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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1. 2016

동학, 잊지 않음을 가르치다(1)

-영세불망 하여스라

1. 동학의 본질은 잊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잊지 않는가? 한울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먼저, 한울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다. 한울님은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울님을 천지부모(天地父母)라고 말한다.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도리이니라(天地父母永侍不忘 ... 至誠至孝 極盡極敬 人子之道理也, <해월신사법설–천지부모>).” 

한울님을 모시는 방법은 그러므로 ‘부모와 더불어 함께 섬기는 것(與父母同事)’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본래 모습=한울님의 모습을 알고, 그것을 잊지 아니하며, 지켜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세속의 삶을 탈피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라는 한울님의 본성을 깨닫고 그 결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 차원의 수행과 공동체 차원의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대 문명의 모든 폐해는 '동귀일체'를 잊어버리고, '각자위심'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수운은 가르친다. 


"또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 사람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동경대전–포덕문>)

"가련한 세상 사람 각자위심(各自爲心) 하단 말가. 경천순천(敬天順天) 하여스라." (<용담유사–권학가>)

"한울님 하신 말씀 너도 역시 사람이라 무엇을 알았으며 억조창생(億兆蒼生) 많은 사람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는 줄을 사십 평생 알았더냐."  (<용담유사–교훈가>)


수운 최제우 선생이 경신년(1860)년 4월 5일 한울님의 말씀으로 동학을 창도/득도한 이후 한울님의 말씀(이치)/가르침을 헤아려 정리한 것이 동학의 21자 주문인데, 주문은 ‘강령의 법(降靈之法)’과 ‘잊지 않는 글(不忘之詞)’로 이루어져 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論學文>)"


강령의 법은 ‘강령주문’이라고도 하고, 잊지 않는 글은 ‘본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영원’은 ‘사람의 평생’을 말하고, ‘잊지 아니한다’는 것은 ‘생각을 보존(存想)한다’는 뜻이다(不忘者 存想之意也, <論學文>). 


“시천주(天主), 조화정(造化), 만사지(萬事)”가 스물한 자 주문의 체언(體言=부뚜막의 소금)이라면 영세불망은 용언(用言=집어넣기)이다.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주로 시정지(萬事知)만을 말하는데, 영세불망이 아니면 그 체(體)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학 삼칠자 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聖人=君子)에 이르느니라.” 


동학의 진리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모심(侍)이라고 한다. 모신다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論學文>)”이로되,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은 곧 그 본체를 잊지 않는 것(不忘)이기도 하다. 


왜 잊지 말 것을 강조하는가? 

이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하며, 불의와 부정의가 넘치는 이유는 동귀일체(同歸一體)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을 망각(忘却)하고 각자위심(各自爲心)의 현실을 진실로 착각하는 무지와 물욕이 넘치기 때문이다. 한울님을 만나는 방법, 한울님을 모시는 방법은 바로 그 근본(동귀일체 한울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동학을 공부(修煉)하고자 한다면, ‘참에 돌아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해에 잠기어 마음에 잊고 잃음이 많았음(未曉歸眞之路 久沉苦海 心多忘失, <祝文>)’을 자각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 그 위력을 지금(2016) 우리는 한반도 전역, 나아가 세계적으로 목격하고, 실천하고 있다. 

'잊지 않기'는 투쟁이고 혁명이며, 개벽이고 깨달음이며, 해방이고 해탈이다.   


(다음 '2. 동학은 심학이니, 그 뜻을 잊지 말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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