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공부 21
동학이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를 외치며 나온 동학이, 또한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비정상적으로 고착화되고 나아가 왜곡되기까지 한 '양반갑질'의 절정판이던 조선후기사회에서, '을 이하'의 계층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들의 호응 속에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윤리를 밝게 하라!"라는 말에 대하여, 자칫 "다시 유교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반문/반박/반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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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으로는, 도인들 사이에 예의를 지키고
'나쁜 언행'을 삼가라는 '도덕적 훈계'일 수 있습니다.
해월 선생께서는 1890년대 초에 전라도 순회를 마치고
"도에 드는 사람은 많은데, 도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적다"고 걱정한 후
"통유십조"(通喩十條)라는 실천강령을 내놓습니다.
이 시기에 전라도 지역에서는 동학도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cf. '마른 들판에 불 붙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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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후에도 동학도인들이 실천하고/삼가야 할 사항을 적은
통유문(通諭文)들을 여러 차례 내보내지만,
이때의 '통유십조'는 간결하면서도
비교적 많은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 개의 조항'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합의식적'이라는 점도 유념할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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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유십조는 1880년대 후반부터 특히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도인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도인들의 동학공부가 충분히 익기도 전에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생기게 마련인 여러 가지 문제"가 "자정작용으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데 따른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서민생활에 악영향을 끼치듯, 도인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빠르게 증가하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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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중 첫 번째 조항이 '명륜(明倫)'입니다.
"윤리를 밝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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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를 외치며 나온 동학이, 또한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비정상적으로 고착화되고 나아가 왜곡되기까지 한 '양반갑질'의 절정판이던 조선후기사회에서, '을 이하'의 계층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들의 호응 속에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윤리를 밝게 하라!"라는 말에 대하여, 자칫 "다시 유교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반문/반박/반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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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으로는, 도인들 사이에 예의를 지키고
'나쁜 언행'을 삼가라는 '도덕적 훈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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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번 더 돌이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동학은 양반 / 천민의 신분 구별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만큼
"윤리를 밝게 하라!"라는 말은 양반/상놈 할 것 없이
당시 동학도인들/세상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표현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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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무엇보다,
'명륜'을 강조하는 해월의 당부는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왜 그런가? "동학도인들이여, 윤리를 밝게 하라!"라는 말에는
'양반' '유생' '지식인(선비)'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윤리를 민중들이 앞장서서 바로잡고, 지켜나가(자)는
전복(顚覆/뒤바꿈/뒤집어엎음=개벽)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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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양반의 전유물이던 "보국안민"의 가치를
수운 선생이 '동학 도인(민중)들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양반들의 심기를 자극하여
동학을 '좌파(左道)'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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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 "보국안민"이라는 말이 '시대의 맥락'에서 보아
직접적인 "혁명의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동학도인들 중에는 '양반, 지식인, 부자'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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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는 '양승태 대법원' 문제, 다시 말해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사유화하여, 사익을 편취하기 위한
'거래물'로 취급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정황을 보며
'윤리를 밝게 하라'는 통유십조의 조항이 더욱 소중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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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의 사태를 보며
『孟子』「공손추 상(公孫丑 上)에 나오는 글,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人皆有不忍人之心) (중략)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으로
(以不忍人之心)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정치를 하게 되면,
(行不忍人之政)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손바닥에서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治天下可運於掌上)
라고 하신 말씀이, 성인과 성군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덕목이기도 한 오늘[民主]의 관점에서 보면
'양승태'로 대표되는 '그분'들은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셈입니다.
그 '불인(不人)'스러움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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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를 밝게 하는 것은 단지 '도덕'을 강요하는 훈장질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 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수기치인이 '고원난행(高遠難行)'한 '별천지/별유인'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 자신의 일동일정(一動一靜)에서 윤리을 밝히는 데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듦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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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통유십조의 두 번째 조항은
수업(守業)입니다.
생업에 충실하라는 말도 되지만,
내 직분을 지켜라, 말하자면, 직업윤리에 충실하라는 말입니다.
'그분'들은 최소한의 '상도덕'조차 지키지 못하여
'장사꾼/건달'은커녕
'장사치/양아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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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산(恒産)이라야 항심(恒心)이지만,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항산'은 불가능하므로..
항심(恒心)이어야 항산(恒産)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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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수업은 '염치'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의 '몰염치(歿(沒)廉恥)'를 보며,
나의 '몰지각(歿(沒)知覺)'을 돌아봅니다.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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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두려워지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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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리를 밝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