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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8. 2020

호모커넥투스와 복잡계의 진화

호모커넥투스 이야기 5

이 글은 최민자 지음, <호모커넥투스: 초연결 세계와 신인류의 연금술적 공생>의 서문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책은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세계관인 ‘초연결 세계’에서 ‘초-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커넥투스(HOMO-CONNECTUS)’를 이야기한다. 즉 호모커넥투스는 지금-이후 시대에 새로이 인식된 세계상, 새로운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신조어(新造語)이다. 호모커넥투스는 인간과 세계의 초연결성이 단지 가시적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데로 이어진 이 우주의 근원적 양태로서, 하나와 전체는 불가분의 전체성 속에 이어져 있음, 곧 전체로서의 생명을 발견하게 한다. 사람-사람, 사람-만물, 만물-만물이 상호 연결된 초연결 세계의 운동 원리로서 창조, 융합, 연결, 확장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다가온 “호모커넥투스 시대”를 살아가는 뉴노멀의 초지혜(超-智惠), 자유의지의 평화적 확장 가능성을 열어 준다. 


실재를 향한 현대 과학의 여정 


물질의 구조와 정신의 구조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원자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관찰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관찰된 현상의 특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자물리학에서 관찰된 현상은 관찰과 측정 과정 사이의 상관관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영성과 물성이 하나임을 인식하는 주체는 마음인 까닭에 영성과 물성을 가교하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우주의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비국소적 영역, 즉 궁극적인 ‘영(Spirit)’의 영역은 국소적 영역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감각과 이성의 영역을 포괄하면서 초월한다. 


비국소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달리 ‘비인과적 관련성(매개체가 없음)’을 가지며 그러한 관련성은 감소되지 않는다. 또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즉각적이다. 이 비국소적 영역에서 세상의 모든 일이 조직되고 동시에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의 근원이 된다.


비국소성 또는 비분리성은 양자적 실재의 본질이며, 이는 곧 우리 참자아의 본질이다. 양자역학의 ‘비국소성(nonlocality)’은 곧 영성(spirituality)이다. 모든 것은 ‘절대영(Spirit)’의 자기현현이다. 극도로 분절되어 있는 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한 전일적 양태로 이들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비전이다. 


존재의 세 차원인 물질계, 양자계 그리고 비국소적 영역은 곧 우리 의식의 세 차원으로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포괄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진화적 홀라키(evolutionary holarchy)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앎의 세 양태, 즉 육의 눈(肉眼), 마음(정신)의 눈(心眼), 영의 눈(靈眼)과 상호 조응한다. 과학혁명은 패러다임의 변환과 연계되어 있고 패러다임 변환은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려 의식의 진화를 위한 최적 조건의 창출과 관계된다. 


동서양의 숱한 지성들이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의 원리 규명에 천착한 것은 그러한 원리를 자각할 수 있을 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지혜가 발휘되어 자유의지와 필연이 하나가 되는 조화로운 세상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호모커넥투스와 복잡계의 진화 


서구 전통의 뿌리 깊은 이원론에 입각한 물질주의 과학은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우주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왜곡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생명[神·靈·天]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생명은 육체라는 물질에 귀속된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영성[靈] 그 자체다.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물질주의 과학의 주도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성의 과학적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물질주의 이론에서는 마음이 뇌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낡은 물질주의 이데올로기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연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확대하고, 우주의 핵심 구조의 부분으로 마음과 영(靈)의 중요성을 재발견함으로써 포스트 물질주의 패러다임을 수용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은 연민, 존경, 평화와 같은 긍정적인 가치를 키우며 우리 자신과 자연 사이의 깊은 연결을 강조한다.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적 전개는 생명 자체에 내재된 고유한 성향인 창조성에 의해 추동되어, 세 가지 주요 진화의 길―유전자의 무작위 돌연변이, DNA 재조합(유전자 거래), 공생(symbiosis)―을 통해 표현되고 자연선택에 의해 연마되어 끊임없이 증가하는 다양성의 형태로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단순하고 원시적인 원핵세포에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복잡하고 정교한 진핵세포로의 진화 메커니즘은 ‘공생’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의 몸은 수많은 세포들이 공생한 결과물이며, 세포 역시 고대 세균들이 공생 진화의 길을 선택하면서 형성된 것이고, 우리 역시 공생자 행성에 살고 있는 공생자들이다. 진화의 시스템적 관점은 유기체와 환경이 경쟁과 협력, 창조와 상호 적응을 통해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를 지향한다. 생명의 자기조직화 과정은 진화의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구조 및 행동 양식의 창발이라는 점에서 진화는 곧 창조적 진화이다.


하나가 왜, 어떻게 여럿으로 나타나는가 


영성[眞如, 본체, 理]인 동시에 물성[生滅, 작용, 氣]으로 나타나는 참자아[一心, 靈·神·天]의 이중성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로 나타나는 양자계(quantum system)의 역설적 존재성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참자아의 이중성은 선악과 시비를 체험하기 위한 방편일 뿐, 그것의 진실은 이중성의 초월에 있다. 이러한 영성과 물성의 변증법적 리듬이 조성한 긴장감을 통해 영적 진화를 위한 학습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처럼 ‘하나이면서 둘(一而二)이고둘이면서 하나(二而一)’인 이기(理氣)의 묘합 구조가 보여주는 완전한 연결성과 소통성 그리고 능동성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러한 참자아의 이중성을 깨닫게 되면 그 어떤 환영(maya)이나 슬픔도 없으며 죽음의 덫에 걸리는 일도 없다. 


우주의 진행 방향이 영적 진화(spiritual evolution 또는 의식의 진화)인 것은, 우주의 본질인 생명 자체에 합목적적으로 자기조직화하는 칩―‘우주 지성’이라고도 부르는―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진화의 지향성을 갖는 생명이라는 피륙의 한 올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영적 진화의 방향에서 이탈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게 모듈되어 있는 것이다.


영원성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장대한 놀이의 미학은 놀이의 ‘규칙(rule)’에 있다. 그 규칙은 만물이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니며 그 어떤 것도 도구적 위치에 있지 않고 대등한 참여자로서 영원한 우주적 무도(cosmic dance)에 참여하는 것이다. ‘생명의 놀이’에서는 죽음조차도 진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생명이 단순히 개체화된 물질적 생명체가 아니라 영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진정한 통찰이 일어날 수 없다. 


비분리성·비이원성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 대한 통찰 없이 호모커넥투스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핵심이 빠진 껍데기만 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류 사회의 진화라는 것도 문명의 외피만 더듬는 외적·기술적 수준에서 조명하게 된다. 희생제는 인간과 하늘[참자아]과의 가능한 연계를 만드는 상징적인 제전이다. 오로지 이 육체가 자기라는 에고(ego)의 죽음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동시에, 사랑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전한 희생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가성 없는 순수한 희생제는 우주의 본질인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개체화 의식 속에서는 생명을 파악할 길이 없으며 또한 진화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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