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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2. 2019

말모이 이야기 (3) - 미안합니다

- 신성한 말 13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중2, 초6인 두 딸[현서, 현빈]과 함께. '신성한 말'을 이야기하는 나로서는 꼭 보아야 할 영화였다. 감동하며 보았고, 할 이야기가 많다. 아무래도, 거듭해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중 세 번째


1. 

영화가 클라이막스로 향해 가는 어느 즈음에 '위기'가 닥쳐온다. 

(1) 일제로부터 강제폐간 명령을 받은 '한글' 잡지 마지막 호 간행을 앞두고,  류덕환 등은 '전국의 사투리' 수집을 위해 '광고'를 내보내는 모험을 감행하지만 단 한 통의 회답도 접수되지 않는다(왠지는 뒤에 밝혀짐). 대대적인 호응을 기대했던 회원들은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린다. (2) 설상가상,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무실 지하에 은닉했던 말모이 원고를 압수한다. 10년 동안의 노력이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찰라였다. 바깥으로부터 짓쳐 들어오는 위력 앞에 회원들은 속수무책!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 


2. 

위기는 다시 절정으로 치닫는다. 류덕환 대신 잡혀가 고문 끝에 순국한 조선생의 부인은 류덕환에게 "조선생이 생전에, 새벽까지 말모이 원고를 베껴 써서 사본 1부를 만들어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

감방 동기 '김판수'를 조선어학회에 취직시켜 준 장본인이자, 평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태도로 '허허(虛虛)!' 웃기 잘하는 조선생은 그야말로, 절치부심의 '실실(實實)'을 예비해 두었던 것!  

류덕환은 되찾은 원고를 가지고 조선말 사전 간행을 재개하자고 회원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이미 원고를 압수한 일제 당국의 감시의 눈초리, 사전 간행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공청회를 열 방법이 없다는 것 등으로 주저하였다. 그때 내민 한 장의 종이. 국민정신총동맹 가입원서. 류덕환은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국민정신총동맹 조선어학회지부"를 결성-동맹의 일본인 간부가 끈질기게 요구하는-하자고 제안한다. 류덕환은 그것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일로 여겼으나, 회원들은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며 류덕환을 떠나고 만다. 회원들이 볼 때 그것은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일에 불과했을까?

이때, 우체국의 집배원은, 류덕환과 김판수를 비밀리에 불러, 우체국 창고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한글' 잡지 최종호를 보고 전국 각지로부터 답지한 지역 사투리에 대한 투고 원고 그리고, 성금이 든 봉투, 그 봉투가 수백통씩 든 자루 수십 개가 쌓여 있다(일제의 압수를 우려하여, 우체국 직원들이 몰래 빼돌려 둔 것,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함께 우편낭을 들여다보던 김판수의 얼굴이 왠지 밝지 못한 것을 옆에서 바라보는 류덕환

광고를 합시다! 이 욱일기가 횡행하는 시대에! 한글 사투리를 모읍시다!

3. 

절정은 엔딩으로 나아가지 않고, 다시금 '위기'로 도약한다. 원고 압수 - 조선생의 피체와 사망 등의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동안 김판수의 아들 덕진은 학교로부터 '조선어학회' 직원의 아들로서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아버지, 조선어학회 나가지 마세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다시 감옥에 가고, 제가 강제징용에 끌려가고, 순이 혼자 어떡해요! 저... 무서워요..."라는 덕진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동지들이 떠나 버리고 혼자된 류덕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김판수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류덕환은 "요즘 경성제일중학 학생들이 징병에 나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덕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나오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김판수의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되뇐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힘들 때 같이 있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4. 

내가 보건대, 앞서의 모든 장면들은 사실 이 '미안합니다'를 말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보건대) 실제 역사상의 조선말 사전 편찬 과정은 우여곡절과 고난이 숱하게 많기는 했으나 영화의 장면들처럼 '극적'이지는 않았다. ("영화는 영화일 뿐 따라하지 말자!") 오히려, 실제 역사의 인물들은 훨씬 더 비루한 삶을 살아야 했다(친일-부일-선전선동).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미안합니다'는 이중삼중의 진실을 담고 있다.


류덕환은 '조선어학회'를 '국민정신총동맹'이라는 친일행위의 본산에 가입시킨다. 그것을 견디지/용납하지/참지 못하고 모든 회원들은 떠나 버린다. (그들도 나중에는 류덕환과 합류한다. 국민정신총동맹의 회원이 아닐 수 없다. '사기' 편찬을 위해, '궁형'을 감내하였던 사마천! 이 세상 사태는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은 김판수는 -- 비록 '친일 거부'라는 대의명분은 아라 가족의 안위를 위하여서지만 류덕환을 떠나면서 연신 '미안합니다'를 되뇐다.


5. 

그 미안합니다는 류덕환이 김판수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니었을까? 류덕환이 떠나간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아니, "미안합니다"를 김판수가 말하고 류덕환이 듣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가 두 사람 모두를 향하여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어학회'라는 '단 하나뿐'인 우리 민족 정신의 보루를 '국민정신총동맹'에 가탁(假托)하면서까지 '조선말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 사전의 원고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그리고 그 원고를 모으기 위하여 코묻은 돈을 보냈던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최후의 순간 직전까지 함께하였으나, 최후의 순간에 친일로 돌아선 수많은 친일배-부일배들의 입에서 우리가 듣고 싶어했던 그 '미안합니다'를 이 영화의 작가-감독은 김판수(판수 = 박수무당)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안합니다'를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친일배, 부일배, 용일배 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어 해원상생코자 하는 주문이 아닐까? 그 미안함을 용납함으로 해서, 우리 스스로를 용납하고, 과거로부터 놓여나기를 기원하는 주문이 아닐까?


류덕환에게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친일파인 아버지(경성제일중학 이사장 - 류완택; 송영창 분)에게 저항하는 일이자, 그의 죄를 사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존재이유인 그 일을 '친일'과 뒤섞어 버리는 것이다. '친일-반일' '선-악'이 이렇게 뒤엉켜 버리는 것, 그것이 일제강점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비극의 실체이자 인간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공부의 과제이다. 공부와 공경!


6.

그 순간의 '미안합니다'를 들으며

나는 나 자신과 김판수가 오버랩되어, 전율했다.

"미안합니다!"

그건, "내 입에 나오는 소리"였다!


7. 

일제 말기, 저 무렵,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미안합니다'를 외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했는가. 노골적인 친일은 아닐지라도, 부일배의 길, 용일배의 길로 사라져 갔는가. 김판수는 죽어서라도 그 이름을 영화에 남겼지만, 그리고, 조선말 사전이라는 꿋꿋한 결실을 남겼지마는, 얼마나 많은 조선의 백성들, 지식인들이 '미안합니다'를 남기며, 영혼의 죽음, 영성의 자살로 내몰렸는가.


8. 

그 '미안한 마음'이 살아 있었더라면, 오늘 우리 사회는 이처럼 어지럽지 않았을 터.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을 되뇌던 "김판수들"은 죽고 말았고,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살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그 마음을 잃어 버리고, 1950년을 전후로, 되려 큰소리치며 득세하는 세상 -괴물의 사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여전히 그 뿌리를 이어 와 (아니, 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아) 적반하장! 하는 저들을 보면, 때로는, 살의를 느끼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 세월이 악업의 더깨를 거듭 쌓아, 우리는 이처럼 참으로 미안한 세상, 편치 않은 세월을 지나고 있는 것. 그러는 사이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해법이 될 수 없는 시간-공간을 지나왔다. 


9. 

잃어버린 마음은 무엇인가?

아이가 난 그 처음에 누가 성인이 아니며, 누가 대인이 아니리오마는 뭇 사람은 어리석고 어리석어 마음을 잊고 잃음이 많으나, 성인은 밝고 밝아 한울님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언제나 성품을 거느리며 한울님과 더불어 덕을 같이 하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크고,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화하나니, 천지가 하는 바를 성인도 할 수 있느니라. (해월신사법설, 성인의 덕화)


10.

다시, 한 걸음 - 그 마음을 돌이키는 일이 최선, 최상, 최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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