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 이 글은 <개벽신문> 제93호(2020년 4월호) '개벽의 창'에 게재된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위상에 크나큰 변곡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독야청청, 대한민국의 위상이 ‘단군 이래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고요. 이러한 성과를 일구어낸 문재인 정부, 그 속의 수많은 관계자들(방역당국, 의료진, 공무원 등)과 꿋꿋이 감내하는 시민(국민, 인민)들이 삼위/사위 일체가 되어 만들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새 역사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마조마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제 상식(마음, 심정)으로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1000만 명을 헤아리는 것도 그러한 걱정의 한 이유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선진국’의 허상이 깨어졌다”거나, 우리의 “선진국 콤플렉스”를 바로잡을 계기를 마련했다거나, 이제야말로 대한민국 표준(Korea Model)의 세계화, 진정한 ‘한류 세계화’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국민들의 65% 이상이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한국이 세계의 선진국의 일원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여론조사의 결과가 지금-여기에서의 우리(대한민국)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역시 동의하고, 또 희망하면서 역시 한편으로 의구심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을 발표한 후, 이천에서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화재 원인이 - 잠정적으로 - 그 이전에도 빈발하였던 유사한 원인(시공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공법)에 의한 화재가 빈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후진국형 재난'이라고도 불립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생각건대, 소위 (서구)선진국들의 물질적, 문화적 자산은 과거 수백 년간의 제국주의(식민주의)적 수탈의 결과로 축적시켜 온 자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서구 선진국)도 끊임없는 혁명적 투쟁(시민혁명, 프랑스혁명, 독립전쟁 등)을 해 온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러한 혁명 투쟁 역시 선진국 내부의 수많은 모순과 부채(문화적, 경제적 등등)를 외부화(식민지 및 제3세계에 전가)함으로써 성공적인 자산으로 전화(轉化)하여, 오늘날(얼마 전까지의) 그들이 누리는 ‘선진국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한국사회는 지난 160년간* 체제붕괴(왕조몰락), 피식민지, 분단전쟁, 분단체제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번 코로나19 덕분에 일거에 이러한 ‘어둡고 괴로운 밤’의 역사를 타개하고, 선진국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의 ‘한국현상’이 ‘일거’에 달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졸부귀(猝富貴)’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졸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사태입니다. *160년은 '동학 창도' 이후의 시간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인식(어둡고 괴로운 밤중에 갑자기 햇살이 비치듯이 오늘의 한국모델이 가능하게 되었다는)은 오류입니다. “개벽파”에서는 오늘의 한국현상이 적어도 160년 전부터 준비되고 축적되어 온 역량의 성과라고 말합니다(<개벽파 선언>, <개벽의 징후 2020>).
즉 “개벽파”에서는 오늘의 한국현상이 고난 속에서 간신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면적인 고난의 이면에서 동학/혁명-천도교/3.1운동-청년/신문화운동-국민/산업화운동-민중/민주화운동-시민/촛불혁명(그 사이사이의 세부적이고, 중요한 많은 투쟁을 포함)으로 이어지는 “개벽파”의 면면한 노고(勞苦)와 근면(勤勉), 청신(淸新)과 순결(純潔)의 정성과 공경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개벽파”의 관점으로 보면, 오늘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것은 기존의 선진국 그룹의 표준에 우리가 도달하거나 그 기준선을 넘어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대한민국 스스로, 우리 본연의 심성과 바람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인 ‘한국모델’과 ‘한국현상’이 그 어느 나라(소위 ‘선진국’)에 의존하지 않고, 동학과 동학혁명 이래 촛불혁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온축(蘊蓄: 깊은 곳에서부터 쌓아 올림)시킨 것인 덕분입니다.
일찍이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을 창도하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신령한 부적(靈符)을 당시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영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어떤 경우에는 효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을 살펴본즉, “정성 들이고 또 정성 들이는 사람은 매매유중(每每有中, 100% 정확)하고 정성 들이지 않은 사람은 일일무험(一一無驗; 하나도 효험이 없음)하니 이것은 (영부를) 받는 사람의 정성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처럼, 개벽(동학창도) 이래 쌓아온 정성과 바람이 지금-여기 대한민국 시민(인민)의 정성과 만나서 오늘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선진국이라고 인정해 주어서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정한 기준을 우리 스스로 넘어서고 스스로 정성을 다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립(自立), 자주(自主), 자신(自信)함으로써 선진국이 된 셈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누구나 아는 대로, 동학혁명의 비원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런 노래를 참요(讖謠)라고 합니다. 시대의 징후(徵候)를 담고 있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개벽의 징후’의 노래입니다. 이런 참요도 있습니다.
갑오세(甲午世)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乙未)적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
여기서 ‘갑오세’는 ‘개벽 세상’입니다. 직접적으로는 갑오년(1894)에서 을미년(1895) 사이에 이 전쟁(동학혁명)을 끝내지 못하고 병신년(1896)까지 끌다 보면 실패하고 말리라는 예언을 담았다고들 합니다. 그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민중들의 민요(民謠) 속에도 이런 요소들이 모두 있었던 것입니다.(자장가나 새 쫓는 童謠/勞動謠)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참요는 (갑오년이 60년마다 돌아오는 것처럼) 언젠가는 갑오세(개벽 세상)가 오고야 말리라는 염원과 예정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참요, 즉 징후의 노래를 그렇게 되기를(혹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비는 기원의 기도문으로 보아도 좋고, 직접적인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노래로 읽어도 좋고, 이미 실패로 끝난 사건에 대한 애절한 감정이나 위로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학민중(인민-시민-국민)들은 ‘개벽의 꿈’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기로 다짐하고 마치 은원(恩怨)을 뼈에 새기듯이 이런 노래를 통해 그 꿈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끝내 역사의 승리자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참요(讖謠)로서의 개벽의 징후 읽기, 말하기, 듣기, 노래하기는 동학혁명 당시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코로나-19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의미는 세계인들이 주목하듯이 한국모델(개방-민주주의)과 중국모델(폐쇄-전체주의) 사이의 대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국모델(진실-개방)과 일본 모델(거짓-은폐) 사이의 대비를 통해 더욱 뚜렷이 부각되리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2020.04.23현재-“일본, 왜 이러나?” 류의 기사 참조) 중국의 경우도 ‘폐쇄-전체주의’라기보다는 ‘거짓-은폐’ 모델로 분류하여 접근/해부하는 것이 이번 사태의 실상을 규명하는 데 더 유의미할 것입니다. 현재 중국이 세계의 공적(公敵)이 되고 있는 공식적인 이유도 바로 그 점(진실 은폐)에 있기 때문입니다(‘비공식적인 이유’로 세계 각국의 정치적 의도도 한몫을 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가 “왕조 몰락 - (서구적) 근대화 실패 - 식민지화 - 분단 - 전쟁 - 독재 - 신식민지근대화”의 흐름이 아니라 “동학혁명 - 3.1운동 - 신문화 운동 - 통일운동 - 산업화운동 - 민주화운동 -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번 코로나-19에 한국이 이처럼 ‘놀랄 만큼’의 모범적인 대응을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近因)은 바로 촛불혁명이고, 그 촛불혁명은 또한 ‘세월호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고 보면, 우리는 새삼스레 다음과 같은 우리 시대의 참요(讖謠)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거짓 - 진실’의 대비야말로 이번 코로나-19에서 한국모델과 일본(중국) 모델이 어떻게 대비되는지, 그리고 한국이 왜 ‘한국모델’을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한반도의 개벽 시민(민중-인민)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미국이 보여주는 모습도―아마도 그 대부분이 트럼프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되는데―바로 ‘진실에 주목하지 않는 태도’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일본의 ‘거짓-은폐’ 시스템은 비단 이번 코로나-19에만 유독 불거진 것이 아니라 이미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은폐하고 국민들을 사지(死地-오염이 채 가시지 않은 지역(원 거주지)으로의 복귀)로 내모는 데서도 이미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에서의 코로나 사태의 악화는 하나의 거짓을 가리기 위해 더 큰 거짓을 끌어다 붙이는(‘올림픽’을 위해 원전 사고 후유증 은폐) 악순환의 고리 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일본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늘어나는 확진자-사망자 숫자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상실’이 표면화되기 시작(ex. 무질서한 사재기)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단지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원전 사고 이후 쌓여온 불신(不信)의 풍토-기운이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새롭게 열어 나갈 ‘개벽의 징후’에서 당면한 과제들도 분명해집니다. 첫째는 이른바 ‘가짜뉴스’로 일컬어지는,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진실을 호도하거나 거짓(정보)를 퍼뜨리는 사례들입니다. 현재 급속도로 ‘사이버화’ 되어가는 우리 삶의 환경에서 ‘진실-거짓(가짜, 가상)’의 구분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전통적인 분류 방식으로 진실과 거짓(가짜, 가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롭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럴수록 진실과 거짓(가짜) 사이의 구분이 더 절실하고 긴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인간-멈춤’이 진행되자 거짓말처럼 미세먼지가 격감하면서 지구 대기가 맑고 투명해지는 일, 수많은 동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거짓이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번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는 투명하고 진실한 정책과 마음가짐만이 오늘 전 지구적, 전 인류적, 전 생명적으로 당면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라는 점입니다. 이른바 서구 근대가 ‘개인’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코로나 이후(A.C.-After Corona /cf. B.C.=Before Corona) 세계 구성의 핵심어는 ‘진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모델이 점점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 제시된 성공요인인 “투명성과 개방성”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다른 말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둘째와 연계된 것입니다. 즉 근대주의의 여파로 나타난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있는 그대로’가 제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나 관점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좀더 근원적으로 현상-본질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충심은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여기서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대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사람)의 (마음가짐)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에 마음-영성의 문제가 빠지면 결코 진실에 다가갈 수도, 문제 해결(코로나-19의 완전 퇴치)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코로나-19해결의 과정은 확산 방지 ⇒ 치료제 개발 ⇒ 백신 개발 ⇒ 발병의 근인(近因) 추적 ⇒ 발병의 원인(遠因/根因) 추적의 경로로 심화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투명성과 개방성은 이 모든 경로에 끈질기게, 포기되는바 없이 추진되어야 할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고 지탱하는 동력은 오직 새롭고 밝고 맑고 깨끗한(淸新簡潔)한 마음 - 한울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개벽의 징후 2020>에 이어 내놓는 <세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는가 - COVID-19 시민백서>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한국 현상’을 진단하고, 개벽의 징후를 더욱 더 깊이, 넓게, 다양히 읽고 공부하며 스스로 내면화해 나가자는 바람(희망과 기도)을 담고 있습니다. <개벽의 징후 2020>과 <세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는가 - BEYOND CORONAVIRUS - BUILD NEW NORMAL>는 그 출발점은 다르지만, ‘다시 개벽의 징후’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한 염원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형제-자매와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는가’라는 제목을 두고 ‘국뽕스럽다’거나 ‘성급한 과대평가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단지 최근 서너 달 사이의 현상만을 보자는 것도 아니며, 오랜 연원(淵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만큼, 이 ‘앞서가는 제목’이 한국이 맞이하고 있는 사태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로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또는 “모든 것이 현실화된 이후에 진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차원에서도 이 제목의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세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는가’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책’이 아닙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인류는 처음으로 ‘고난을 함께 이겨나간 경험을 공유한’ ‘우리는 하나-WE ARE THE WORLD’가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우리(인류)가 당면한 문제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코로나-19는 작게는 우리 인류가 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단 한 번도 면해 본 적이 없는, 극복해야 하는 ‘생존의 위기’를 전 인류가 한편(같은 편)이 되어 치르는 일이며, 크게는 선천(B.C.)와 후천(A.C.)을 가르는 변곡점(대전환, 다시개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추신 : 이제 몇 달 후 <개벽신문>은 <다시개벽>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걸음을 시작하게 됩니다. 올해 <개벽> 창간 100주년을 맞으며 다시 새로워질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워짐이 당연하고 당위적이며 당당한 걸음이라는 것을 이번 코로나-19가 말해 주고 있어서, 한편으로 어깨가 무겁고, 한편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코로나-19로 환원하신 모든 분들의 희생과 노고하시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함하여 고난을 함께 이겨나가는 세계시민들을 생각합니다. 심고합니다.
*계간 <다시개벽>은 여름호(6월말)부터 발행될 예정입니다.
*계간 <다시개벽> 정기구독 신청 및 후원을 받습니다. (02-735-7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