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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9.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5)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을 다시 읽는다

제3장 질적 한울과 지기일원 실재체


제1절 인식 방법의 일편(一片)


1. 유물론적 인식론: 로크의 인식론


세상에 유물론과 유심론이 병행함에 따라 인식 방법도 또한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진다. 보통 유물론의 인식론은 경험론 혹은 감각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인식은 다만 감각에 의하여 있는 것이니 인식은 곧 사물의 본체를 통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인식된 일체의 현상은 사물 그 자체의 표현이다. 로크(1632-1704)*는 우리의 인식의 근원은 경험뿐이라 한다. 즉 지각 경험이다. 우리들은 먼저 감각기관[感官]에 의하여 개개의 ‘단일 관념’(單一觀念)을 얻는다. 즉 색이라든지 음(音)이라든지 하는 것이 다 이러한 단일 관념이며 말하자면 인식의 문자(文字)이다. 우리가 문자를 이어서 글을 짓고 말을 짓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단일 관념을 묶어서 여러 가지 추상적 관념을 이루는데, 이를 ‘복합 관념’(複合觀念)이라 부른다.

*[편집실 주: 영국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미국 헌법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인간지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저자로 유명하다. “일부 철학사가들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인간지성론>(1690)에 와서 비로소 인식론의 제반 문제들이 기초부터 검토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로크는 이 저술에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인식을 연구하면서 이 인식의 기원, 인식의 대상 및 내용, 참된 인식 곧 진리의 의미, 인간의 인식의 한계 등을 차례대로 검토한다. 이 검토점들이 바로 오늘날까지의 인식론의 중심 주제들이다.”(이상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

인간지성론 초판


우리의 감관(感官)으로부터 들어오는 단일 관념은 원래가 사물의 개개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은 사실상 일정한 연락을 취하여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드면 ‘달다’ ‘희다’ ‘바삭바삭하다’ 하는 것은 사탕에서 얻은 속성이다. 우리의 감관은 이 이상의 속성을 사탕에서 얻어낼 수가 없다. 달다 희다 하는 단일 관념을 묶어서 여기서 한 개의 사탕이라는 복합 관념(추상적 개념)을 가지게 된다.

이 복합 관념은 사탕의 각 속성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은 객관적 사실의 반영으로 사탕 본체의 사상(寫象)이다. 요컨대 인간의 지식은 모두가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인간의 오성(悟性)이라는 것은 본래가 백지이다. 백지 위에 여러 가지 선을 긋고 색을 칠해서 그림(조직된 사상지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유물론적 인식론의 요지이다.


2. 유심론적 인식론: 칸트의 인식론


이제 유심론적 인식 가운데서 특히 칸트의 인식론의 일단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우리의 모든(一切) 인식은 인식 주체(心)와 인식 객체(外界)와의 결합의 산물이다. 인식 객체는 우리의 인식에 내용을 부여(賦與)하고 인식 주체는 우리에게 형식(形式)을 부여하는 것이니, 즉 오성 관념(悟性觀念; 範疇)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오성 개념에 의하여 처음으로 감관으로부터 얻은 각종의 지각(知覺)을 결합하여 이를 한 개의 경험으로 짜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직적 인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외계가 없으면 원래 아무런 현상이 없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다른 한편(一方)으로 오성(悟性)이 없으면 우리의 감관에 비치는 일체의 현상, 즉 지각은 개개로 있어 종합하기 어려운(落落難合) 혼돈체(混沌體)가 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스스로 통일되어 한 개의 표상을 형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상이 없으면 따라서 경험이 없을 것이요, 또한 인식도 없을 것이다. “개념이 없는 지각은 맹목이며, 지각이 없는 개념은 공허한 것이다.”** 인식 작용은 필경 개념과 지각과의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편집실 주: 칸트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오성이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사유하지 못한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말했다.]


원래 우리는 도저히 외부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사물의 본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오성 개념(悟性槪念)의 능동 작용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오성 개념은 결코 경험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의 예비조건(豫備條件)인 것이다. 경험의 예비조건으로서 선천적으로 우리의 의식 내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경험된 일체 사물은 어느덧 이미 우리의 주관의 안경(眼鏡)에 의해 착색된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 그대로의 본체를 인식할 수 없고 우리의 주관이 이해하는 그대로 사물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초판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의 내용이 될 만한 지각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주관에 의하여 착색된 데까지 이른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에 이것을 반드시 시간 공간의 형식에 맞추어 지각하게 되며 시간 공간은 오성 개념과 마찬가지로 최초부터 우리의 주관 내에 구비되어 있는 고유 본래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히 현상에 불과한 것이요, 우리 주관의 착색을 벗어난 적나라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도저히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필경 3대 결론을 얻을 수 있으니 첫째, 우리의 연구의 대상은 다만 현상뿐이요 사물 그대로의 형상, 즉 본체는 우리의 연구와 교섭하지 않는다(沒交涉)는 것, 둘째, 경험만이 인식의 영역이 되고 경험을 초월한 본체의 학문이라는 것은 도저히 얻지 못하는 것, 셋째, 인식 작용은 경험을 넘어서 초자연(超自然)의 자리(域)에 침입(侵入)할 때는 이율배반의 모순당착(矛盾撞着)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우주-영혼의 3대 이성 관념은 결코 이를 경험계(經驗界), 지식으로 응용해서는 안 된다.

 

이상은 칸트식의 인식론을 요약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인식론은 유물적 인식론과 반대 방면에 서 있다. 유물론자의 말로서 하면 인식의 근원은 감관 지각(感官知覺)이다. 칸트의 이른바 오성 개념이라는 것도 그 실은 우리의 지각 또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식의 능동 요소는 오성 개념이요 감관 지각은 아니다. 감관 지각은 다만 인식의 피동적 내용을 일컫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요, 그 내용을 통정(統整)하여 한 개의 연락(連絡) 있는 경험으로 조직하는 것은 모두가 오성 개념의 일이다. 오성 개념은 경험이 아니요, 경험의 결정 조건이다.”


이에 따라서 유물론자의 우주관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인식된 세계는 곧 사실 그대로의 세계라고 하는 데 반하여 유심론자(칸트식)의 우주관은 우리에게 인식된 세계는 다만 현상으로서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요 본체의 세계는 아니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유물적 우주 본체관과 유심적 우주 본체관이 인식상에서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다음에 '제3장 제2절'로 계속)


* [편역자 주1] 이번 회차는 좀 길었습니다. 오늘날도 로크와 칸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부터 약 80년 전에 야뢰는 어떤 경로로 로크와 칸트를 공부할 수 있었을지, 당시의 지성계의 수준, 지성인들의 교류 방식 등에 대해서는 다로 시간을 내서 공부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16.04.18)

* [편역자 주2] 이미 오래전의 텍스트를 다시 불러와 읽어보는 것은 복고 취향 때문이 물론 아닙니다. 야뢰는 오늘날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동학'의 사상과 '서양철학'의 만남/소통을 추구했던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텍스트를 넘어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동학의 본령'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지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앎(=지행합일)입니다. '동학 따라 살기'가 신인철학을 읽는 목적입니다. 그러기에는 신인철학이 부적절한 도구일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 가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적절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1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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