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17. 2016

동학, 1000문 1000답[1]

-이 글은 수시로 업데이트됩니다. 

[필자주 : 동학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에 답변을 올립니다.]




동학과 천도교의 관계는?


[요약] 1860년 창도 이후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타칭되던 '동학교단'은 1905년 '근대종교'로의 체제 개편과 더불어 그 명칭을 '천도교'라고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동학'과 '천도교'의 관계를 '순리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일부에서는 '동학'과 '천도교'를 별개의 것으로 갈라 보려고 한다. [필자는 /동학은 '원형과 최초의 모습'을 고수하는 데에서만 그 본질이 보존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천해 가는 속에서 재현되고 재해석되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동학 - 천도교의 흐름이 유일절대는 아니라는 점도 또한 인정한다. 그 '정통성'은 현실 속에서 '실천'과 '증거'로 '증명'되는 것이지 '주장'과 '논리'로 선취되는 것은 아니다.] 


[상세설명] 

(1) 동학이라는 이름은 창도 초창기에 수운 선생과 제자들이 문답을 주고 받는 가운데 나온 이름이다. 제자들이 수운 선생의 '도'가 무엇인지를 묻자 수운 선생은 "천도를 받았다"고 한다. 다시 제자들이 '양도(洋道)'와 다른 점이 없냐고 묻자 수운 선생은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즉 하나요 도인즉 같으나 이치인즉 아니니라."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도인즉 같다'라는 말을 받아서 제자들이 "도가 같다고 하면 (수운 선생께서 받은 도를) 서학이라고 이름합니까"라고 묻자 수운 선생은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라고 하면서 '동학'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한다. 이때부터 수운 선생의 받은 '천도'는 '학'으로서는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된다.

(2) 동학은 창도 이후 수운 최제우 선생이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당하고, 많은 제자들이 유배되거나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며 수난기를 맞이한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수운 순도 이후 7년째 되던 1871년 전후로는 경북 영해 지역 중심으로 '이필제의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 수백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고, 동학에 대한 탄압이 다시 극심해졌다. 그로부터 다시 20여 년에 걸쳐 해월 최시형으로 중심으로 동학의 세력은 서서히 회복되어, 마침내는 수운 최제우 당시보다 지역적으로나 인원수로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동학'을 배우고, 익히며, 동학이 제시하는 미래비전(후천개벽)에 지지와 기대를 함께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동학의 성장에 비례하여 동학(도인)에 대한 탄압이 다시 극심해졌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및 미래비전의 선취를 위한 '결행'의 결과가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면서, 동학은 또다시 극심한 탄압과 '절멸'의 위기를 겪더니, 마침내 1898년에는 수십 년 동안 동학을 지탱하고 지도하던 거목 해월 선생이 순도하게 되었다. 

(3) 다시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의암 손병희 선생은 일본 등지에서 보고 들은 세계 문명의 흐름과 동학의 장래를 고려하여 '동학'의 체제와 '방식'을 "종교"적인 틀로서 재구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 12월 1일, "옛날의 동학이 지금의 천도교"라는 신문광고를 일제히 게재함으로써 동학은 '천도교'라는 '근대적 종교'로 재편되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의 본명은?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는 경주 최씨(본관)이며, 자()는 성묵(性默). 아명(=여렷을 때 이름)은 복술(福述, '卜術'이라는 한자도 보이는데, 관에서 최제우를 '비하'하기 위해 쓴 것으로 보임)*, 관명(冠名=성인이 될 때 이름, 이것이 '본명')은 제선(濟宣), 호()는 수운(水雲). '제우(濟愚)'라는 이름은 35세 되던 해에 주유천하 활동을 끝내고 다시 옛집 용담으로 돌아와서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다시 지은 이름이다. 

이때 수운은 "불출산외(不出山外)"라는 글도 지어서 기둥에 붙였다. 이는 "세상을 건질 새로운 도를 깨닫기 전에는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福述'이라는 한자어도, 우리말 '북슬'을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주지방에서는 어린아이의 아명을 지을 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삽살개의 별칭인 ‘북슬’이라는 아명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 




동학의 '접'과 '포' (접포제)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요약]'포접제'는 동학이 확산되면서 교주(敎主)를 중심으로 그 아래 조직을 이루는 제도로, 처음에는 몇 개의 '접'이 있었으나, 그 조직의 규모가 점점 커져 '접' 안에 여러 개의 접이 생기자, '큰 접'을 '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포(包=大接)의 지도자를 포주(包主) 혹은 대접주(大接主)라 하고, 접(接)의 지도자를 접주(接主)라고 한다.


[상세설명]

1. 접 조직 

(1)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창도되어, 1861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하자마자 원처근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동학에 입도하였다. (2) 초기에 ‘동학을 알게 된 경로(사람)’의 갈래를 따라 자연스럽게(?) ‘접(接)’이 ‘接內, 接中’이라는 말을 주로 썼다)되었다. (3) 이를 제도화한 것은 수운 선생이 1862년 12월 26일(양1863.2.14. 臘日)에 접제(接制)를 공식화하면서 최초로 16명의 접주(接主)를 임명하면서부터이다. 

(4) 초창기 접의 규모는 1862년 당시에는 30호 내지 50호 정도였으나 1880년대 후반에는 50호 내지 70호 정도로 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에는, 접의 규모가 10,000인, 혹은 1,000인, 100인 또는 수십 인이라 한 경우(오하기문), 대접(大接)은 수삼백(數三百), 소접(小接)은 6~70인 정도라고 한 기록(나암수록) 등이 있다. (5) 접조직은 속지 조직(屬地組織)이 아니라 전도인(傳道人)과 수도인(受道人)의 인맥으로 이루어 진 인맥조직(人脈組織)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그리고 접(接)의 다른 특징은 동학의 신념체계를 사회화시키는 전위체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2. 포 조직 

(1)접(接)을 대신하여 포제(包制)가 등장한 것은 1884년경이다. 1884년 10월 28일 수운선생 탄신기념 제례(생신연)에 “각포(各包) 두령(頭領) 82명이 참석했다(시천교종역사)”라는 기록이 보인다. 해월 선생의 글(通諭文)에 “이쪽 포(包) 연원(淵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기고, 저쪽 포 연원이 이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고 나무라는 글도 있다.  (2) 도인 수가  100호,  200호로 늘어나면 접도 2개접, 4개접으로 늘어나게 마련이며 결국 한 연원 내에 여러 접이 공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접들을 “싼 안는다”는 뜻으로 포(包)라는 호칭이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포제로 바뀌면서 접들은 포의 하부 조직이 되었고, 포는 접의 상급조직이 되었다.

(3)초기에는 큰 접주의 이름을 따서 ‘손화중포’ ‘김개남포’ ‘김덕명포’ (전봉준은 큰 접주가 아니라 소접주였다) 등으로 부르다가 1893년 3월(癸巳)에 보은에서 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할 때 포명을 공식으로 지어 주었다. 포제(包制)를 공식화한 날짜는 1893년(癸巳) 3월 18일이라고 여겨진다.  (4) 도인 수가 늘어나자 대접주 역시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기가 어렵게 됐다. 포의 형편에 따라 업무를 보좌하는 수접주제(首接主制)와 사무를 처리하는 접사(接司)를 두게 됐다. 대접주가 사망하면 수접주가 대리하고, 수접주까지 사망하면 신사가 접주 중에서 골라 새로 임명한다. 이후 포 내부에 포를 운용하는 조직 제도로 육임제(六任制)가 생겼다(1887). 육임직은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으로 되어 있다. 

(5)육임직의 임명권은 접주(‘전봉준 접주’도 해월선생이 임명하였다)처럼 해월 선생이 시행하였다. 포의 육임직은 대접주가 천거하여 신사가 임명하게 된다. 대접주․수접주․접주․접사 등 접 계통의 임직은 북접 대도주(北接大道主)의 이름으로, 육임이나 기타 직은 북접법헌(北接法軒)의 이름으로 발행했다(오늘날 이 ‘임첩’이 여럿 전하고 있다). 

*'남북접' '남북접 대립설'에 대해서는 별도로

** 이상의 자료는 '삼암 표영삼 선생님'의 자료를 요약한 것임



이 일[천도교용어사전 / 천도교 1000문1000답]을 같이 하실 분을 기다립니다. - sichunju@hanmail.net

매거진의 이전글 동학, 더불어 삶을 가르치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