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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6.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28)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이것[=의지의 활동 순전한 자유가 아니라 오직 관계 속의 작용의 중심이라는 것, 즉 내외계의 관계 작용이 곧 의지의 활동이라는 것]을 수운주의의 논법으로 말하면 인간의 의지는 내외계의 관계, 즉 '한울'에 원인을 두고 있다. '한울'은 전 우주의 관계적 기화작용을 일컫는 것이므로 의지의 근본 원인은 곧 '한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만물 일체의 관념이 생기게 되고 자아(自我)와 대아(大我)와의 연결을 생각하게 된다. 즉 절대아(絶對我)라는 관념에 도달하게 된 우리는 '한울'로부터 개체화(個體化)한 것이다. 무한한 우주(한울)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지 활동이라는 것도 자기의 자유로 지은 것이 아니오 '한울'로부터 지어진 것이다. '한울'의 일부[部]를 얻은 것이다[이를 야뢰는 '대아(大我=한울)'와 '소아(小我=인간 개개인)'라고 표현하였다].

  

위에 말한 '시(侍)' 자는 '한울의 자아(自我)'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자아 속에서 한울이 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유신령(內有神靈)'은 '한울의 본능'이라는 말이요, 외유기화(外有氣化)는 외계의 모든 사물이 자아의 본능과 합하는 곳에서 기화가 생긴다는 말이요, 그리하여 내적 본능과 외적 기화를 총섭(總攝)하는 것이 지(知) 혹은 각(覺)이라는 의지의 활동이다. 


그리고 보면 시(侍) 자의 정의 속에서 내적 외적 관계가 있고 그를 총섭하는 각(覺)이 있다는 것인데 필경은 의지 활동, 즉 각(覺)이라는 것이 시(侍) 자의 정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편역자 주] 모심의 의의를 '깨달음[覺], 앎[知]'라고 하는 해석을 여기서 처음 본다. 무엇을 깨닫고, 아느냐 하면 우리가 모두 '관계 속의 존재'임을 깨닫고, 앎이라 하였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동귀일체(同歸一體)'이다. 모두가 '한울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앎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서로 돕고,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이 필연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어리석은 삶[사람]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내외의 조절관계는 인간 이외의 동물에 있어서는 다소간 같은 작용을 한다 할 수 있으나 의지 활동, 즉 각(覺)의 경우는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의 구별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밀봉이 꿀을 짓는 데는 오직 본능이 있고 관념은 없는 것이지만, 건축가가 가옥(家屋)을 건축하는 데는 관념이 먼저 의지적으로 활동하고 후에 가옥이 관념 속에서 생겨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활을 어떻게 할까 하고 관념하는 데에서 먼저 의지의 활동이 있고 다음에 그 활동이 내계와 외계를 조화하는 데서 생활 방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가 선한 방면으로 움직이면 그 생활은 선하고 반대로 악한 방면으로 움직이면 그 결과는 불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의지가 선악을 선택하는 작용을 일러 각(覺)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천주의의 인생관은 전혀 시(侍) 자의 정의에 있고, 시(侍) 자의 총 결론은 지(知), 즉 각(覺)에 있으니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라 함은 곧 각(覺)의 의미[意]를 설명한 것이다.


(이상 "제2장 제2절 '시(侍)' 자의 정의와 의지" 끝, 다음에 "제3장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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