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의 만물이여, (而千古之萬物兮)
각각 이룸이 있고 각각 형상이 있도다(各有成各有形)
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하나(所見而論之則 其然而似然)
그 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所自而度之則 其遠而甚遠).
이 또한 아득한 일이요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로다(是赤杳然之事 難測之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我思我則 父母在玆),
뒤에 뒤 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後思後則 子孫存彼).
오는 세상에 견주면(來世而比之則)
이치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理無異於我思我),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去世而尋之則)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 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惑難分於人爲人).
아! 이같이 헤아림이여(噫 如斯之忖度兮).
그 그러함을 미루어 보면(由其然而看之則)
기연은 기연이나(其然如其然)
그렇지 않음을 찾아서 생각하면(探不然而思之則)
불연은 불연이라(不然而思之則 不然又不然).
왜 그런가(何者).
태고에 천황씨는 어떻게 사람이 되었으며(太古兮天皇氏 豈爲人)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가(豈爲王).
이 사람의 근본이 없음이여(斯人之無根兮),
어찌 불연이라고 이르지 않겠는가(胡不日不然也).
세상에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世間孰能無父母之人).
그 선조를 상고하면(考其先則)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런 까닭이니라(其然其然又其然之故也). (중략)
이에 그 끝을 헤아리고 그 근본을 캐어 본즉(於是而揣其末 究其本則)
만물이 만물되고 이치가 이치 된 큰 일이(物爲物 理爲理之大業)
얼마나 먼 것이냐(幾遠矣哉).
(동경대전, <불연기연>)*
*[편역자 주] 불연기연(不然其然)은 말하자면, '동학의 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인식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학 공부의 오묘한 묘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우선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이것은 수운의 인생관의 일절이다. 우주와 인생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천지만물을 현상 그대로 본다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렇다[其然如其然], 즉 각자의 특성으로 각자 생활을 도모하는 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편역자주]이를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세상 만물이 제각기 저 스스로 생겨난 줄 알고 살아가는 것, 혹은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나아가서, 그러므로 어떻게든 내가 이익을 보고, 내 이익이 최대가 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각자위심이다(편역자의 '각자위심' 해석임).
그러나 천지만물의 본원을 거슬러 올라가[遡求] 논한다면 묘연(杳然)과 헤아리기 어려움[難測]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이치를 미루어 우리 사람을 돌아 본다면 이것이 오는 세상[來世]와 지난 세상[去世]에 이 하늘과 땅만큼[天壤]의 차이가 생긴다. 오는 세상로서 본다면 자손으로부터 자손에 유전하여 무궁히 흘러 갈 것이나, 지난세상으로 돌이켜 생각[溯考]해 보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 아님이 확실하다.
가령 이 예를 천황씨*라하는 가정한 인류의 시조가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 인류의 시조는 어디로부터 생겼다 할까? 천황씨는 인류의 근원이 끊어진 곳에서 생겼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은즉, 마침내[究竟] 인류는 비인류(非人類)인 대자연계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겠느냐?
*[편역자 주] 천황씨 :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삼황(三皇, 천황, 지황, 인황)의 한 사람으로, 12 형제가 각각 만 팔천 년씩 왕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학 경전서는 "최초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만 팔천년'이란 선후천을 아우른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진화론과 수운주의 인생관이 합치되는 점이다. 그리하여 "만물이 만물 되고 이치가 이치 된 일이 얼마나 먼 것이냐[物爲物理爲理之大業 幾遠矣]라는 말에 이르러 천지만물은 무궁으로부터 흘러 온 것을 알수 있으며, 그리하여 인간성 자체도 천지만물을 통하여 무궁에 연원(淵源)하고 무궁에 근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어떤 시대에 돌연히 출생한 것이 아니요, 무궁자의 한울성이 천지만물을 통하여 사람에게 이른 것이라 하는 것이다.
(다음 '2. 진화론과 수운주의 인생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