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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8. 2019

'신성한 말' 이야기

- 신성한 말 10

'신성한 말' 연재는, 한편으로, 동학 경전의 번역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학 경전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말(글자)'의 번역이 필요하다.

한자말이라서 번역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시(侍)를 '모시다'라는 순우리말로 번역하였지만,

우리 시대에 '모시다'라는 말은 다시 번역/해설/해석이 필요하다.


번역은, 하나의 세계와 마주하여 새로이 문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문의 안팎으로 길을 만드는 일이다.

문 밖으로 난 길은 번역된 이후의 세계를 펼쳐내는 길이라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길-말은 세계를 만들고 

길-말은 세계를 만든다)

문 안쪽의 길은 원문의 세계를 새롭게 밝히고 열어주는 길이다.

해석은 양 방향으로 일어난다.

새로운 뜻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본래의 뜻도 새 생명을 얻는다. 

발명과 발견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 일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되었다고 해서 종결되는 것도 아니다.

한 고비를 돌아서면, 또다른 길이 열리고, 그 길은 또 다른 고비로 이어질 뿐이다.

적선이고 적덕이다.  


말/글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이 오롯이 백면서생의 무위도식은 아니다.

일찍이 공자님이 말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군자가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서

맨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고 하셨다.

'공자님 말씀'이란 시효가 지난, 고리타분한 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처럼,

그래도 공자(공구)님 말씀이 공자(성인)님 말씀인 법도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신성한 말'을 천착하는 노동(글쓰기)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마음으로 정진(精進)하는 수행이요, 수양이다.


새(번역된) 말은 새 행동(삶)을 부른다. 

말이 행동(삶)을 불러 내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充分)은 '다분(多辯)'이 아니다. 

분(分)에 앞서 충(充; 가득할 충)이 있다.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것을 돌아보아,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 하라.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기면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言顧行行顧言 言行一致 言行相違則 心天相離 心天相離則雖窮年沒世 難入於聖賢之地位也,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묵은때를 벗겨내고

헌 살을 저며내어

새 살 돋을 때까지!

새 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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