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이야기 세 번째, 동학과 공동체 문화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하여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기(布德) 시작하자, 그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학문공동체로 시작한 동학도들의 모임은 금세 ‘생활, 생명 공동체’로 진화해 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동학적인 '어울려 삶'의 원리가 실천되었다.
앞서 말한 하늘과 사람과 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구체적인 작동 원리는 바로 유무상자(有無相資), 즉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나눈다’는 것이다. 돈이 있고 재산이 있고 학식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이 그것들이 없는 사람들과 ‘서로’ 나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상호 호혜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있는 사람이 내놓는 것을 없는 사람이 가져다 쓰지만,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인정과 감사와 보답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호혜’의 경제는 ‘상품 경제’를 대체한다. 이미 150년 전의 동학 공동체에서 구현된 원리이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상품경제 전성시대를 지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주류로 자리 잡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 경제 체제이다. 단순한 희망이나 전망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공유경제’나 ‘나눔경제’ ‘돌봄경제’와 같은 용어들은 그저 현학적인 수사나 학자의 머리에서 나온 관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새로운 ‘유무상자경제’의 텃밭들이다.
이러한 유무상자경제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성취(자본주의, 과학물질문명의 성과를 포함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바탕 위에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과를 온전히 받아 안고 그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차원으로 전개될 것이다.
또한 유무상자 경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나눔의 원리나 경제 체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며, 사회적 체제의 문제이다.
수운은 동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접(接)이라는 조직을 구성한다. 대개 50호 정도를 기본 단위로 하는 이 접조직은 학문과 수련을 함께하는 한편으로 어울려 살기의 모범적인 이상향을 구현한다.
“귀천이 같고 등위에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帷薄; 포교소)을 세우니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여 들며,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도우니(有無相資) 가난한 자들이 기뻐한다.”(「동학배척통문」, 1863)
이 구절은 당초 동학의 새로운 생활양식이 당시의 유교 중심의 생활윤리와 어긋남을 비판하는 경상도 지역 유생들의 통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양반 사회가 그어놓은 삶의 방식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는 ‘어울려 살기’의 삶이 확장될 경우 자신들의 기득권이 와해된다는 위기의식에서 이를 막아 나서며 비판적으로 서술한 관찰 결과이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윤리의 원초적인 씨앗들을 모두 담고 있는 공동체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운 시대의 공동체 윤리는 수운을 이은 해월 최시형 시대에 더욱 활발하고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무릇 우리 동학 사람들은 같은 연원(최제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땅히 형제와 같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형은 굶고 있는데 동생만 배부를 수 있을 것이며, 동생은 따뜻하면서 형은 추위에 떨어서야 되겠는가. (중략)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동학신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접안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끼리 각각 서로 힘을 합해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는 마음을 면하도록 하시오.”(『해월문집』, 1888)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이치이니 지금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이치가 더욱 크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환난을 서로 구제하고 빈궁을 서로 보살피는 것 또한 선현들의 향약에 들어 있는 것인데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정의가 더욱 막중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우리 동학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속을 지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서 규약에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해월문집』, 1892)
해월 시대 동학 조직의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해월의 이러한 가르침과 더불어 해월 스스로 그들 속에서 ‘더불어 삶’을 실천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해월은 수운의 순도(1864)년 이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를 오가며 산골짜기마다 깃들어 사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일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가르치고, 밤과 농한기를 이용하여 학문공동체를 개설(開接)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동학의 가르침을 구현해 나갔다.
한마디로 해월의 동학 교조 생활 36년은 세상 사람과 이 세상 만물과 더불어, 어울려 사는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그동안 해월이 관의 탄압과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는 시각을 벗어나 해월이 하늘-사람-만물과 어울려 사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의 시각의 전환은 김용우 님의 견해에서 배웠다). 해월이 가는 곳마다 과일나무를 심고, 한시도 쉬지 않고 노끈을 꼬거나 농구를 만들거나 밭을 일구었다는 사실들은 그 안에 해월만을 놓고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해월과 함께, 더불어 일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해월 홀로일 때조차 하늘과 땅이 더불어 함께했음을) 옳게 보아야만 동학 공부의 한 고비를 넘어섰다 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