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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7. 2020

각자위심과 동귀일체

개벽의 징후 -2 

[개벽통문-095]

1. 전통사회(라고 해 봐야, 3, 40년 전)에서는 마을 단위(4, 50호 내지, 커 봐야 200호 내외)에서 접촉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충실하면서 그 방법을 연장시켜 가면, 다른 관계(이웃 마을 사람이나 타지 사람)는 방어적, 수세적, 심지어 배타적으로 임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혼인' 등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주로 마을을 중심으로 살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전통 마을 내에서는 200내지 5, 600명의 사람들은 '가족'에 준하는 수준의 감정적 교류(선한 감정이든 악한 감정이든)가 이루어졌고(상대방에 대한 앎, 대면예절) 그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 공동체를 유지 운용하는 핵심 구조로 작동하였다.


2.


오늘날 우리는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과 동시 교류를 하고, 수십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사람이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설령 지금 당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또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연결되고(강제로 - ex:신상털기 등),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간다. 잠재적으로 만인과 연결되고 소통(해야)할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깊은 소통' '감정적 교류'의 정도는 전통사회에 비하여 현저히 감쇠한 속에서 살아간다. 양적인 '성장'이 질적인 '성숙'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대체로) 반비례하는 가운데서, 끊임없이 연결하고 연결하고 연결하지 않으면 '삶의 질'이 점진적으로 저하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연결중독증'에 빠져서 살아간다. 금번 "코로나19"의 대유행(?) 사태는, 이러한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비극/참극 행태의 한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아도,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문명병'임이 분명하다.

3.

인간의 활동 반경이 커진 것은, '지식'의 양과 크기가 커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물론 전통시대에서 우주(하늘의 운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심지어 (유기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지식보다 더 깊고 넓은 것들이 많았지만, 오늘의 우리 세계(도시 중심)에서 '유용(유효, 유리, 유가)'한 지식은 '근대적 방식'으로 구조화된 지식이고, 그러한 지식은 단지 내 주변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모두 적용되는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춘 것에 더 높은 가치와 효용지수를 부여한다. 


인터넷이 세계를 일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표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표준화 덕분으로 그 (공간적, 시간적) 확장성은 무한대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러한 표준화를 위하여 '인터넷' 자체는 '종의 다양성'에 심각하게 역행하는 경로를 걸었다. 그것은 단지 '기술 표준화'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삶의 양식의 표준화(누구나 인터넷을 하고,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소통하고 중독되어 가는)를 야기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코로나19형(形) 디스토피아는 바로 이러한 '표준화, 일원화, 세계화'의 산물이다. 기술의 표준화의 정도는 인간의 각자위심과 비례한다. 


각자위심이란 사람이 제각각 홀로 떨어져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넷(지금 이 글을 올리는 페북과 같은) 소통 창구를 통해 우리는 무한대의 '교류-협력-소통'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나 홀로'의 고립의 심화 경향 병행한다. 즉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연결되고자 하고 수치상으로 그렇게 되어 가지만, 그럴수록 고립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학, 사회과학적) 지식의 추구만으로 결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인간적 자기실현을 향해 지속가능한 전진을 할 수 없음을, 새삼스럽지만, 재확인하고, 그에 값하는 행동(삶의 양식 변경)을 꾀해야 할 때다.

4.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일찍이 '이 세상에 괴질이 만연'하는 것을 증언하고, 또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괴질의 근본 원인이 바로 '각자위심'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 각자위심 괴질의 치유책을 '동귀일체'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귀일체'란 바로 '생물종 다양성의 확보'로서 '백화만발'하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오늘의 각자위심은 백화대신 일화(一花萬發)로 직향하는 데서 우리가 직면하는 디스토피아는 치성하고 있다.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 나아가는 길은, '틀린 나'가 아니라 '다른 나'를 회복하여 조화(造化=調和)를 회복하는 데 있다. 지기금지!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오늘 아침 천도교중앙대교당의 모습이다. 하늘이 우리를 보우하사, 이 사태가 머지않아 '일단은' '종식'되리라 믿는다. 기도한다. 모두들 무사 안녕하시고 다시 뵙기를!

#각자위심 #동귀일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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