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Feb 18. 2020

개벽학 스튜디오 강독회

–<천도교회월보> 강독을 중심으로 

일시 : 2020년 2월 17일, 14:00-17:30

참석 : 김단아, 김주성, 박길수, 이나미, 이원진, 이정아, 조성환, 정혜정, 홍승진, 황종원

*"개벽학스튜디오"는 '개벽학'의 정립을 목표로 동학과 개벽에 대하여 월 1회 이상 집담회 형식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또 <개벽하다>(가칭) 제하의 계간지 창간 준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 이어 이번 회차도 <신앙성(종교성)과 사회성>을 읽으면서 "천도교회월보"의 글들이 동학(천도교)는 물론이고 한국근현대철학의 보고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개벽>지 등 이 시기 다른 매체들과 교차하여 읽어 가다 보면, 지금 묻혀져 버린 동학-천도교-개벽사상의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은 사상 지형을 재구성하여, "개벽학"의 정립은 물론이고, 한국근현대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이로써 세계의 철학사, 정신문명(다시개벽의 후천문명)의 재도약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강독 1.


<유학의 ‘화(和)’를 통한 공화(共和)의 내포 정의>

- 발제 : 김단아 (서강대, 철학과)


<결론부분>


공자의 화(和)는 동(同)과는 달리 절(節)이 존재하는, 형이하의 관계 속 준수되어야 하는 덕을 뜻한다. 즉, 화는 예(禮)가 적절히 준수된 인간관계를 이른다. 이를 확장하여 공자는 예를 준수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화(和)라 이른다. 또한 화의 주재자인 군자(君子)는 군주 일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도덕적 성인(聖人)을 이른다. 따라서 유학에서 공화(共和)는 다수의 군자들이 함께 화를 추구하는 상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정도전은 형이하의 세계를 대상으로만 서술된 공자의 화 개념을, 형이상의 세계까지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 확장시킨다. 즉, 화는 음양이라는 형이상학 세계 속에서 준수되어야 하는 덕이며, 형이상학 세계의 화를 본받아, 인문 세계 또한 화를 추구해야 한다.

정도전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화를 주재하는 인물은 재상이다. 재상은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음양을 화하며, 음양(陰陽)의 화(和)에 기반해 임금은 예악을 통해 인문세계의 화를 주재한다.

결론적으로 형이상의 세계 속 화를 주재하는 재상과, 형이하의 세계 속의 화를 주재하는 임금 간의 협치(協治)를 공화 통치(共和統治)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지금까지 공화는 서양의 ‘res publica’에 대한 번역어로 기능한 탓에, 세습군주제와는 대립되는 정치체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공화는 오히려 세습군주제를 강화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담당해왔다(이정환 2013). 본 논문은 이와 같은 공화의 외연에 주목하여, 유학의 ‘화’ 개념에 기반한 공화의 내포를 정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도전의 통치이념을 공화통치의 예시로서 제시하였다. 정도전의 통치철학 이외에도, 유학 내 통치 철학을 공화의 틀로 분석한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강독 2. 


신앙성과 사회성 


-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지음 / 현대어역 : 박길수 


<진행사항>


○ “신앙성과 사회성” 전체 4장 가운데 1장과 2장 강독(현대어역본 강독), 3장과 4장은 다음 모임에서 계속함 


○ 요지 : 인간의 ‘종교성(신앙성)’과 ‘사회성’이 서로 교차 발전해 온 경로를 밝히며, 당시(1900년대 이후)가 ‘새로운 신앙[新信仰]’을 요구하는 때라는 점,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종교가 ‘천도교’임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음 


<목차 및 주요 대목 중 일부>


○1-1. 인류는 왜 만물의 영장이 되는가 

○1-2. 영지(靈知) 중에 고유한 2개 양능

성훈에 이르기를 “사람은 선천적으로 두 개의 본능이 있으니, 신앙성과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이 두 개의 본능이 있음으로써 이 본능이 발달하는 곳에 인류의 권위가 표현(表現: 겉으로 드러남)하며, 인류의 공적(功績: 공로의 실적)이 실현하나니, 우리는 이 본능을 조화(調化) 수련(修煉)하여 인내천의 대정신을 발휘함이 종교 최후의 목적이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성훈(聖訓)을 받들고 감히 몇 마디를 부연하여, 본제(本題)의 정신에 철저하고자 한다.


1-2-1) 신앙성

1-2-2) 사회성  (이상 '1회차')


○2-1. 신앙성-사회성의 병행 발전

2-1-1) 유래(由來) 신앙성과 현대 신앙성의 모순

2-1-1)-(1) 종교의 경전과 사회 지식의 충돌

2-1-1)-(2) 개인의 믿음에 대한 이해[信解]와 교회의 신앙의 조목[信條]이 서로 모순되는 것 

2-1-1)-(3) 종교와 세속[敎俗] 두 사이의 충돌  

2-1-2) 회의 번민의 과정 

2-1-3) 새 신앙의 서광  (이상 '2회차')


○3-1. 협동과 분업

○3-2. 이기와 이타   (이상 '3회차')


○4-1. 우리 교의 신앙적 생활

4-1-1. 세계적 신앙의 경향

4-1-2. 대신사의 신(新)신앙주의

(전략) 만약 우리가 확실히 이 시(侍) 자의 정의를 깨닫고 보면, 처음으로 자중(自重)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신(自信)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각(自覺)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주(自主)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용(自用)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이미 내 몸에 신령한 상제(上帝)를 모셨으니 어찌 자중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이미 내 스스로 한울[天]이니 어찌 자신(自信)의 힘이 생기지 않을 것인가. 내가 이미 내 몸이 진리의 집[巢穴]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자각의 힘이 생기지 않으랴. 내가 이미 나에게 독재의 권한이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자립(自立)의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내가 이미 내 몸의 활동의 원소임을 알았으니 어찌 자용(自用)의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 시(侍) 한 글자를 깨달음으로써 오래도록[悠然] 자중(自重), 자신(自信), 자각(自覺), 자립(自立), 자용(自用)의 정신이 솟아나서[湧出] 자아가 자아 된 가치를 실용(實用)함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기만 하고 실행이 없으면 그것은 구두불(口頭佛)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화정(造化定) 즉 정(定) 자 공부를 실행치 않을 수 없다. 정자공부(定字工夫)라고 하는 것은 즉 묵념(默念)이나 기도(祈禱)와 같은 수련 방법으로 이 수련으로써 우주 대령(大靈)과 융합일치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 (수련) 방법에 의하여 부동심(不動心) 즉 독립자재(獨立自在)의 원동력을 얻으면 그것은 사람이 사람 되는 시초이다. 독립자재의 마음이라 함은 즉 자심(自心)을 자유(自由)로 운용하는 마음이니 이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요, 수련한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능히 실행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생각하라, 우리는 혹 물(物)이 해로움을 알면서도 그것을 능히 자제하지 못하여 물질의 노예가 되며, 사혹(邪惑)의 사용자가 되는 바 아닌가. 우리는 단지 어리석어서 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요, 알고도 능히 부도덕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가 세상에 수천수만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고도 그 부도덕을 행하는 것은 이것이 실로 마음의 독립을 잃어버려서, 자심(自心)을 자유로 사용하지 못함에 이른 것이니, 우리는 이 점에서 정자공부의 필요를 더욱 느낄 수 있다. (중략) 


이에 우리는 일대 의문이 없이 아니하니, 즉 우리는 지(知)라는 계기[階梯]에 따라서 지적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어찌 능히 만사를 안다고 감히 말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 내가 천박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를 헤아려보면, 만사지라는 것은 사바세계에 있는 모든 세속일[俗事]을 전문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일의 원리를 알아서 이를 운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토기(土器)의 형상은 천차만별하지만 그 원료[原質]은 오직 흙 하나로서 만든 것과 같이 우주의 일체만상(一切萬象)은 종류도 모양도 많고 많지만, 유일한 원리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한 흙을 알면 모든 토기를 아는 것과 같이 유일한 원리를 알면, 모든 만사를 아는 것이라. 이것이 만사지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중략)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를 아는 자는 도를 좋아하는 자와 같지 않고, 도를 좋아하는 자는 다시 도를 즐기는 자와 같지 않다.”고 하였나니, 우리는 이 새 신앙 속에서 극락의 원소(原素)를 먼저 발견하여 우선 취미 생활을 꽃피우는 것이 신앙성에 관한 제1 요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상 '4회차' 끝)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개벽파의 개벽담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