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 기반을 지닌 사회운동들의 경합
* 이 글은 <개벽신문> 제92호 (2020년 2/3월호)에 수록되었습니다.
어떤 운동이 일반인들에게 하나의 ‘운동’이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다가오기까지, 그 운동의 배경이 되는 이론적 사상, 즉 운동의 토양은 꾸준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그러한 토양이 바로 운동의 ‘사상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운동에도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는데, 동학은 “반봉건 반외세를 지향한 실패한 농민혁명”이라는 명명을 넘어서, 풍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1
따라서 동학의 경우에는 동학농민혁명(1894) 이전의 문헌을 고찰한다면 동학이 나름대로의 체계를 구축해 온 과정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동학이라는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그 사상적 기반을 알아야 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혜화역 시위와 같이 막대한 숫자의 여성들이 소집된 집회와 같은 페미니즘 운동이 마치 갑자기 일어난 ‘남녀갈등’인 것처럼 이해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병리 현상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배경이 되는 전체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한국사회에 전혀 미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뿌리 깊은 병리인 것이다.
즉, 진정한 문제(병리, problem)는 ‘페미니즘’ 그 자체가 아니라,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다. 페미니즘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사회적 운동이나 ‘일순간에 해결해야 할’ 병적 아노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에 대한 ‘민감한 렌즈’, 즉 ‘인식론적(epistemic)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5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는 가부장제가 현재 존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구의 절반(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당사자들이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색다른’ 감각에 대한 뜻을 직접 사상화한 것이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 움직임으로 드러난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이것을 오독하면, 페미니즘 운동은 마치 일시적인 ‘사회병리’, ‘불화’, ‘갈등’ 따위로 이해된다. 페미니즘이 불화나 갈등으로 이해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이러한 불화와 갈등이 우리 사회에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을 묵인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평화학자 신시아 인로가 말했듯이, 완벽한 소통(communication)은 불가능하다. 평화 상태는 만인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조건이 아니다. 특정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남성)에게는 ‘평화상태’(일상)인 것이, 다른 사회적 위치에 놓인 사람(여성)에게는 위협이 된다(성폭력과 노동 성차별 등, 기본적인 안전부터 계급까지, 다층위에서 성차별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사상은 무엇일까?
아마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한 인식론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적합한 언어가 없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지식 생산자로서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한 여성들에게 사상적으로 언어를 부여하는 것, 즉 지식 생산의 자격을 인정하고 그러한 조건을 쇄신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내용에 담긴 일반 조약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세상이 종말의 위기일 때 페미니즘이 일어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즉, 살기 어려운 시대에 페미니즘이 부흥한다는 것이다. 2016년에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2 전후로 페미니즘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설파된 데에는 분명 여성들이 “더는 이대로 살 수 없다”고 느낄 만큼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열악해진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남성들도 살기 어려운 특정 시대에, 결코 여성들이 그보다 살기 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 운동이 몰아치듯 도래하는 시기와 관련해서는 시대 배경에 대한 고찰이 함께 있어야 한다. 동학이 창시된 1860년은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는 해였다. 조성환에 의하면, “우주론적인 차원에서의 대전환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차원에서도 대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동학이 창시되었다.3 중국의 함락과 탈아입구라는 아시아의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 창시의 사상적 시초를 발견할 수 있다.
평등을 적극적으로 논한다는 혁신성의 측면에서, 동학과 페미니즘의 운동적 연관성이 밀접하다고 관찰된다. ‘인내천’,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 운동의 구호는 주체를 만민으로 두는 민주주의의 시초이다. 따라서 동학은 모든 이를 사회적 위치와 신분에 상관없이 주체로 호명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조우한다. 페미니즘 또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사람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진정한 주체성’ 에 대해 성찰하는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미니즘과 동학이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을 주체로 볼 것이며 또한 무엇을 평등을 획득하는 집단으로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동학의 특징은 평등의 대상을 ‘사람’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사물’까지도 확장시켰다는 점에 있다.
해월 최시형(1827~1898)은 경물(敬物)사상을 설파하면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물론이고 “땅을 함부로 밟고 다니는 것”까지도 가슴 아파했다. 조성환에 따르면, 이것은 ‘사인여천’(事人如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물여천’(事物如天)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4
그렇다면 동학과 달리 페미니즘은 평등을 쟁취하는 존재를 사람,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성으로 한정하는 것일까? 이것은 고민의 여지를 안고 있는 물음이다. 페미니즘 운동 을 일시적 사회병리가 아닌 고유한 역사를 지닌 사상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먼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흥했던 서구의 주류 페미니즘 중에서 하이픈 페미니즘(Hypen-Feminism)에는 몇 가지 주요한 갈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존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과 관련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이 있다.
나는 서강대학교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학 연계 전공을 이수하는 동안에,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마음이 끌리는 페미니즘의 갈래가 몇 차례 변화했다. 사실상 ‘고전적인’(clssical) 서구 페미니즘의 주류 갈래들은 현재 한국의 시대 상황에 맞게 차용되거나 변모된 방식으로 현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여성들이 실천하는 ‘래디컬(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당대 서양의 학문적, 이론적으로 발전을 이룬 ‘급진주의 페미니즘’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기도 하다. 더불어서 무엇이 ‘리버럴 페미니즘’이고 ‘래디컬 페미니즘’인지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구분을 위한 구분’, 즉 무리한 이분법적 사고라는 비판 또한 있다. 실제로 나는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인지 알지 못한 채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하나로 정의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페미니즘 내부는 격론의 장이라는 사실이다. “여성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이 있다. 모든 개인이 지니는 서로의 차이에 관한 언설이 아닐지라도, 페미니즘은 ‘경합’한다. 현재 페미니즘 내부의 권력투쟁의 하나의 예시로,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퀴어 페미니스트’ 사이의 갈등이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흔히 ‘생물학적 여성’, 즉 (설령 그것이 사회적으로 이름 붙여지고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들만을 ‘여성’으로 범주화하며, 해당 여성들을 위한 투쟁을 지향한다. 한편 퀴어 페미니스트는, 성 소수자를 의미하는 ‘퀴어’(queer)들이 페미니즘 인식론을 공부하면서, 약자를 위한 학문과 운동을 전유하는 것을 운동의 목표로 삼는다.
이때 논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생물학적 남성이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정체화한 경우에, 그가 ‘진정한 여성’의 자격을 얻는지에 관한 논의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소위 그에 대해 ‘진정한 여성’이 무엇이길래 성전환하고 사회적 여성성을 답습하는 사람을 ‘여성’으로 호명하느냐는 질문을 주장하며, 반면 퀴어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것을 ‘혐오’와 ‘차별’이라고 명명하며, 있는 존재로서 여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페미니즘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실제 활발한 갈등 구도를 설명한 이유는, 경합하는 페미니즘 속에서 ‘누가 주체인지’, ‘누가 평등한 존재인지’에 대한 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저마다 다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동학에서는 해월 최시형이 경물사상, 사물여천 사상을 보여준 것처럼 사물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평등한 존재로 주장되었다면,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주장하며, 이때에도 구체적으로 ‘누가 여성인지’에 관한 내부의 사상적 경합이 존재한다.
한편 위에서 설명한 페미니스트 내부의 갈등 구도가 실제로 유의미하다고 느낀 지점은, 오히려 해당 갈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에 관한 통찰 그 자체에 있다. 즉 해당 갈등은 허구적이다. 그것이 허구적으로 설정된 배경에 관한 순차적 이해가 오히려 여성주의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근거로 소위 ‘퀴어 진영’과 ‘래디컬 페미니스트 여성’ 사이의 대립 구도는 거친 이분법이다. 이는 허구적인 범주화를 통해 왜곡된 논란 양상을 구성한다. ‘퀴어’(성 소수자)가 ‘페미니스트 여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왜곡된 인식이 간과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페미니스트 여성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생물학적 섹스와 사회, 문화적 젠더의 일치성, 합치성을 지닌 존재 양태”가 아니다.5
두 번째로, 페미니스트 중 이성애자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 구조는 페미니스트 여성을, 마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감각적으로 자신의 성별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이성애자로 범주화한다. 따라서 여성의 “퀴어성으로의 합류 가능성”을 삭제, 부인한다.6 이것은 여성에 대한 왜곡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에 대한 또 하나의 인식적 공격에 해당한다. 사실상 ‘퀴어’(성 소수자)라고 할 때에는 ‘트랜스 젠더’의 존재만 포섭되는 것이 아닌데, 이러한 범주화가 여성을 또 다시 배제하여, 마치 구조적 강자인 것처럼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 또한 각종 성 규범에 대한 위반적 행위자로서 그러한 퀴어성을 획득 가능하고 수행 가능한 주체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고통에 우열을 매기는 시도’, 즉 ‘여성의 고통을 절대화하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통의 위계화’ 전술을 이용하는 정치적 진영으로, 허구적 개념으로서의 상대 진영을 호명하여, 그를 ‘혐오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숱한 시도에 대한 반발이다. 이것은 상대 진영의 우열 전술에 대한 허구적, 과장적 언급이자 허수아비 비판을 통한 결과적 ‘우열 전술’ 사용에 대한 거부의 표명이다. ‘트랜스젠더(들)’의 고통과 ‘여성(들)’의 고통은 다르며, 각각의 고통으로 존재하면서 때로는 교차성과 평행선을 지닌다. 이러한 논의가 고통의 경쟁이 될 이유가 없으며, 숱한 오해와는 달리 래디컬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 중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견해에 매우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젠더 논의에 필요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권력 관계에서 누가 헤게모니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권력싸움 또한 필연적으로 계속 발생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호 투쟁이 ‘혐오’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처럼 페미니스트 내부의 첨예한 갈등은, 페미니스트 중에서 “누가 비가시화되었는가?”, 즉 “누가 약자인가?”라는 정체성 정치의 측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동학의 생명존중과 평등적 세계관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학과도 경합한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수학적 도식으로 벤다이어그램을 그린다고 할 때, 통념적으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가치를 기본으로 하여, 더 많은 주체가 존중될수록 ‘평화적이고 좋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근본적 비판은, 명목상 ‘모두’가 호명되지만 실제로 ‘보편적인 일반 주체’로 인정되는 것이 항상 소수의 주류적 특권층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두가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했으나, 그로부터 노예, 외국인, 여성, 성 소수자 등의 어떤 층위에서의 약자가 매우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페미니즘 인식론이다.
따라서 동학에서 말하는 만물의 존중과 평등의 하위 부분집합이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학이 말하는 ‘만인을 포함한 만물’의 평등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의 권리 주장과 (위에서 설명한 측면에서) 경합, 상충하는 주장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여성의 권리는 만물의 권리의 부분집합으로 포섭되는 듯이 보이나, 실제로 동학운동에서 여성의 인권이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근거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동학 내 여성운동의 흐름이 있었는지는 추가 조사를 통해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어떤 운동이든지 그것이 부상하는 시기에는 사회의 문제점이 극대화되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즉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회 구조적 불합리함에 대해 민감하게 감수성을 높여 목소리 내는 것은, 동학이 그렇듯이, 과연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최초의 환경운동가인 다나카 쇼조가 동학농민군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한 것이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던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통념적으로 일본과 조선 모두에게 ‘난동’과 ‘폭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통념적으로 ‘사회병리 과정에서의 혼란과 대칭적인 양방 갈등’으로 사회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운동을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칭적이지 않은 권력의 장에서, 더 적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혹은 권력이 없는 약자가 일으키는 운동은 사회적으로 ‘당연히’(권력의 이름으로) 폄하된다. 이때 이러한 명명(naming)은, 의미 투쟁의 장에서 사회운동을 통해 권력 획득하고자 하는 약자들에게 중요한 전술이다. 다나카 쇼조는 말년에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으며, 강을 더럽히지 않으며, 마을을 파괴하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다.7 이는 주류 이데올로기였던 ‘일본 문명화’을 새롭게 명명하는 것으로서, 반대 의견의 좋은 예시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운동은 경합의 성질을 지닌다. 그것은 운동과 운동 사이의 경합일 수도 있고, 주류 가치관에 대항하는 차원에서의 경합일 수도 있다. 무엇을 무엇으로 부르는지에 대한 새로운 렌즈를 준다는 점에서, 동학과 페미니즘은 모두 그 시대의 최전방에서 진행된, 운동의 인식론적 의의를 가진다. 경합의 구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것은 경합이 아니라 단순한, 일시적인 사회병리로 오독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운동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사상적 저변을 간과하며, 운동을 축소시키는 반(反)인문적인 무의식적, 의식적 행위이다.
<주석>
1. 이 글은 2019년 가을학기에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개설된 “한국성리학” 수업시간에 제출한 기말레포트를 수정한 것이다.
2. 조성환, <동학이 그린 개벽의 꿈>, <<농촌과 목회>> 83호. 2019년 가을호.
3.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문화과학>> 83, 2015.
4. 조성환, 앞의 글.
5. 위와 같음.
6. 윤지영, <페미니즘 난국(feminism crisis)의 도발적 변곡점>, <<한국여성학>> 33(3), 2017.
7. 위와 같음.
8) 조성환, 위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