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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7. 2016

동학, 더불어 삶을 가르치다(1)

동학이야기 세 번째, 동학과 공동체문화 

1. 동학, 각자위심의 삶에 물음을 던지다 


‘더불어 살기, 어울려 살기, 함께 살기, 공동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단순한 말의 유행이 아니라, 마을공동체라든지 협동조합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에 서서히 뿌리내려 가고 있다. 현시점에서 볼 때, 그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그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우리 사회의 주류적인 삶의 양식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엿보이기는커녕, 그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더불어 살기, 어울려 살기의 흐름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한때의 유행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문제이며,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어쩌면 1백년 이상의 한국사회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막다른 골목이다시피 한 현재의 삶의 조건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러나 필사적으로 매달린 화두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우리 사회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근원을 동학으로 소급해 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동학은 서양 제국주의(자본주의)가 이 땅으로 몰려들던 1860년대에 창도되어 30여 년 이상 우리 사회가 외세에 의해 서서히 매몰되어 가는 세월을 겪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해 온 사상이요 철학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학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삶(생명)을 나누고 단절시키며 그 속에서 ‘나’만을 우선시하는 그릇된 삶의 행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은 우리 삶(생명)의 본래 모습이 한울님이라는 본체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서로 어울려 있다는 실상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또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各自爲心) 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포덕문)


각자위심이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내 몸을 중심으로, 내 몸에 한정하여 생각하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드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생명(나)의 실상이 동귀일체[同歸一體=처음으로 돌아가보면 본래 하나의 근원(體)으로부터 나온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위심 해서 지금 당장의 내(내 기업, 내 나라) 삶은 풍요로워지는 듯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우리 생명(공동체, 지구환경)은 부서지고, 무너지고, 찢기고, 굴복하며 마침내 죽어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내달리는 것이다.


동귀일체(同歸一體)란 이 세상 만물이 (같은 근원=한울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과 만물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함께(同) 그 근원(體)로 돌아가(歸) 하나(一)가 된다는 말이다. 마치 한 나무에서 가지가 갈라져 그 끝에 나뭇잎이 돋아났다가 가을이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나무의 자양분으로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같다. 


“언젠가 땅속에 묻힐(장평갱졸) 모든 세상사람은 한울님의 조화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은덕에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근본(동귀일체)조차 잊을소냐. 가련한 세상사람 각자위심 하단 말가, 한울님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하라. 효박한 이 세상에 근본을 잊지 말아라.”(권학가) 


(다음, '2.한울님과 사람의 어울려 살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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