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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8. 2016

동학, 더불어 삶을 가르치다(2)

동학이야기 세 번째, 동학과 공동체 문화 

2. 한울님과 사람의 어울려 살기 


동학에서 ‘더불어 삶’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동학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한울님(하늘, 神 )과 땅과 사람의 더불어 삶을 이야기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천부경>에서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人中天地一)”고 설파한 것처럼, 이 세상 만물이 본래 하나로부터 나와 여럿으로 살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임은 역대 성인들이 누누이 가르쳐 온 바이다. 


그러나 인지의 발달이 미흡하고, 사회 제도나 관습이 그로부터 멀어지는 바람에,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밝은 가르침과 지혜가 가리어져서 오랫동안 잠복해 버렸던 그 가르침이, 동학으로 되살아났다. 동학은 한울님과 수운 선생의 만남에서 창도되었다.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守心正氣)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吾心卽汝心)’ …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논학문) 


이 말씀은 정황상 한울님과 수운 선생이 처음으로 만나는 때, 다시 말하면, 한울님이 수운 선생에게 동학의 가르침을 내리는 처음 장면이다. 

여기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내(한울님) 마음이 곧 네(수운, 사람) 마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이 말씀이 사실상 동학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생각한다. 수운(사람)의 마음이 한울님(神)의 마음과 일치하는 순간에 곧 다시 개벽이 시작되고 또 완성되는 것이며, 만사지(萬事知)가 실현되는 것이다(만사지는 동학의 21자 주문의 마지막 세 글자, 동학의 궁극적인 경지). 동학 경전의 모든 문장은 이 ‘오심즉여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혹은 부연일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장면에서 한울님은 “너를 만나서 비로소 성공했노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한울(님)이 사람과 만남으로써, 지금의 논의로 하자면 어울림으로써 각자가 서로를 완성해 간다는 뜻이다. 


“한울님의 은혜가 끝없이 넓고 커서 경신년(1860) 4월 5일에 … 꿈결인 듯 생시인 듯 처음으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얻었도다(得道). …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애써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너를 만나 성공(遇汝成功)하니 나도 성공하고 너도 마침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이루게 되니 너희 집안 운수로다. 이 말씀 들은 후에 마음 깊은 곳에서 홀로 기쁘기 그지없었네.”(용담가) 


수운 선생 역시 한울과 사람의 ‘더불어’ 존재/활동/완성을 이야기하였다. 


수운 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동학의 핵심은 21자 주문으로 귀결된다. 그 주문을 수운 선생이 직접 풀이하셨는데, 그중 시천주(侍天主)에서 주(主)-‘님’이라고 하는 것은 “(한울님을) 높여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尊而與父母同事者)”이라고 풀이하였다. 주목할 대목은 한울님을 부모님처럼(如父母)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더불어(與父母) 섬긴다는 표현이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는 것처럼 하라(事人如天, 해월)는 말씀도 있지만, 본디 수운의 표현은 한울님을 부모님(=사람)과 더불어 함께 섬기는 데 있다. 더불음(與)은 어울림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다음, '3.사람과 땅의 어울려 살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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