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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4. 2019

덕 이야기, 이야기로 덕분하다

- 신성한 말 7

이중과세의 계절 


덕담(德談)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연말연시(年末年始)에 실컷 새해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설날에는 또 다시 ‘새해 복’을 주고받는 말들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타고 난무할 것이다. 이중과세(二重過歲; 새해맞이와 설) 문제는 지난 1세기 남짓 기간에 걸쳐 우리 사회를 관통한 세계사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래된 삶(설-음력)의 양식이 새로 들어온, 그러나 세계 보편(?)이 된 기준과 충돌하면서 대부분 소멸해 간 반면, 왜소해지고 왜곡되는 형태로나마 병존하면서 그 생명력을 근근히, 때로는 구차하게 이어가는 사례이다.


덕담의 풍경 


덕담은 세배를 주고받는 자리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새해를 앞두거나 또 맞이하며 만나는 지인들과도 주고받는다. 요즘은 대개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건강하세요!”라고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건 잘못된 세배 인사라는 게 알려져서 바로잡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아랫사람은 “세배 올립니다/드립니다”라고 고하거나 “과세 평안하셨습니까?” 하고 여쭙고, 이런 인사를 받은 어른들이 “새해 소원 성취하시게!” “새해 사업 번창하시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게!”라고 빌어주는 것이 바른 예법이라는 말이다. 어른에게 새해 복을 ‘받으시’고, ‘건강하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어른에게 ‘수고하세요!’라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바로 그 맥락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덕담, 말에 깃든 영성(靈性)


그러나 어느 경우로 하든, 요즘의 새해인사가 새해덕담인 듯도 하지만, 이는 덕담의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 왜소/왜곡된 모습이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할 때 친척친지나 지인들에게 잘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새해에도 건강하세요’라는 말도 비는 뜻이 있어서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 자체에 신성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빠진 말이어서 맹숭맹숭하다. 


본래 덕담은 언령관념(言靈觀念; 말에는 영적인 힘이 있어서 말한 대로 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생겨난 풍속이다. 그래서 무당도 의뢰인의 복을 점지해 주고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장담하는 덕담을 한다. 이런 이유로 제대로 된 덕담은 이런 식이 제격이다; “올해 결혼한다죠?/했다죠?” “올해 부자 된다죠?/되었다죠?” “올해 합격했다죠?/한다죠?” “올해 승진하신다죠?” “올해 며느리를 맞이하신다죠?” “올해도 건강하게 보내신다죠?”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덕담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혹은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결정된 것처럼 말한다. 직접 만난 사람에게는 말로 하지만, 먼 곳에 있는 이에게는 편지를 보내서라도 덕담을 한다. 그것이 오늘날 연하장의 유래이다. 최남선도 덕담의 특장은 그렇게 되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되었다니 고맙습니다.’라고 단정하는 점이라고 하였다.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 등 참조]


덕담의 복권 


오늘날은 진학(대입), 결혼, 출산, 취업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친척이라 하더라도 물어보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세상이 되었다. 그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당사자[主體]를 배려하는 인간[人格]] 존중 문화가 퍼지는 과정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러한 경향과 문화들이 쌓일수록 인간을 개별화하고 파편화하여 결국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을 조장하고 고무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도 사실이다(인간 세상에 초심과 말로가 같지 않은 일이 비일비재한 까닭은 변화(變化)가 변질(變質)이 되어 버리는 임계점을 곧잘 넘어서는 탓이다). 덕담의 풍속과 그 속에 깃든 믿음(말의 힘)은 이미 흘러간 냇물(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로 치부할 것인가, 사대강의 생태계를 복원하듯 복원해야 할 생명문화로 볼 것인가?


청참과 가짜뉴스 대처법 


덕담 풍속과 더불어 알아둘 만한 것이 ‘청참(聽讖)’이다. “새해 첫 새벽 거리에 나가서 방향도 없이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물건의 소리이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말)로써 그 해의 신수를 점치는 것을 청참이라 하는데, 덕담은 일종의 청참의 의미가 있다. 세수(歲首)에 처음 듣는 소리로 일 년의 신수를 점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청참법(聽讖法)이 생겼고, 만나는 사람끼리, 집안끼리 새해 첫 인사에 덕담을 주고받게 된 것이다.”([네이버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일부 수정함])


이처럼 '듣는 것'은 신성하다. 새해의 첫 소리는 유달리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여겨 이처럼 주목했지만, 어찌 유독히 새해 첫소리만이 청참이 되랴! 일찍이 수운 선생은 "성현의 가르침이 이불청(耳不聽) 음성(淫聲)하며 목불시(目不視) 악색(惡色)이라"고 하였다. 들려도 듣지 아니하고, 보여도 보지 아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공부요, 수양이다.  


세상에 덕담보다 악담(惡談)이 넘친다. 실제 세계(사회)는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전해지는 소식들은 귀를 닫고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차고 넘친다. 어찌할 것인가. 하나는 기산영수(箕山潁水)의 길이다. 중국 옛날이야기에 허유(許由)라는 은자(隱者)는 요임금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말을 전해 오자,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천(潁川)에 나아가 귀를 씻고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소보(巢父)라는 은자는 소를 몰고 가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까닭을 듣고는 그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더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쓴 『고사전(高士傳)』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네이버백과사전 참조]. 


다음은 ‘알릴레오’의 길이다. 알릴레오는 ‘우리 사회 정책현안에 대한 팩트와 해석의 차이를 좁히는 시사지식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올해 1월 4일부터 시작한 팟캐스트 방송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말한다. 기산영수가 허허실실의 전략을 취한다면 알릴레오는 정면돌파의 전략을 택한 셈이다. 알릴레오보다 한발 앞서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홍준표의 홍카콜라'는 물론 종편이나 그 밖의 유투브 1인방송 등을 통해 유포되는 ‘가짜뉴스’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팩트 – 진실’을 알리는 것은 소중한 태도요, 우리 사회를 좀더 행복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인 처방이다. 이것이 대증처방을 넘어 덕담의 일상화, 덕담의 시각화를 지향하는 데까지로 나아가면 이 사회가 한결 맑고 새롭고 간소하며 깨끗해지는[淸新簡潔] 데 이바지할 터이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이다 

오늘날 덕담에 해당하는 '새해인사'는 친척친지나 오래된 지인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생활로 얽키고설킨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건네고, 때로는 불특정 다수(SNS)를 향해 건네게 되다보니, 각 개인의 형편을 헤아려 맞춤형 덕담을 내놓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숫가락 숫자까지 속속들이 드러내놓고 오가는 '사이'가 보편적인 '인간관계'였다면, 오늘날은 가급적 '개인사'는 깊이 알려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관계이고 보니, 두루뭉술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대박 나세요!"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예전에 널리 쓰던 '덕담'을 되살리는 일은 단지 잊혀진 인사법 문장을 되살려 쓰겠다는 정도로는 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부터 '말의 신성함'이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악담-가짜뉴스를 소멸시키는 원대한 방법은 덕담을 주고받는 마음과 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세상이 거칠어지고 거짓(假象/假相/假想)이 넘쳐서 말이 거칠어지고 가짜뉴스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말이 거칠어지고 거짓이 넘쳐 세상이 거칠어지고 가짜뉴스가 넘치는 법이다. 내가 먹은 것이 내가 되는 것처럼, 내가 말한 것이 내가 된다. 악담이 덕담을 구축(驅逐)하게 할지, 덕담이 악담을 구축하게 할지는 내(하늘/한울/신)가 정한다. 

덕담을 제대로 하면, 내가 곧 한울이다. 정성껏 덕담을 준비할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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