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파 선언>을 읽고 (1)
[편집실 주] 이 글은 '개벽학당'(당장 이병한) 2019년 1학기 공부의 하나로 '개벽파 선언'('다른백년' 연재분)을 읽은 소감을 벽청(개벽하는 청년들)이 발표한 내용입니다. 모두 10명의 글을 앞으로 차례로 소개합니다. 이 글은 <개벽신문> 제87호(2019.8)에 게재되었습니다.]
울고 싶습니다. 로샤와 새별의『개벽파선언』이라니 신이 나서 읽다가, 다 읽고 나서는 하늘을 조금 원망했습니다. 천군만마가 있어 든든하다 못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솔직히요.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삐져나왔습니다.
무릇 ‘벽청’(개벽하는 청년)이라면 담대하고 패기 있게 척척 개벽의 길을 걸어 가야하는데 공부가 아직 부족해서인지 눈앞이 도리어 깜깜해집니다. 까마득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을 겁니다. 돈이 있다면 얼마든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 나의 ‘삶’이 될 것 같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봅니다. 정말 개벽할 거니!
어쩌겠습니까. 100년 전 눈을 질끈 감아버린 척사파도 답답하고 깜빡 눈이 멀어버린 개화파도 밉살스러운데. 당면한 지금 이 시대에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 이념으로는 도저히 살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눈을 부릅뜨고 직시하는 개벽파가 될 수밖에요.
『개벽파선언』에는 ‘회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동과 서가 회통하고, 유학과 서학이 회통하고, 천주교와 천도교가, 수학과 철학이, 정신과 물질이, 도학과 과학이 회통해야 한다고 합니다. 회통은 본말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는 ‘포함’의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치원부터 최제우까지 새별의 <한국사상사> 강의 때 공부한 인물들은 죄다 회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에만 전념하지 않고 이것과 저것 모두 흡수하고 통달하여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말로 ‘포함한다’ 혹은 ‘하늘한다’고도 합니다.
그중에서 ‘하늘한다’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배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울러 보듬는 것, 그것이 제가 첫 번째로 이해한 개벽입니다. 회통하지 않으면 작금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가 없으니 지금 바로 개벽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더 이상 정신과 물질을 가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사물인터넷, 사람과 사물이 불일불이 수준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생산’혁명과 ‘생각’혁명이 결합되어 만물이 활물되는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20세기 후반의 생태주의로 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앞으로 30년, 귀농은커녕 더더욱 많은 인류가 도시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고도로 연결된 스마트시티가 살림살이의 주요한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마음가짐과 마음다짐이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온 생명적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파장을미치게 됩니다. 시시각각 마음을 잘 써야 우주가 잘 돌아갑니다.” (<개벽파 선언> 중에서>
그러기 위해서 일단 저는 ‘달통’부터 하고 봐야겠습니다. 로샤는 “민족문학론, 제3세계론, 종속이론, 탈식민주의론 등등 진부하다 못해 지겨운 감마저 없지않”다고 말했고, 새별의 세대는 “영어 수학 플라톤 칸트를 모르면 행세하기 어려”운 개화세대였다고 말하는데, 사실 저는 유학도 서학도 철학도 과학도 잘 모릅니다. 좋게 보면 비어 있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장자의 ‘허심응물’(虛心應物)이 반가웠던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회통·포함·하늘하기 위해서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꽤 빡센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울고 싶었던 겁니다.
하자센터에서 로샤가 저에게 처음 한 말은 “그게 소의와 대의에 차이에요”였습니다. 제가 “굳이 왜 수양을 국가적 정치적 세계적으로 해야 하냐, 나 개인이그렇게 살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물었을 겁니다. 그때도 저는 되도록 가시밭길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개벽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인상적인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네 갈 길을 가는 거야!”(새별) 이제는 압니다. 그게 단순히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
의외로『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큰감명을 받았습니다.
“인생 의미는 소아(小我)에 있지 않고 대아(大我)를 발견하는데 있다. … 인내천은 소아가 아니라 대아를 가르치는 진리이다. … 사람이 대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대아의 풍광에 접촉하는 날이면 좁던 나가 넓어지고, 작은 나가 커지고, 짧던 나가 길어진다. 그러므로 인생의 목적은 무궁아를 발견하는 데 있고, 인생의 의미는 무궁아를 활용하는 데 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중에서 /김병제 외 지음/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개벽은 “나로부터의 혁명”이라 했습니다.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나’는 ‘개인’이 아니라 ‘천인공화(하늘과 함께해서 모두 어우러지는)하는 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개벽은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술(述)에서 작(作)으로 사유의 스위치를 전환해야 하지만 아직 저는 ‘술’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개벽을 하지 못할까봐 조급한 마음이 들면 최시형의 문장을 생각합니다. “나의 모든 동작은천지가 시키는 것이다.”(『 해월신사법설』「도결(道訣)」)
어렵지만 새별(조성환)의 말에도 힘입어 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있든 개벽의 마인드를 잃지 않는 것. 즉 ‘무엇’을 개벽하느냐보다는 개벽을 ‘한다’는 의식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면, 그 ‘무엇’을 얻은 순간 개벽이 멈추게 됩니다. 반대로 얻지 못하면 지쳐서 개벽을 포기하게 되고요. 공자는 “배우는 데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學無常師)고 했는데, 이런 식 으로 말하면 “개벽에 일정한 대상을 두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3년 전, 처음 동학을 배우고 정읍 여행을 기획했을 때 이렇게 썼습니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이 세상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보은에서, 무장에서, 고부에서, 삼례에서 농민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주문을 읊었습니다.
人卽天(인즉천) 사람이 곧 하늘이고,
事事天物物天(사사천물물천) 모든 만물과 모든 일이 하늘이라.
以天食天(이천식천)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
侍天主造化定(시천주조화정) 하늘을 잘 모시면 우주가 변화할 것이고,
永世不忘萬事知(영세불망만사지) 이것을 잊지 않으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잘 살기 위해 바득바득 세금을 걷었고, 고종은 잘 살기 위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내몰린 농민들은 살기 위해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흙을 다지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알알이 열매를 땄던 손.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돼지의 이부자리를 깔고 닭이 낳은 뜨끈한 알을 만져본 손. 그 경이로운 초록의 감각, 생명에 대한 감각을 손으로 알아갔던 사람들.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이미 우주가 변하는 중이었음을.
이제 나도 자각합니다. 지금 이 우주가 변하는 중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