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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2. 2019

덕(德)은 어디로 가는가?

-신성한 말 6



덕분, 고맙, thanks to 


덕분(德分․布德)은 천덕(天德)을 나누는 일임은 자명(自明)해졌다. 덕(德․德分.報施.報恩.報答)이라는 한자어의 순우리말이 있을까? 현재까지는 “불행히도 없음. 너무 일찍 한자어가 들어와서 이 개념의 순우리말이 일찍 소멸한 듯. 16세기에도 이 단어는 그저 ‘큰 덕’ 혹은 ‘클 덕’ 정도로 번역되어서 ‘크다’는 개념 정도로만 수렴되었”다고 한다(우리나라 최고 반열의 국어학자-김양진 학형- 도움).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덕분에는 영어로 ‘thanks to’로 번역된다. 그 마음은 동서 구분이 없으나, 그 마음의 연원을 어디에 두느냐는 다르다. 그런데, thanks는 ‘고맙다’는 뜻도 있고, ‘덕분’에는 ‘고마움’의 마음이 들었으니, 아마도 고맙다라는 말이 순우리말 중에서 덕분(에)에 가장 가깝거나 어쩌면 본디 그런 뜻으로 쓰였음직하다. 이런 생각을 담아 다시 학형에게 질문을 했다. 


얼마 후 다시 답변이 왔다; "그런데, 고맙다는 고마의 타동사형 '고마하다'(누군가를 존중하다. 혹은 누군가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다)의 형용사형 '고마합다'(누군가가 존중할/존중받을 상태이다)의 준말이지. 음 그런 점에서 '고맙다'는 어원적으로 볼 때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매우 존중해 주려는 의사가 담긴 표현이라 할 수 있음. ^^"

옳다구나! 신성하다! 고맙다는 오늘날 '감사'의 뜻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이 담겨 있다니! 알고 보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고마'는 신성(神性)을 뜻하기 때문이다(아래, '고맙다는 어디에서 왔을까' 단락 참조. 위 풀이에서 '누군가를 존중하다'는 '신(한울님)을 공경하다'로 이해하면 더 구체적이다).


고맙네, 고맙다, 고마워서, 고마워라! 


실제로, 고맙다라는 말은 오늘날에는 상대방의 호의 또는 배려에 대하여 내 마음을 표현하는 말(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로 주로 쓰이지만, 그보다 더 넓고 깊은 용법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새해 첫날 마을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가서 덕담을 나누는 중에, 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예컨대, “제가 지난해에 취직을 해서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해 드리면 어른은 “그랬는가? 참 고맙네!”라고 화답하셨다. 요즘에야, 대개 “그래? 그것 참 축하하네! 잘 되었네!”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더 정감어리고 깊은 말은 “고맙다!”이다.

이 말은 새해 덕담 자리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길을 가다가 동네 어르신을 만나 인사를 여쭈면 그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다. “자네, 듣자니, 어머니께 좋은 겨울옷을 사 드렸다고 하대. 참 고맙네!”

또, 이 말은 어른들이 아랫사람에게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끼리도[나는 경상도 남해 사람이고, 형님이 그 친구들끼리 만나면 이런 용법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동네에서도 이렇게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이 말을 쓴다. 말하자면, 이렇게. “아이구, 이 문디*, 집을 샀다니 참 고맙네!” 

*문디 – 문둥이; 친구를 허물없이 친하게 부르는 말! ‘우리 형님-박덕수-’은 연전에 환원하셨다!


남 좋은 일을 고마워하는 심보(心寶)

네게 고마운 까닭은, 내가 잘했기 때문에 네가 잘되어서이고, 내가 잘했다는 걸 네 성공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본래 의미(감사와 존중)과 용법에서, 다음의 상상이 더해 나온다. 


이렇게 말하는 마음을 헤아려 이 말의 뜻을 풀어 보면, 우선은 ‘좋은 일/상황’을 맞이한 사람 또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그런 소식을 나에게 알려줘서/들려줘서 내 마음이 행복하므로 고맙다는 뜻이다. 세상일을 이렇게 바라보고,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고맙지 않은 일/사람은 없다(cf. 신성한 말 3 – 덕분에와 때문에). 그것이 실재(實在)요 실제(實際)임을 또한 번 알게 된다. 


다음으로는, 그 좋은 일을 당한 사람(좋은 옷을 받은 어머니, 직장에 취직한 상대방)이 곧 나와 다르지 않고, 그에게 좋은 일은 나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고맙다는 뜻이다. 이 용법에서는 이 세상 만물-만사-만인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마음이 드러난다. 동학에서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 인오동포(人吾同胞-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한배-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요), 물오동포(物吾同胞-이 세상 만물이 나와 한배-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요)라고 하였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인위(人僞)․허위(虛僞)․작위(作爲)가 아니라 자연(自然)․천연(天然).순연(純然)이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맙네!'라고 말하는 대상이 상대방(그 말/소식/성과를 이룬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성과[德]를 얻을 수 있도록 나누어준[分] 하늘에 대하여 하는 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너에게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 준 하늘님(한울님, 부처님, 天)께 참으로 고마운 일이네!' 또는 '하늘님 고맙습니다!'가 본래의 용법이고, 그것이 세속화되어 '고맙네'라는, 인간 대 인간의 대화로 귀결되었다는 말이다. 


네 번째는,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이 본래의 내(=人乃天=한울)가 베풀어 준 덕(德)인데, 그것이 잘못 전달되지 않고, 또 전달되다가 누락되지 않고 제대로 전해졌으니 고맙다는 뜻이요, 내 선물을 받고 마음으로 기쁘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다는 뜻이요, 또 기쁜 마음을 내 몸(肉身)에만 담아 두지 않고 두루 세상에 알려[宣布]서 내(=人乃天=한울) 공덕(功德)을 널리 알려(布德) 주어서 고맙다는 뜻이다. 


이 마음을 동학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라고 표현하였다. 본디 이 말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도할 때에 수운 선생에게 ‘말씀’으로 다가온 한울님이 “오만년 동안이나 노력했던 일이 허사로 돌아갈 뻔 했는데[勞而無功] 너를 만나 성공하였다”면서 한 말씀이다. 한울님이 공을 이루는 것은 ‘사람(만물)’를 통해서 그리하는 것인데, ‘너’가 취직을 하고 ‘너’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내(=天 =한울)가 내 공을 이루는 것이니, 고맙기 그지없다는 뜻이다. 


고맙다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고마’는 ‘위[上]·큼/한[大]·신[神]·신성(神聖)을 뜻하는 옛말인 감·검·금에서 온 말이다. 감·검·금의 어간은 '검다'와도 이어지는데, 이때 '검다'는 단지 색깔이 아니라, '현(玄=검을현)'의 뜻이다. 현빈(玄牝)은 노자 도덕경에서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단군임금이라고 할 때 임금(닛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어의 力ミ(가미)·力ム(가무), 곰[熊]·신(神)을 뜻하는 아이누어(語)의 ’가무이(Kamui)‘ 등은 모두 비슷한 뜻의 말인 듯하며, 곰에서 유래하였다. 이 ’곰‘의 고어는 고마이며 북방민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테미즘에서 비롯되었다. 백제의 고마(곰)나루[熊津]·고마성(固麻城:熊津城)도 역시 같은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 서책(書册)에서는 한국민족을 맥(貊)·예맥(濊貊)·개마(蓋馬)라고 불렀고, 일본에서는 고려·고구려를 コマ(고마)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마·개마를 음역(音譯)·훈독(訓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마는 한국민족 원래의 종족명이었으나, 나중에는 인명(人名)·강명(江名)·산명(山名) 등에 전용되었다. 앞에서 열거한 웅·맥은 서로 비슷한 동물인 것 같으며, 한국민족은 처음에는 맥(貊, 산돼지)을, 후대에는 웅(熊)을 한국어로 개마·고마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네이버백과사전 두산백과의 '고마' 항을 인용하고 일부 수정보완였음


주목할 것은 ‘고마’가 본래 신(神)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는 점이다. 앞서서 덕[고마]은 곧 천(天)이라고 말했는데, 그 근거를 여기서 일부나마 찾은 셈이다. 또 “토테미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단군신화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덕은 어디로 가는가?

1977년 지구를 떠난 보이저1호는 35년간 178억㎞를 날아 2012년에 "태양계 밖에 이르렀다." 그는 밖으로 가면서, 끊임없이 돌아오는 중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일찍이 수운 선생은 ‘도(東學)을 배반하는 사람에게도 한울님이 강림하시는 까닭’을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순의 세상에는 백성이 다 요순같이 되었고 이 세상 운수는 세상과 같이 돌아가는지라 해가 되고 덕이 되는 것은 한울님께 있는 것이요 나에게 있지 아니하니라. 낱낱이 마음속에 헤아려 본즉 해가 그 몸에 미칠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런 사람이 복을 누리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해서는 안 되니, 그대가 물을 바도 아니요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니라.”(동경대전, 논학문) 

내가 베푸는 덕(德.福.恩惠.恩德), 내가 입는 덕(德.福.恩惠.恩德)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내 것’이 아니라, ‘한울님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울님의 덕은 그 자체로는 선덕(善德)도 아니고 악덕(惡德)도 아니다. 천덕을 나누어 받는 그릇[身言書判]이 선하면 선덕으로 드러나고, 악하면 악덕으로 드러난다. 


덕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게 된다. 덕은 한울이 화하여 난 것이고, 그 덕이 이 세상을 두루 이루고 있으므로, 덕은 이 세상을 두루 돌다가, 한울로 가는 것이다. 덕을 이루고 누리며 살지 덕을 버리며 살지, 내 말과 내 마음과 내 행동이 좌우할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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