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15. 2019

천지현황

-신성한 말 8

허무라는 고을에 전설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의 '한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훈장 어른은 마을 출신은 아니었지만, 언제 마을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는지라

이 마을 사람들조차 그가 타지인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나이조차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더불어 사는 상노인이었다.


입학식 날은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게' 관례였으나

웬일인지 훈장 어른은 에누리 없이 공부를 시작하셨다.

천. 자. 문!

훈장 어른은 일절 훈시가 없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내가 외는 말을 따라 하렸다!"고 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하늘 천 따 지!"를 외웠다.


"하늘 천 따 지!"  


'한 아이'는 영롱한 목소리를 그 말을 따라 읽었다.

훈장 어른은 다시 가타부타 군말 없이 다음 글자를 읽어 내렸다. 


"검을 현 누루 황!"


한 아이도 따라 읽었다. 


"검을 현 누루 황!"


그다음, 훈장 어른이 다음 구절 '우주홍황'을 읽으려던 바로 그때! 

'한 아이'가 눈을 감은 채 좌우로 흔들거리던 훈장 어른을 불렀다.  


"훈장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훈장 어른은 예상치 못한 소리에 눈을 뜨고 '한 아이'를 쳐다보았다.


한 아이는


"천지현황, 땅이 누른 것은 이해하겠사오나, 하늘을 검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훈장 어른은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차분히, 하늘이 검은 까닭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훈장 어른의 답변이 그치면, 한 아이의 질문이 또 이어졌다.

훈장 어른의 답변이 열 마디쯤이면, 한 아이의 질문은 스무 마디로 이어졌다.


질문과 답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천지현황을 읽고 나서 시작된 질문과 답변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질문과 답변은 


봄꽃이 피고지고, 여름이 왔다 가고, 가을이 익어 첫서리가 내리도록, 

겨울이 오고 깊디 깊도록 계속되었다.


이윽고, 


다시, 봄이 왔다.


이제는 '우주홍황'을 이야기하려나 싶은 그 어디메쯤의 어느 날 아침 

훈장 어른은 '한 아이'의 질문을 듣더니, 

가만히 '한 아이'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미소를 띄었다.


"....."


가만히 그 미소를 쳐다보던 '한 아이'의 눈에서, 

가만히 눈물이 흘러 내렸다. 


우주가 한 번 돌고. 


'한 아이'는 가만히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 나와, 서당을 벗어났다. 


한 아이는 그 다시 봄의 뒷자락에 

전설의 마을을 떠나 허무의 고을에서 무위이화의 세계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길 밖에 길이 있었다. 


(계속)   


*어려서,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된 아버지로부터 들은 동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원전을 알고 계신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sichunju@hanmail.net로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덕 이야기, 이야기로 덕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