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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30. 2020

'코로나 인문학' - 'K-인문학의 시작'

인문학 - 정답(正答)이 아닌 정문(正問), 성공(成功) 이전의 성찰(省察)

'코로나19'는 그 어떤 영역보다, '인문학적인' 주제이다. 오늘도 방역 일선에서 애쓰고 있는 의료진과 당국자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비롯하여, 생활상의 불편과 고난을 감내하는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을 성찰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 작업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어느날 갑자기, 사회(인간들의 집합으로서) 바깥에서 인간사회로 틈입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양산한 새로운 지구 환경(기상이변, 야생동식물 서식지 파괴 등) 속에서 드디어 인간에게 그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비인간 생물-비생물'의 매개체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매개체이고, 그런 점에서 지극히 '인문학적인' 고찰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코로나 이후'를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코로나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든, 반대로 의식적으로 코로나를 무시하고 '비코로나 담론'을 전개하든 간에, 모든 담론들은 '다소간' '코로나 인문학'일 수밖에 없다. "범-코로나-인문학"과 "탈/초-코로나 인문학" "사이-너머'가 온통 '코로나 인문학'인 셈이다. 무엇보다 코로나 19에 즈음하여 우리 삶의 기본적인 방식이 된 "사회적 거리두기 - 생활속 거리두기"야말로 '인문학적'이다. '질문과 성찰'에 요구되는 것이 '거리'이고 보면, 인문학적 태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 유지"이다. 그러므로, 코로나19는 그 자체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 전 인류적인 범위에서 일거에, 일시에, 일제히 우리(인류와 세계)를 '인문학적인 세기-미래-시대-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차원머신'인 셈이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성공으로 가는 정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질문의 근육'을 강화시켜 주고, "성공을 만끽"하는 법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순간에도 '성찰'의 태도를 잃지 않는, 성공과 승리의 순간에도 자만에 빠지지 않고  패배와 실패의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지속하게하는 회복력, '건강한 인성'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의 특질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진 - 성공과 승리를 향한 욕망이 어느 한계를 벗어난 '인문학'은 그때부터 '비(非) 인문학'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만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승리"와 "성공"의 방법, 요령, 원리를 얼마든지 얻을 수는 있다. 그것을 취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몰되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은 '비 인문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에는 얼마간 이러한 '비 인문학적인 태도와 욕망'이 개재(介在)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성공-승리 편향'으로부터 '화들짝' 깨어나게 하고, 다시금 '인문학적인 성찰'의 길을 걷게 한 것이다. 그것이 "코로나 인문학"의 첫 번째(=최초=최고) 가치이다.


코로나 (이후) 인문학은 - 천지인삼재, 경천경인경물-삼경의 인문학

인문학의 초창기(희랍시대 ~ 르네상스)에 인문학은 '신적인 것으로부터 자주적이며,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독립적인, 순수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거칠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학이 '근대철학'을 낳고, 그것이 '근대문명'을 낳았다고 '도식화'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 인문학'은 '탈 인문학'적이다. 왜냐하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새로운 인간 이해는, 인간은 비(非)인간 영역[동-식물-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비(非)생물=물질 영역, 나아가 138억광년 떨어진 빅뱅의 원점까지]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동안 '근대문명' 세계에서 터부시되어 왔던, 영성(靈性 = 눈에 보이지 않으며, 비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영역 또한 '비실체적 실체'로서 우리의 삶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한국민족에게 핵심적인 세계인식의 패러다임인 "천-지-인 삼재"의 세계관을 다시금 활성화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천지인 삼재'의 '다시개벽' 버전은 "경천-경인-경물"이라는 "삼경사상"으로 나타난다. 천지인삼재든, 경천경인경물의 삼경이든 그동안(그래봐야 사실은 - 근대적 사고방식에 오염된 근세 200년 전후의 기간) 인간을 중심에 두고 '천'과 '지'를 배치하는 형식이었다. 즉 사람이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아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인문학 시대의 전개는 그러한 착각과 착시, 오해와 오인을 반성하고 각성하여, 천-지-인이 모두 주체로서 자기 권리와 자기 의무, 자기 주장과 자기 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코로나19 사태는 '코로나19-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발화(發話)하는 것이다. 발화하는  '비'인간 주체의  등장이다. 사물인터넷의 일반화로 이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랫동안 가부장주의 - 세대주로서의 권력에 취해 있던 남성이 양성평등의 시대에 적응해야 하듯이) 천-지-인 동등권 시대에 적응하는 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지위는 바이러스 수준으로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든 하늘이든 사람이든 모두가 '하늘만큼 땅만큼'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근대 시기,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하늘"을 "인간"의 지위로 끌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늘"의 지위로 격상시킨 것과 같다.  [이때 '인내천'이나 그 원형으로서의 시천주(侍天主)를 '인간중심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이력이 있으나, 인내천의 참된 의미는 '(개)인(격) 중심' = '근대주의'의 콩깍지를 벗겨내고 '(천)인(격) 중심' = '탈 근대 / 초 근대 / 포월(包越) 근대'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때가 도래하였다.]  


비참한 속에서도 천격(天格)을 지키는 몸, 절망 중에도 희망을 기억하는 마음

인문학이 '승리와 성공'의 열쇠를 우리에게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코로나)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러 주는가? 질문하는 힘(근육)과 성찰의 인성을 길러준다는 것은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이 전지구적-전인류적 재난상황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과 거두어야 하는 결실 - 우리가 거두고 비축하여, 앞으로 한동안 걸어가야 할 이 재난에 처한 지구호에서의 삶=생존을 위한 비상식량 - 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이전의 '인문학' 역시 우리(인류)에게 베풀었던 덕목이기도 한바, 우리가 어떠한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하늘같은 존재로서의) 천격(天格)을 잃지 않는 몸-사회의 힘과 어떠한 절망적 상황에서라도 희망의 시기(과거든 미래든)를 기억하는 마음의 힘이다. 나 개인 스스로도 그러하고 우리가 가족-이웃-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서로의 허물을 책하되 용서하며, 서로의 어깨를 곁고, 서로의 발걸음에 보조 맞추어 다음 장면, 다음 차원으로 함께 나아가는 태도이다. 그것이 인간의 품격이다. 그 인간의 품격에 하늘이 호응하며, 땅이 부응하는 세상이, 우리가 코로나19 이후에 누리게 될 세상이다.


우리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즈음하여 'K-방역'의 성공을 필두로 해서 한국(인)이 보여준 일련의 '성공사례'에 주목하여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라는 책을 펴내고, 또 "의료인문학"의 관점에서 '코로나19의 물음'에 '의료인문학으로서의 답'을 제안하는 책 - "코로나19 데카메론"을 펴내는 '기본적인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성공"을 자랑하고 거기에 취하며, 우리의 "유능함"을 과시하고 거기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잠시'의 성공은 우리가 '인문학적인 태도'를 강화하고 '인문학적인 접근 = 실천 = 학습 = 공부'에 더 충실하게 나아갈 수 있는 여지와 여유를 마련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우리 모두 계속해서 그러한 "질문과 성찰"을 해 나가자는 당부이며, 제안이며, 바람을 담은 것이다.


'우리는 다시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말은 재진술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시간의 화살을 타고 '차원머신'에 올라타서, 우리가 도달하는 새로운 세계(차원이동 - 패러다임 시프트)는 성장과 성공,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라 천지인삼재, 경천경인경물-삼경의 신세계, 신천지일 수밖에 없다.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서 '나'는 존재감 없는 투명한-과거형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세계와 더불어 꿈을 꽃피우는 존재로 각성할 것인가의 길뿐이다. 이러한 삼재-삼경의 인문학은 '코로나 인문학'과 '의료인문학'을 포함한 "K-인문학"으로서, 한국(인)이 코로나-이후 세계를 이끌어가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든든한 철학적 기반이 될 것이다.


(다음 글 : K-인문학 : '코리아 인문학'에서 '개벽 인문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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