회상하였다. 그랬던 만큼 성혼에게 왈가왈부할 입장이 못 된다며, 이황은 충고를 회피하였다. 모든 선비들이 존경하는 이황다운 모습이었다.

앞에서 나는 성혼이 당면한 출처의 어려움을 기술했다. 그러나 그때 일도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성혼이 평생에 조정에서 벼슬한 날짜를 헤아려보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이를 변호하다가 반대파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관직을 사퇴한 뒤로, 그는 늘 벼슬을 멀리 했다.


성혼이 세상을 떠난 뒤, 조익(趙翼, 1579-1655, 호는 浦渚)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성혼에 관한 세간의 오해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성혼은 본래 산중에 은거해 있던 선비였습니다.
평생 조심한 것이 일신의 진퇴(進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고 죄를 기다렸습니다.
(중략) 대가(大駕, 선조)가 피란하던 날 길가에서 통곡하며 맞이하려고 미리 계획을 세웠으나, (임금께서) 서쪽으로 떠나가시던 날 모든 일이 급하게 벌어졌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으니, 사세가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혼은 평생 동안 옛 도를 배워 평상시 일을 처리할 때에도 모두 의리에 맞게 하였습니다. 하물며 국가의 큰 변고와 군신의 큰 의리에 관계되는 문제를, 어찌 정해진 소견이 없어서 달려가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성혼의 반대파인 동인들은 왜란 중에 성혼이 하였던 행동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할 때, 성혼이 찾아와서 문안을 여쭙지 않은 사실을 줄곧 심하게 비판하였다. 조익은 그 점을 일일이 해명하며 성혼의 언행을 변호하였다.


조익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박세채(朴世采, 1631-1695, 호는 南溪)는 성혼의 출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황과 성혼의 출처관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논증하였던 것이다. 박세채는 『남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유현(儒賢)들도
일찍이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자, 사양만 하고 나오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것이 출처(出處)의 정도(正道)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퇴계(이황)와 우계(성혼) 두 선생이 처신한 바는 달랐다.

하지만 그 본뜻을 깊이 헤아려보면, 학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재능이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경솔하게 세상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러다가 끝내 분수와 의리에 얽매이고 은혜와 예에 구애되어,
부름에 응하여 벼슬을 맡으신 것이었다.

이분들의 행동이 과연 옛 사람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황은 조정에 나왔을 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성혼이 적극적으로 이이를 변호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본래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들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잠시 조정에 섰던 것이다. 주자나 정자 등 송나라의 큰선비들도 조정의 거듭된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벼슬길에 잠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피차간의 사정은 매우 비슷했다. 이것이 박세채의 판단이었다.


당당한 출처는 선비라면 누구나 다 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세상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평생 벼슬에 나갈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실학자이익도 출처의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 그는 「백옥 출처(伯玉出處)」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이익, 『성호사설』, 제19권). 춘추시대의 명재상 거백옥(蘧伯玉)을 예로 들어, 출처의 원리를 탐구했던 것이다. 이익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거백옥은 (중략) 위(衛) 나라에서 벼슬했다. 조정에 나아가서도 일에 아무 잘못이 없었고, 물러나서도 몸을 잘 보전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겉은 너그럽고 마음은 정직했다. 대개 남이 굽은 것을 보면 바로잡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자기 몸은 바르게 했으나, 남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평생 인(仁)과 선(善)을 앞세우고 노력하여 일생을 잘 마쳤다.’


평생 ‘인’과 ‘선’을 실천에 옮기며, 자신이 할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애쓰는 것, 이것이 출처의 근본이었다. 이익은「 출처지의(出處之義)」라는 글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예를 들었다. 조선에도 거백옥에 비길 만한 선비가 있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성호사설』, 제9권).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장현광이 충청도 보은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제자 한 사람이 출처(出處)의 의(義)를 물었다. 장현광의 대답은 이러했다. “배워서 학식이 넉넉해지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 (임금이) 예우하는 뜻이 있으면 나아가 벼슬한다.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으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이다. 끝내 벼슬하지 않았더라도 두 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한 가지요, 은둔(隱遁)의 이름을 빌려 그 대가를 얻으려는 것이 두 가지이다.”


이익은 출처의 옳고 그름을 논한 사람은 많았으나, 장현광이 한 말보다 정곡을 찌른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이와 똑같은 예화가 마침 이덕무의 글에도 보인다(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0권, 「장여헌(張旅軒)이 말한 출처(出處)의 의(義)」). 장현광의 사례가 그만큼 선비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선비의 일생이 출처의 도리에 합당했다고 후세가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선비들의 평가는 까다로웠다.『 당의통략(黨議通略, 당쟁의 역사)』에서 이건창이 주장했듯, 조선의 선비사회는 지나치게 명절(名節)을 숭상하였다. 그 시대에는 선비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출처의 도리에 부합되게 하려고 노심초사했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허다한 난관을 뚫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면의 높은 지향을 견지하며 참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제 논의를 마칠 때가 되었다. 16세기부터 조선사회는 ‘윤리적 인간’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비들이 윤리적으로 완벽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윤리적 하자가 발견되면, 세인의 호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선사회처럼 윤리적 기준이 높은 사회는 자칫 하면 위선에 흐르기가 쉽다. 실제로도 선비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위선이 의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물론 위선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예 도덕적 기준을 포기해버린 듯한 세상에서 산다. 이따금 국회에서는 고위공직자 후보에 관한 청문회가 개최되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청렴은 고사하고 웬 불법과 비리를 그렇게들 많이 저질렀는가. 도덕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사회가 아닌가 싶다. 차라리 이런 몰염치의 세상보다는 선비들의 작은 위선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제4장 ‘성리학 근본주의’의 독배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망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마땅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탓으로 돌렸다. 또는 성리학에 골몰하였던 지배층의 무능 때문이라고도 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조선사회는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이를 테면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금 근본주의라고 했다. 주희의 학설을 신성시하였고, 조금이라도 거기에서 어긋한 것은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마치 신학(Theology)과도 같았다. 교조주의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래서 성리학 근본주의라는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가 초래한 사회적 폐단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이가 누구였을까.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었다. 그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요, 문인이었다. 그는 이건창, 황현과 더불어 문명을 떨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운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자나 깨나 국권회복을 소망하던 그는, 1918년 김택영은 중국의 통저우에서 『한사경(韓史綮)』이라는 조선역사책을 간행했다. 총 6권이나 되는 방대한 조선통사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난 500년 동안 조선왕조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다.


시대 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의 6가지 폐단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졌다. 첫째, 태종이 도입했다는 ‘서얼차대법’, 둘째, 성종의 ‘개가금지법’, 셋째, 세조의 단종 폐출, 넷째, 영조의 사도세자 처형, 다섯째, 순조 때부터 극성을 부린 세도정치, 끝으로, 당쟁의 폐단이었다.


김택영은 유학의 전통인 「사론(史論)」의 형식을 빌려, 조선 역사의 잘못을 여지없이 파헤쳤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배신하고 국왕까지 시해하였다는 왕위 찬탈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이 책을 읽은 고국의 유림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선비들은 그를 ‘사적(史賊)’이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김택영의 사관을 비판하는 책도 나왔다. 『한사경변(韓史綮辨)』이 2종씩이나 출간되었던 것이다. 두 책 모두 1924년 같은 해에 간행되었다. 그중 하나는 맹보순(孟輔淳, 1862-?)이 편찬한 것이다. 한흥교(韓興敎) 외 101명이

총 162조에 걸쳐 『한사경』의 주요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들의 글은 1923년 9월에 「조선일보」를 통해 일반에 이미 공개된 것이었다.


또 한 권의 책은 이병선(李炳善, 생졸년 미상)이 편찬을 주도했다. 정확히 말해, 1907년 송병화(宋炳華, 1852-1916)가 창설한 유교 계열의 신종교 단체인 태극교본부(太極敎本部)에서 만든 책이었다. 거기에는 총 213조의 반박문이 실렸다. 뿐만 아니라 김택영을 향한 통고문(通告文)·성토문(聲討文)·경성신사찬동자개략(京城紳士贊同者槪略)·지방신사찬동자개략(地方紳士贊同者槪略)도 첨부되었다. 이것은 물론 구한말 유림의 총의를 모은 집단 창작이었다.


유림의 집단적, 조직적 반발이 실로 대단했다. 그럼에도, 나는 김택영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는 아닌 게 아니라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를 비롯한 신지식인들도 성리학 망국론을 제기하였다. 심지어 약 20년 전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바다출판사, 2001)는 책이 나와서,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성리학이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상이라는 비판은 오늘날 하나의 상식으로 통할 정도이다. 성리학의 폐단에 대한 일반 시민들과 지식층의 비판이 꼭 합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그렇다 해도 비판의 목소리에 상당부분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성리학을 근간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사회의 굵직한 폐단을 몇 가지만 예시해 보자. 첫째가 ‘서얼차대’(庶孼差待, 서자에 대한 차별), 둘째가 당쟁의 폐단, 셋째가 ‘문체반정’(文體反正,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넷째가 ‘금서’(禁書)를 통한 사상의 탄압, 다섯째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운 쇄국정책이었다. 관점에 따라서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그렇게 본다.


방금 예시한 5개 항은 어느 것이든지 성리학과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 그중에는 부분적으로는 성리학의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도 있다. 알다시피 위정척사운동은 다분히 양면적이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한 점에서, 그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외래 종교 및 사상에 대한 금지와 탄압을 당연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있었다. 나머지 4개 항은 변명의 여지없이 ‘성리학 근본주의’가 낳은 심각한 폐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그렇게 보는 이유를 차례로 하나씩

설명할 것이다.




1. ‘서얼차대’라는 고질병

서얼 차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중봉 조헌(趙憲, 1544-1592) 등의 선각자들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선비들은 서얼 차별을 당연시했다. 그들은 적서(嫡庶)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기강을 유지하는 옳은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도덕과 윤리의 실천은 신분질서와 사회기강을 무너뜨리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비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공자, 맹자 및 주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며, 차별의 폐습을 제도화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8세기 후반, 성대중(成大中)이란 문인이 있었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으나 학식이 탁월하여 정조의 아낌을 받았다. 그가 쓴 한 편의 글「, 성언(醒言)」에는 ‘서얼차대’(곧 서얼차별)의 쓰라린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성대중, 『청성잡기』, 제4권).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얼의 벼슬길이 처음으로 막힌 것은 태종 때인 1415년(태종15)부터였다. 서얼인 정도전(鄭道傳)에 대한 왕의 혐오가 이런 조치를 낳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서자에 대한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鄭文炯, 1427-1501)만 해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를 거듭해 판중추부사(종1품)까지 지냈다.


차별의 관습이 고질이 되고 만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정이 심각해진 것은 17세기 들어서다. 인조 즉위 초에는 이미 악습이 굳어졌다. 그리하여 인조가 병조, 형조, 공조에 한해서는 서얼 출신도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으나, 막상 그 혜택을 입은 서얼은 거의 없었다. 차별의 폐습은 점점 일상화되었다. 이를 문제 삼는 선비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18세기 후반, 정확히 말해 1772년(영조48) 영조는 서얼에게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 왕명은 불과 5년 만에 무효화되었다. 전국의 서얼들이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사태는 전환점을 얻지 못했다.


1777년(정조1) 3월, 정조는 서얼의 등용을 위해 따로 시행규칙(許通節目)을 마련했다. 왕은 서얼들에게도 관직 진출의 기회를 주고자하였다. 그러나 인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왕명을 어겼다. 그들은 단 한 명의 서얼도 청요직(淸要職, 명예롭고 권세 있는 벼슬)에 발탁하지 않았다. 정조는 조정의 이런 폐습을 잘 알고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침묵하였다.


성대중은 이런 사태를 비판하였다. “장자(莊子)가 말한 대로, ‘풍속이 임금보다 무섭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서자인 자신의 절망감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 정조는 서얼의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서얼허통절목(庶孽許通節目)」을 정했다. 그 나름의 실천 방안도 수립하였다.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자리를 두어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서이수(徐理修, 1749-1802) 등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발탁하였던 것이다. 박제가는 승지를 지낸 박평(朴坪, 생졸년 미상)의 서자요, 이덕무는 통덕랑 이성호(李聖浩, 생졸년 미상)의 서자였다. 다들 처지가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규장각 검서관은 일종의 임시직이었다. 게다가 품계도 낮아, 잡직 9품부터 6품에 그쳤다.


이웃 나라인 중국에는 서얼차대라는 사회적 악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들도 그런 사실쯤은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양반인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얼 차별을 제도화하였다. 말끝마다 그들은 공자와 맹자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웠지만, 서자 차별을 합법화할 수 있는 논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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