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목성의 <손병희의 용일(用日) 전략과 한계>를 읽고
*이 글은 <개벽신문> 92호(2020.2/3합병)에 수록되었습니다.
지난해에 일본 큐슈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공목성(孔牧誠) 씨가 <손병희의 ‘용일(用日)’ 전략과 한계-일본 망명기(1901-1906)의 족적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을 제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동학(천도교) 제3대 교주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명의 필두인 손병희의 대일(對日) 전략을 친일(親日)도 아니고 반일(反日)도 아닌 ‘용일(用日)’로 보고, 동학농민전쟁 이후부터 3·1운동 전후까지의 그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손병희는 1896년에 최시형으로부터 ‘의암(義庵)’이라는 호를 받고, 그 다음날 밀명을 받들어 전국 순회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동학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종일(李鍾一) 등 여러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했다. 그들 중에는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손병희도 그들의 영향으로 개화의 필요성을 굳게 믿게 되었다.
1901년, 손병희는 처음에는 미국 도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손병희가 처음부터 일본으로 갈 생각이었고 미국 도항은 동학도들의 반발을 피하려고 꾸민 이야기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일본 체류 중에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기운이 고조되자 손병희는 (세계가 러시아의 승전을 의심치 않았던 그때에) ‘일승러패(日勝露敗)’를 예측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이기든 일본이 이기든 한반도는 승자가 차지하게 되는데, 이긴 편에 가담해서 승전국이 되고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 한국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책을 위해 일부로 대신(大臣)·부호(富豪)들이나 타는 쌍두마차를 사서 도쿄 시내를 늘상 돌아다니고 “조선에서 온 부자”라는 소문이 나도록 행동하였다. 또한 1만 엔(지금의 20억 원 정도)을 군자금으로 기부하는 등, 일본 정치계와 군부와의 관계 구축에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오해도 받았다. 그는 일본 당국으로부터는 ‘친러파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재일한국인으로부터는 ‘친일파’로 간주되어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서 자객에게 습격까지 당하였는데, 그 자객에게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정신이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열 번이나 절을 했다. 이것이 친일파이고 매국노라면 나를 죽여라!”라고 일갈하여 자객으로 하여금 사과를 받은 적도 있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진보회(進步會), 이후의 일진회(一進會) 회원들에게 무료봉사로 일본 군용철도 건설에 협력하라고 명했다. 사실 손병희는 전쟁 이후에 일본의 ‘조선지배’ 계획까지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용시용활(用時用活)의 정신으로 용일(用日) 전략을 계속”한 것이다(114쪽).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뒷받침한 자금에 대해서 손병희 스스로는 남동생이 한국에서 광산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한특명전권공사(駐韓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스케(林勸助)는 손병희는 자신의 부하이자 친척인 이성순(李聖順)이라는 사람을 시켜 오사카와 상하이에서 구입한 상품을 한국 시장에서 판매하고, 그 수익으로 사금(砂金)과 금괴(金塊)를 사서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금화를 주조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광산을 경영하든 한국의 금을 일본에서 금화로 주조하든 고종의 총신(寵臣)이자 친러파의 거물인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이용익(李容翊)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학교(普成學校)가 경제난으로 운영이 어려워지자 손병희가 학교를 인수”할 정도로(61쪽) 이용익과 손병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손병희는 그 정치력을 1906년에 귀국할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과 한국 양쪽 정부에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나서, 오세창(吳世昌) 등 천도교에 귀의한 망명개화파 인사들을 데리고 정정당당하게 귀국했다.
지금부터는 논자의 소감을 말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동학-천도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져 있는 손병희의 또 다른 면모를 밝힌 것이다. 이 논문을 통해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경제능력이 조명되었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먼저 육군 장성들과 인맥을 구축한 것 같다. 육군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훗날 제2대 조선총독)를 만나서 “일본의 대신들이 명함을 가지고 왔다고 바로 만나줄 리가 없으니 먼저 그들의 이목(耳目)에 들어가도록 하시오”라는 간절한 조언을 받았다. 또 육군중장 다무라 이요조(田村怡與造, 참모본부 차장)와 한국 조정에서 친러파를 제거하는 쿠데타를 모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친러파이자 고종의 총신(寵臣)인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이용익(李容翊)과도 특별한 관계를 구축했다.
일본 군부와 한국 조정, 일본 세력과 친러파 세력 양쪽에 걸친 인맥을 가졌던 셈이다. 아마도 손병희가 만나 동학에 입도한 개화파 관료들이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인맥의 넓이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손병희는 일본에서 상당히 거액의 돈을 썼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한국에서 온 부자”로 도쿄 시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고,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평소 몇 만 엔의 돈을 갖다 쓰는 것은 부자로 일컬어지는 한인(韓人)조차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고될 정도였다. 그 돈으로 망명개화파 인사들과 관비 유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스스로도 60여 명의 동학 청소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켰다. 뿐만 아니라 하세가와의 조언에 따라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1만 엔이나 되는 군자금을 일본군에게 헌납하기도 했다. 그 공작비용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마련한 돈이었다.
현대 인물로 비유하자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4세가 미국의 군부나 정치인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서 중국공산당 정권의 전복을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공산당의 중요인물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중국과 무역을 해서 막대한 공작자금을 스스로 마련하고, 나아가서 미국과 중국 양쪽 정부에서 안정을 보장 받은 뒤에 티베트로 귀환한 것과도 같다.
아울러 논자의 의견을 몇 가지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일반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손병희의 일본 ‘망명(亡命)’이라는 용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손병희는 조선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동학의 최고지도자였지만, 그가 간부들에게 밝힌 여행 목적은 ‘문명의 관찰’이었고, 일본에서도 망명을 신청하고 신변 보호를 요청한 흔적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901년 10월에 일시 귀국까지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체류’나 ‘활동’ 등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손병희의 일관된 축이 ‘교단의 공인’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과연 그 ‘공(公)’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문제이다. 만약에 그 ‘공인’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면 손병희가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식민지 공권력의 통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공인’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논자는 오히려 민중들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공(公)을 확립하는 것이 손병희가 평생 추구해 온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공권력에게 인정받는 것을 ‘공인(公認)’이라고 한다면, 손병희의 경우에는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공’을 천도교인들 스스로가 주도해서 창출하는 ‘공창(公創)’이 목표였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아야 손병희의 평생의 행적이나 사상과도 부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최제우가 설파한 보국안민(輔國安民 또는 保國安民)의 구현이고, 최시형이 주도한 교조신원운동의 연장이며,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의 계승이기도 했다. 손병희의 특이한 점은 일찍이 동학과 적대세력에 속하는 사람도 아군으로 만들고, 그들과 손잡고 그들을 이용한 점에 있다. 이 논문은 그러한 손병희의 평생의 발자취와 꿈과 지향점을 밝혀내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해 줬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 <孫秉熙の「用日」戰略とその限界 - 日本亡命期(1901-1906)の足跡と思想を中心に>, 九州大學大學院 地球社會統合科學府), 2019년(지도교수 : 三輪宗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