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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3. 2018

새로 쓰는 동학기행 - 전라남도 편

함평

* 이하 본문은 2022년 5월, 단행본 <새로쓰는 동학기행>3.으로 발간되었기에, 내용을 축약하여 소개합니다.[2022.5 - 편집실] 



[개벽신문 제76호, 2018년 7월호] 새로 쓰는 동학 기행Ⅱ _ 채 길 순 |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1862년 4월 16일, 정한순을 우두머리로 일어났던 함평 지역 농민항쟁은 ‘민란시대’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의 일부였다. 그 해 2월에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전국 70여 개 군현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당시 함평민란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정한순, 이방헌, 김백환, 진경심, 홍일모, 김기용 등 6명으로, 항쟁 초기부터 마무리 될 때까지 진두지휘했다. (하략)


함평 지역 동학 유입 시기

함평에 동학이 언제 전파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 하략)


1차 봉기 사기, 함평 관아 점령하여 7일간 머물러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이 정읍 황토재 전투에서 감영군을 물리치고 4월 16일 함평으로 들어왔다. (중략) 이 시기의 함평 동학농민군 활동은 <갑오군정실기> 나주 쪽에서 보고된 기록에서 활동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데, “(함평의 동학농민군)이 6월 17일에 수천 명의 무리가 남평(南平)을 무너뜨려 점거하고 기필코 우리(나주성)를 침범하겠다는 형세가 분명히 있었지만 우리들이 이미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과연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라 하여 난공불락의 나주성을 치기 위해 또 다른 세력의 동학농민군이 함평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하략)


집강소 설치시기, 함평집강소 설치

이 시기 함평 동학교도 활동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참여자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하략)


2차 봉기 때 이화진 함평 동학농민군, 고막포 전투에 참여

괴치마을 부지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으며, 삼정들(혹은 삼장들) 역시 장경삼, 옥삼, 공삼 삼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2차 봉기 시기에 함평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군에 합류하기 위해 북상한 세력과 나주성을 치기 위해 남하하여 고막포전투를 이끈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하략)


함평 동학농민군, 토벌 민보군에 의해 보복

함평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지리적으로 동학농민군이 포위되는 지역으로, 엄청난 인명이 살상당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하략) 


참여자 기록을 통해서 본 함평 동학농민군 희생자 

1894년 12월에 접어들면서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관군, 민보군으로 구성된 토벌군에 체포되어 거의 매일 몇 명 씩 붙잡혀 총살되었다. 1894년 12월 8, 9일, 12일 30일에 처형되어 이듬해 2월 17일가지 전개되었다. 희생자 명단은 48명으로 다음과 같다. (하략)  

 

함평 지역 유적지

● 동학농민혁명 장경삼 옥삼 공삼 선생 공적비(東學農民革命 張京三 玉三 公三 先生 功績碑) :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사천마을 장산들 입구.

● 고막포 전투 터 : 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

● 서남부 동학군 집결지 고막원(古幕院) 터 : 현 나주군 문평면 옥당리

● 함평 집강소 터 : 함평읍 옥산리 321

● 함평 집강소 집강대행 서기 장경광 묘지 : 함평읍 옥산리 10-10


[개벽신문 제75호, 2018년 6월호] 새로 쓰는 동학 기행Ⅱ 

동학농민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최초로 중앙군을 격파했다. 황토재 전투에 이어 황룡강 월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기세를 몰아 장성 갈재를 넘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략) 

 

초기의 동학농민군, 고도의 심리전 펼쳐

정읍 황토재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은 영광 함평으로 남진하면서 군세가 엄청나게 불어나 전라도 전 고을이 동학농민군 수중에 들어오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당시 동학지도부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다. (하략) 

 

동학농민군, 경군과 맞닥뜨리다.

영광 함평을 거쳐 남진하던 동학농민군은 돌연 동쪽 장성으로 방향을 바꿨다. (하략)  


황룡면 장산리에서 관군 물리치고, 이학승 대장 사살

장성을 향하던 동학농민군이 마침 끼니때가 되어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관군으로부터 불의의 포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이내 혼란을 수습하여 조금 물러났다가 곧바로 황룡촌 뒷산인 월평 삼봉으로 올라가 진을 쳤는데, 마치 학(鶴)의 모양과 같았다. (하략) 

 

장태를 만든 이는 누구인가

그러면 장태라는 신무기를 만든 이는 누구인가? 장흥접주 이방언이라고 알려졌지만 또 다른 구전에는 담양 출신 이용길이라고도 하고, 장성 출신 접주 이춘영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략) 


장성 전투 참여자는 전라도 각지의 동학농민군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은 전라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당시는 전라도 각지의 동학농민군들로 규합된 세력으로 보인다. 백산대회와 황토재 전투를 치르면서 전라도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었다. (하략)


참여자 기록을 통해서 본 장성 출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활동

장성 출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행적을 보면 장성 지역 동학농민혁명 투쟁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장성 지역 동학교도는 보은취회와 삼례취회 참가로부터, 무장기포와 백산 기포, 황토재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전투, 9월 재기포와 공주성 전투, 남쪽의 강진성 전투, 전라병영 전투, 장흥 벽사역 전투, 장흥 석대들 전투, 내장 전투 등 각지의 전투에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략) 


장성 지역 유적지

● 황룡촌 전투 기념탑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 이학승 순의비 : 장성군 황룡면 물뫼길 25(구 황룡면 장산리 356)

● 장성 동학농민군 처형터 : 황룡면 신호리 옛 장터.

● 장성 백양사 전봉준 도피처 : 공주 우금치 전투 뒤에 수만 군사를 다 흩어버리고 거의 단신으로 11월 30일 백양사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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