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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8. 2020

'나의 連帶 &  年代'

개벽의 징후-3

내 느낌으로는('바람'일 뿐인지도 모르만) 한반도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정점에 임박한 것 같다. 금주 말을 고비로, 가파른 상승 기세는 꺾이고, 머지않아 출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지난 주부터 시작된 폭발적 확산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다. (앞으로 며칠간 무섭게 상승할 확진자 수는 최근 3-4일 사이의 조치들이 취해지기 전에 이미 감염된 분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 상승 곡선은 며칠 더 이어지겠지만, 이거야말로 대세 하강을 위한 마지막 피치 올리기에 불과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초기의 공황상태에 가까운 두려움의 확산 사태에 비하여, 여전히 불만과 불평, 공포와 불안이 높아지고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의 확진환자의 폭발적인 증가 현상이, 오히려 우리나라 방역 시스템의 철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코로나 19라는 것도 결국 감기의 일종(감기와 독감은 전혀 다른 종류이지만, 우리는 '증상'을 기준으로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감기-독감과 코로나가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크게 보는 범주에서는)으로서, 결국 (넓은 의미의)감기류의 질병처럼 감내하고 극복할 수밖에 없는 질병이라는 전문가의 진단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예방용 마스크의 안정적인 보급이라든지, 이를 위해 사재기 등 사태를 사전에 방지 차단하는 일, 대구-경북 지역과 같이 통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지역에 대한 "특단의 긴급 지원"(의료인력과 장비, 시설)의 속도-규모를 적절하게 관리하는 등의 문제에서, "국가"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으로 앞으로도 이러한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수시로 유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한두 사람의 부주의나 한 단체의 부주의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이 도달해 있는 시스템, 그리고 그 결과로 지구 생태계가 처해 있는 '생명적 환경' 자체에서 기인하는 이른바 '문명병'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재정비해야 할 것은 단지, 국가(지자체, 방역당국)의 시스템만이 아니다.


나의 連帶(연대)


첫째, 이 사태가 불거지던 초창기부터 누누히 얘기되고 있듯이, 최선의 예방책, 최고의 확산방지책은 우선 '개인위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집단적 대처'나 '공적 시스템'으로 '바이러스'라는, 거의 지구 나이에 육박하는 역사를 가진 '생-물체'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둘째, 좀더 근본적으로, 이번 사태에 즈음하여 '개인위생'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내 삶의 주인공은 국가나 단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마스크의 매점매석 방지, 불요불급한 국외유출의 방지 같은, 국가-당국 차원의 업무도 필요하지만) 결국 나를 수호하는 책임과 권한은 나 자신에게 있음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셋째, '나'가 '내 삶(생명)'의 주인이고, 주인은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이러한 사태를 결국은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거나, 심지어, 나만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대구시장의 '부름'에 열일 제치고 달려가기로 결심한 수백명의 (자원봉사) 의료진의 경우에서 보듯이, '나'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 '나'가 '우리'의 일원이고, 이 세계는 '나의 연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동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은 둘째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첫째로는 그것이 '너'와 '우리'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아들딸을 책임지는 부모의 심정으로 지금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나 이외의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의 참 뜻이다. 오직 자기 존재와 삶의 주인[自主]인 존재만이 '연대'할 수 있다.  


'나의 年代(연대)'


앞에서도 이미 암시했지만, '나'와 '나의 연대(連帶)'가 부각되는 사태는 단지 이번 '코로나 19'에 즉하여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근대 이후 '하나의 세계'로 자리매김하면서, 이 세계는 '개인의 인권(인격)'의 절대성과 그에 따른 사유재산권의 절대성,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화(세계화, 지구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주의의 세계화로서의 '근대 세계'는 곳곳에서 파탄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는 북극의 해빙, 남극의 해빙, 시베리아 동토의 해빙과 같은 지구적 대전환의 징후들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물제이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나란히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 거대한 '위기'의 한가운데,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기회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가 뗄 수 없는 하나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생태학적 인식 지평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의 연대'가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과 만물, 만물과 만물 사이에도 적용되는 보편 원리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유의미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빠르게 '산업'의 측면에서 적용되어 인간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사물인터넷'이겠다. 즉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가능성, 잠재성)을 인터넷망을 통해 인간의 감각세계로 끌어들이고, 증폭시켜서 인간의 삶에 활용하게 되기까지 한 것이 바로 사물인터넷이라는 말이다.(이것은 X-ray나 초음파 진단과 같이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는 실상을 '가시화'하고 '감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형화하여 이용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나의 연대(連帶)'가 인간 삶의 핵심적인 원리로 부각되고, 그것이 문명 차원에서 대전환의 동력이 되는 시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열리는 새로운 시대를  '나의 연대(年代)'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내가 더 큰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동학의 언어로는 시천주(侍天主)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안에 '큰 나'가 모셔져 있음, 나는 '큰 나' 속에 있으며, '큰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코로나19는 위중하고 엄중하다. 그러나 몇천 명의 감염자, 현재 10여 명인, 그리고 앞으로 얼마간 더 늘어날 사망자로서 위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새로운 연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계'의 지표로서, 징후로서,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난과 사망의 빌미가 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고, 바르게 준비해 나간다면, 참으로 위대한 성취를 위한 고비, 고난, 고뇌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시간이 바로 지금 - 지기금지(至氣今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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