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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1. 2019

덕(德)이란 무엇인가?

신성한 말 5


덕을 알고, 도를 느끼고


덕은 도와 짝을 이룬다.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도는 덕을 덮어주는 하늘이요, 덕은 도를 실어주는 땅이다. 도와 덕 사이 너머에 만물이 난다/산다[生]. 도와 덕을 아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도통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다. 수도(修道/守道) 수덕(修德/守德)이 지도(知道/至道) 지덕(知德/至德)이다. 도와 덕을 다시 ‘말하자면’ 1+1=2는 도요, 하나를 먹고 또 하나를 먹으면 배부른 것이 덕이다. 


덕과 도의 관계를 수운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은 본래 비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직 밝히는 것이 도니라. 덕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믿음에 있고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운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하나 그러하고 먼 듯하나 멀지 아니하니라.(心兮本虛 應物無迹 心修來而知德 德惟明而是道 在德不在於人 在信不在於工 在近不在於遠 在誠不在於求 不然而其然 似遠而非遠" (동경대전, 탄도유심금)"


덕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설명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운 선생도 그렇다고 고백하셨다. 수운 선생은 덕이 있는 바를 알고자 하면(덕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우선 “내 몸이 화해 난 것을 헤아리라.”(「전팔절」) 하고, 다음으로는 “말하고자 하나 넓어서 말하기 어려우니라.”(「후팔절」)라고 말씀하신다. 한번은 말하고(其言), 한번은 말하지 않았다(不言).  



덕분에 내가 있다


우선 말한 것을 좇아가 보자. ‘내 몸이 화해난 것’을 헤아리는 법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뒤에 뒤 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불연기연」)라는 말이 실마리이다. 그러나 내 몸은 단지 내 몸, 가족,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 몸이 화해나는 것을 헤아리다 보면, 결국 세상으로까지 나아간다. “오는 세상에 견주면 이치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 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 불연기연의 이치가 그러하듯, 아는 바로 말하면 그 이치가 멀지 않다. 나는 한울님으로부터 화해 나와/낳았으니 덕분(德分)이요, 나는 덕분에 내가 되었다. 덕은 나를 나게 하고(生), 세상을 낳은[産, 生物之心] 것, 생생지덕(生生之德)이요, 천지부모의 은덕(恩德)이다.


세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오늘날, ‘진보/진화한 지식 = 퇴화된 덕성/감성/영성’으로는 덕 그 자체인 세상을 헤아리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이 지구를 세상이라 하더라도, 도무지 끝이 없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올 수는 있어도, 세상에는 어린이만 사는 게 아니고, 어른도 살고 개미도 살고, 착한 사람도 살고, 나쁜 사람도 산다. 지구는 태양계의 덕분이요, 태양계는 은하계의, 은하계는 우리 우주의, 우리 우주는 다중 우주의 덕분이다.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다. 다시 한 걸음 넘어/나아가야 한다.

떨림에서 울림까지


지금껏 인간이 과학적으로 도달한 세상의 크기[時空]는 ‘떨림’에서부터 ‘울림’까지이다. 떨림과 울림*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초이자 최후(시간)의, 최소이자 최대(공간)의 존재 형태이다(끈이론). 물리학자는 ‘떨림’과 ‘울림’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지 못한 듯하지만—책의 목차를 보고 파악하건대,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울림을 떨림의 동어반복으로 사용하였지만—‘떨림’은 도(道)이며 ‘울림’은 덕(德)이다. 떨림이 울림을 낳고, 울림이 떨림을 낳는다(우로보로스). 떨림은 무극이요, 울림은 태극이다. 떨림은 카오스이며, 울림은 코스모스이다. 떨림이 울림을 낳으면 울림이 입자(양자) 되고, 양자가 세상을 이룬다.

*cf. 김상욱, <<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동아시아, 2018.  


불언기언(不言其言)


다음, 말하지 않은 것을 따라가 보자. 덕에 대하여, 백 마디 말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덕(德)의 바다에 조약돌을 던진다고 해서 바다가 넘칠 리도 없고, 한 그릇 청수를 덜어 낸다해서 마를 리가 없다. 덕에 대하여 이야기해 본들, 이야기해질 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수운 선생도 “말하고자 하나 넓어서 말하기 어려우니라[難言].”라고 했다. 말하기 어려우므로 말하지 않았다. 불언(不言)이다. 그러나 불언이 곧 기언(其言)이다(cf. 不然其然). ∞=0, 무한이 곧 무요, 무언(無言)이 곧 극언(極言)이다.


해월도, 의암도 말하지 않았다


해월 선생은 “웬만큼 아는 것을 가지고 도의 근본을 알지도 못하면서 문득 ‘내가 아노라’ 하지마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좋게 한번 웃노라.”(吾不言而良發一笑, 양해월신사법설, 「독공(篤工)」) 하셨다. 의암 선생은 “모든 교인을 대하여 험고를 많이 말하고, 안락을 말하지 아니 하노라.”라 하셨다. 해월 선생은 좋게 한 번 웃고 말았고, 의암 선생은 안락을 말하지 않는 대신 험고를 자주 말하였다. 도의 근본과 안락은 말로써, 다시 말해서 의지나 이성으로써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이미 더불어 있는 미분(未分)이어서 불언(不言)이요 불언으로써 기언(其言)이다. 그 불언의 기언을 듣는 것이 공부요, 수도이다. 정좌존심도 공부요 수도이고, 그 떨림을 재현하는 것, 덕분과 포덕이 공부요 수도이다.


하늘은 곧 덕이다


수운 선생은 주문 21자의 뜻을 풀어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오직 천(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기 어려워서 말하지 못한 것이다. 말하지 않은/못한 것은 덕이 곧 천이요 천이 곧 덕이어서이며, 덕을 말하고자 하나 넓어서 말하기 어렵다고 한 그 까닭 그대로다. 그 천은 지에 대한 천, 인에 대한 천이 아니라 천지인을 아우른 천이다. 오묘할 것도 없고 우연의 일치도 아니다. 그러므로 수도하여 도통하는 길은 수덕하고 지덕하는 데 있고, 수덕하고 지덕하는 것은 오직 포덕하고 덕분하는 데 있다. 오로지 그러하다. 말만이 말이 아니다, 닦는 것, 나누는 것이 말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이 곧 말이요, 말이 곧 하늘이다. 하늘이 곧 말이면, 사람이 곧 말이니, 말을 가려 할 일이다. 말씨, 말본새, 말버릇도 예사로울 수 없다.


덕분(德分)은 포덕(布德)이며, 하늘을 이루는 길이요 진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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