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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4. 2020

몽환(夢幻)의 탑(塔)에서

-소년회(少年會) 여러분께

-출전 <천도교회월보> 제138호(1922.2.15) 

東京 小波 (방정환) 지음 / 박길수 역


*[ ]는 역자가 추가/수정한 내용


동경 하숙방에 앉은 소파 방정환. 이 글은 바로 이 모습으로, 이 장소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외롭고 쓸쓸한 객창(客窓)에도 새해는 역시 찾아았고, 고국(故國)을 그립게 하는 백설(白雪)이 오늘도 아까부터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얗고 가벼운 수많은 눈이 고독에 떠는 여객(旅客)의 가슴을 울리면서 넓은 대지에 자꾸 쏟아지고 있습니다.


겨울마다, 눈 오실 때마다 보지도 못하고 아지도 못하는 북국(北國)의 촌락(村落)을 그리는 내가 이렇게 멀고 먼 객지에 쓸쓸히 있어서 눈 오시는 날을 [맞]닥드리니까 전에 그립던 미지의 북국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 고국이 그리웁고 서울 생각이 납니다. 


시가(市街)를 내려다보고 앉아서 외롭고 덧없고 그립고 울고싶고, 어떻게 견디기 어려운 가슴을 안고 나는 여러분께 이것을 씁니다.

여기서 '몽환의 탑'은 방정환이 자기의 하숙방을 일컫어 붙인 말이다. 


아아,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작별하고 서울을 떠나온 지는 인제야 겨우 달 반밖에 되지 않지마는 아침저녁으로 쌓여가는 그리운 정으로는 못 보게 된 지가 벌써 몇 해 몇 세월이나 된 것 같습니다. 


벌써 전등이 켜졌습니다. 내 방 천정에는 오십촉 전등이 발갛고 노란 및을 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도 그리 어둡지는 않아서, 그다지 불빛이 밝지는 아니합니다마는 창 밖에 쏟아지는 눈과 방안에 켜진 전등 불빛과 무언지 정 깊은 이야기의 밤나라가 깊어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창 밖에 보이는 시가에도 전등이 켜져서 일찍 든 별같이 설중(雪中)에 깜빡 깜빡 하고 있습니다. 어느 거리에선지 두부장수의 나팔 부는 소리가 황혼의 곡(曲)같이 들리고, 우에노공원(上野公圓)으로 넘어가는 진사정(眞砂町) 언덕길 좌우 점두(店頭)에 나란히 켜진 전등이 오시는 눈 속에 끔벅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저 먼 북국의 어느 시골 촌락같이 보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쓸쓸한 눈 속에 동경은 저물어 가는 것입니다. 


아아, 여러분!

서울도 지금쯤은 전등이 켜지고 집집의 지붕마다 온돌방에 불 때는 연기가 떠오르겠지요. 울듯한 가슴은 자꾸 헤매어나고 눈앞에는 자꾸 서울 모양과 서울서 크고 서울길로 다니고 서울서 노는 여러분의 모양이 보입니다.

일본 유학 시절 소파 방정환. 스스로를 닮은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


풍속 다른 일인(日人)의 집 2층 윗방에 쓸쓸히 있어서 비오는 저녁마다, 바람 부는 밤마다 내가 그리워하는 서울! 거기에는 여러분의 지금과 같이 꽃같이 난만(爛漫)하던 어린 때의 생활이 어느 때까지든지 묻혀 있습니다. 따듯한 봄이면 버들피리를 어린 입으로 불기도 거기였고, 바람 찬 겨울이면 동무의 손을 잡고 얼음을 짓치기도 거기였습니다. 그리고 10세 되던 해에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를 세우고 어린 팔로 연탁(演卓)을 짚고 떠들던 것도 거기였고, 12세 되던 해에 160여 명 유년군(幼年軍)의 총대장으로 작전(作戰)의 계획을 벼리던 것도 거기였습니다. 


훈련원의 대운동과 대한문 앞의 경축 행렬, 장충단의 개나리와 성북동의 밤 줍기.... 아아, 꽃과 같이 새와 같이 아름답고 쾌활하던 어린 세상의 나를 키워 준 서울의 볕은 얼마나 따듯하였겠습니까? 꽃은 지고 또 피고, 해는 가고 또 오고 천진난만하던 어린 세상 위에 따뜻한, 행복된 세월은 몇 번일지 흘러갔습니다. 


춘풍(春風)! 추우(秋雨)! 10년의 세월은 꿈같이 지나서, 벌써 나는 어린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꽃은 또 피겠지요. 봄은 몇 번이라도 또 오겠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그 세월이 다시 오지 못하고, 그 꽃 그 봄 그 터에에는 지금 여러분이 크고 있습니다. 


애달프나마 하는 수 없이 될 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나라를 멀리 떠나지 말고 가깝게 있으리라고 바랐으나, 그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습니다. 흐르고 또 흐르고 한 해 두 해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점점 머리 어린 나라를 떨어져 가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아끼는 몸이 이렇게 먼 곳에서 얼마나 내 고향인 여러분의 나라를 그리우는지 아지 못합니다.


외국에까지 와서 대학(大學)에는 다녀도, 문학 책을 보거나 철학을 연구하거나 사람으로서는, 몸으로서는 영원히 어린이로 있고 싶은 것이 소원인 내가 진정으로 얼마나 여러분을 보고시어 하는지 아지 못합니다.

일본 유학 시절 소파 방정환. 왼쪽은 고모부 주영섭 씨

아아, 사랑하는 여러분!


바람에 우는 어린 솔같이, 싸늘한 객지에 떨어져 있어서 애련(哀憐)한 추억으로만 남은 어린 때의 꿈을 잊히지 못하는 내가 지나간 해 11월 한 달을 그립던 고국의 굼에 있어 한번 또다시 돌아오지 못할 꽃같이 난만한 어린이의 나라를 볼 수가 있었고, 그 안에까지 들어가서 어린이와 함께 놀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된 날인지 몰랐습니다.


꽃송이의 모듬 소년회(少年會)!!

참으로 여러분의 모이시는 그곳은 쌀쌀한 겨울에 백화(百花)가 일시(一時)에 만발하여 어우러진 화초온실(花草溫室) 같았습니다. 따듯하고 향기롭고 찬란하고---. 나는 다만 그 속에 심신이 젖어만 있었습니다.


아무 욕심도, 허위도 없고, 일점의 사심(邪心)도 없이 천진 그대로, 양심 그대로, 하늘 그대로 아름답고 곱게 꽃은 피우고, 천진의 유로(流露) 기꺼워 솟는 선녀(仙女) 같은 노래 소리는 울리고, 그리고 무한한 앞길을 향하고 맑고 깨끗하게 희망의 샘물이 그 속에 끊일 새 없이 흐르고.... 아아, 이 밖에 나는 또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어디서 또 낙원을 구하겠습니까?


따듯하고 깨끗하고 향기롭고.... 아아, 지난날의 어린이 왕국에서 놀던 날의 한(限)이 없던 행복이여! 나는 얼마나 어느 때까지든지 어느 때까지든지 거기 있고 싶었겠는가.... 기어코 나는 그 달 월말(月末)에 작별을 고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바다를 건너 멀-리 멀리 여기까지 오면서 그 노래, 그 향기를 잊히지 못하고 왔습니다. 


객지는 싸늘합니다. 외롭고 추워요. 일본은 더 쓸쓸하고 적적합니다. 불도 못 때는 방에 쓸쓸히 들어누워서 새벽 두 시쯤, 세 시쯤 고국의 꿈이 깨어서 눈만 버우버둥 뜨고 누워서 창 밖에 쏴아-- 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고는 그만 울고 싶게 고적하고 춥습니다. 


동경에서 쓴 소파의 엽서. 개벽사의 주간 차상찬 선생. 소파보다 12세 연상인데, 막역지우였다. 이 엽서도 겨울 '다다미방'에서 썼다-높은 글줄을 먼저 낮은  글줄을 나중에 읽음


아아!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쓸쓸하게, 외롭게 지내는 나에게 여러분이 보내 주시는 거의 하루도 아니 오는 날이 없이 매일 하나 둘씩 오는 편지가 얼마나 크고 많은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문체도 조리도 보잘 것 없는, 글자 형용도 잘 이루지 못하고 오자까지 많은 어린 여러분의 편지가 나에게는 제일 반갑고 제일 위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체면으로 쓴 것도 아니고, 교제상 부득이 쓴 것도 아니고, 문체나 또는 서간 격식에 구속된 것도 아니고, 순연한 마음으로 다만 잊히지 않고 생각해 주는 한 점 티끌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심정에서 생각하는 그대로 일자 일구의 가감이 없이 써 주는, 세상에도 귀하고 귀한 글인 까닭입니다. 


허위도 장식도 없이 진심 그대로!!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하고 값있고 따듯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그것에 주렸습니다. 구하려 구하려 하여도 구하기 용이(容易)치 못하였습니다. 욕을 하여도 좋습니다. 냉랭하여도 좋습니다. 그것이 진심 그대로이면 나는 거기에 열(熱)을 느낍니다.


어른도, 신사도 별(別)로 못하는 것을 여러분이 어린 손으로 써 보내주는 진심 그대로의 편지가 매일 1, 2매씩 와서 쓸쓸과 외로움에 우는 나를 얼마나 많이 위로해 주는지.... 나는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학교에 다니고 소년회에 다니는 여러분이 바쁜 중에 써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4천여 리나 되는 여기까지 오는 보드랍고 따듯한 정의 편지! 거기에는 자자구구 여러분의 깨끗한 마음이 어여쁘고 양기로운 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꽃은 붉은 꽃도 있고 노란 꽃도 있고 흰꽃도 있고, 가지각색 꽃이 피어 있습니다.


어느 분은 송추회(送秋會) 생각과 함께 나를 잊지 못한다고 쓰고, 어느 분은  마리오 이야기를 듣고 울었다는 어여쁜 추억을 쓰고, 또 어느 분은 가극 배운 것, 그때 재미있게 놀던 것을 생각하고 내 생각이 난다고 쓰고.... 아아, 가지가지로 어린 생각의 귀여운 추억의 글을 읽고 나의 가슴은 얼마나 뜨겁게 뛰놀았는지 모릅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쪽문 앞에서 천도교소년회원들과 함께한 소파 방정환.

그리고 10월 31일 저녁때 교당(敎堂)[천도중앙대교당-경운동] 누각(樓閣) 위 응접실에서 저녁을 먹던 일을 쓰신 이가 계시지요? 나야말로 그날저녁 일은 이랭을 두고잊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 전선(全鮮) 야구대회 첫 시합이 흥화문 대궐 안에 있던 날이었지요. 교당 그 깨끗한 응접실에서 여러분이 손수 설비(設備)해 놓은 식탁이 마제형(馬蹄形: 말발굽모양)으로 놓이고, 그 위에 곱고도 고운 국화분(菊花盆)이 놓이고, 그리고 소년회 대표라고 여러분이 20분인가 계시고, 그리고 소년회 [지도위원] 선생님 여러분과 나와 저녁을 맛있게 먹고, 그리고 그 찬란한 전등 밑에서 느긋느긋이 마음껏 속 이야기를 하였지요. 나는 그날 그 자리에 불려 가서 그중 중앙의 석(席)에 앉으라니까 앉고, 그리고 여러분 중의 대표의 인사를 듣고 처음 그날 잔치의 주빈(主賓)이 나인 것을 알고 정말 놀래었습니다. 


선생님과 의논도 없이 여러분끼리만 어린 귀에 어린 입 살을 대고 소근소근 한 기획, 주최 그것이 이렇게 식(式)을 갖춘 훌륭한 잔치일 것과, 또 그 주빈이 나일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였던 (어린이들이 아직 그만큼 규모 있는 일을 하지 못하리라 하여) 이만큼 나는 기꺼웠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야말로 전에 경험 없던, 내 일신으로 어떻게 지탱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날 이전의 우리나라에 어느 때 어느 곳에 그러한 준귀(尊貴)한 회합(會合), 초대식[이] 한 번이나마 있었겠습니까? '장차의 새 조선을 건설하고, 또 지배할 우리 동생, 우리 소년들도 이렇게 길리우고, 이렇게 크면!!' 하고 생각할 때에 나는 얼마나한 희망과 만족을 일시에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밖에는 비가 좍좍 오시고, 그만큼 그 실내의 전광(電光)은 더 탐탁하고 공기가 더 화(和)로워서 우리는 마음 놓고 느긋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하졌지요?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 고운 꽃 일속(一束: 한 묶음)을 주시고 뜻깊은 부탁과 축사까지 주셨지요. 그리고 뒤미처 한 분씩 한 분씩 내가 일본 가게 되는 것 섭섭한 말씀도 하고 또는 일본 가서 성공하라는 부탁도 말씀하고, 또 혹은 일본서 고독히 지낼 일을 동정(同情)한다고 망향가(望鄕歌)를 부르신 이도 있지요.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사랑스러운 여러분을 떼쳐 놓고 먼--먼 해외로 갈 생각을 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습니다.

소파의 환송회가 열린 천도교중앙대교당..환송회 장소인 2층(총4층 중)은 지금도 사무실로 쓰인다. 


그 후에 듣고 알았습니다만, 그날 비용은 여러분의 어린 주머니 돈을 모은 것이고, 그리고 어떤 음식은 특별히 여자부의 어느 회원의 댁에서 손수 가져온 것이라고요. 아아, 아무것으로도 구하지 못할 어린 가슴의 타는 듯한 정성으로만 된 그날의 잔치를 언젠들 내가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날 내 가슴속에 여러분이 심어 주신 영(靈)의 새싹 하나는 영구히 영구히 점점 크게 곱게 자랄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서울을 떠나던 11월 29일 이른 아침때 여러 곳 고별에 시간이 늦은 내가 인력거를 몰아 남문(南門) 정거장에 내리니까 천만의외(千萬意外: 천만뜻밖)에 학교에 가셨을 여러분이 미리 나와 기다려 준 것을 나는 늘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거장까지 나와서 보내 주신 정은 만만감사한 일이나, 학교 시간을 등한히 하는 것을 몹시 내심(內心)에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의 학교 선생님의 부탁하신 명함(名啣=名銜)을 내게 전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여러분이 서냉님의 승락을 얻으신 것임을 짐작하고 안심하였습니다.


아아,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는 거기서 부산, 부산서 시모노세키(下關), 시모노세키에서 동경까지 4천여 리를 오도록 여러분의 사진을 이(易)로 놓지 못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곧 대총(大塚)에 있는 우리 천도교청년회관에까지도 돌아오는 길에부터 출영(出迎) 나와 주신 많은 이에게 이번 서울 다녀온 선물 여러 분 이야기를 먼저 하였습니다. 그리고 회관에 와서 여러분이 주신 평양율(平讓栗)을 많은 회원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후부터라고는 어찌도 적적하게 쓸쓸하게 지내는지 아지 못합니다. 밤이면 밤대로, 낮이면 낮대로 쓸쓸하면 쓸쓸하니만큼 얼마나 여러분을 그리우는지 모릅니다. 지난번 인일기념(人日紀念: 8월 14일 - 해월 최시형 선생 승통 기념일 - 역자) 날은 편지하시는 이마다 내 생각을 하고 섭섭하다 하셨지요. 거기서 섭섭하신 여러분보다도 여기서 가고 싶어 하던 나는 몇 배나 더항ㅆ습니다. 그러나 신문의 보도로 각 지방 우리 소년회에서 가극도 하고 강연도 하는 소식을 듣고 무한 기꺼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동무가 점점 늘어가는 것이 반갑고 기꺼운 일이며, 동시에 아직 소년회가 조직되지 아니한 지방에도 자꾸 조직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조선적으로 소년운동을 일으키어서 소년은 소년으로서의 일을 하면, 또 소년의 세계를 점점 넓혀 가야 될 것입니다. 

1926년 무렵 소파방정환(앞줄 오른쪽에서 2)과 개벽사의 핵심 편집진. 뒷줄 왼쪽 2번째가 초기 천도교소년회 대표이던 이정호. 성장하여, 소파를 뒤이어 <어린이> 편집장을 지냈다

아아, 사랑하는 여러분! 건전히 활동하십시오. 앞길이 넓고도 찬란합니다.


의외에 쓰러연 것이 길어져서 종이가 얼마 아니 남았습니다. 여러분께 소식보다도 부탁하려든 말씀을 요 다음에 다시 쓰리고 하기 편지하시는 이마다 늘 여기서 나의 지내는 양(樣: 모양)을 물으시니, 쓰지 못한 것을 이제 여기에 써 드리겠습니다.


지나간 해 하기 방학이 끝난 후 남보다 늦게야 동경에 와서 세방(貰房)을 구하다 못하여, 학교는 개학은 되고, 하는 수 없이 급한 대로 전차 길가 집을 빌려 임시로 있던 곳이 전차 소리에 집이 흔들려서 하도 곤란하다가 이번 정월 초6일에야 좋은 집을 얻어 옮겼습니다. 동경(東京) 소석천구(小石川區) 중부판정(仲富坂町) 19 구미천(久米川)이라는 일본인의 집입니다. 나 다니는 동양대학(東洋大學)에서 퍽 가까운 곳이고, 우리 청년회와는 서울 우리 교당에서 대한문 앞까지 만합니다. 지형이 퍽 높은 조그만 산 밑엣집 2층이어서 시원하고 볕이 잘 들고 깨끗하고 몹시 조용합니다. 

1921년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회의 광경. 기둥 바로오른편, 앳된 얼굴이 소파 방정환으로 보인다(필자가 최초로 발굴)


동과 남이 틔어서 미다지 창이고, 이 방에서 내 책상에 앉은 채로 앉아서 동경 시가가 저 아래 내려다 보입니다. 퍽 높은 곳이어서요. 이렇게 조용하고 깨끗한 방에 들어앉아 책이나 보다가 저녁 때가 되면 50촉 밝은 전등이 다섯 시도 못되어서 환하게 켜집니다. 사면(四面)이 고요하고 밤만 깊어 가는데 육첩방(六疊房) 안에 50촉 등이 빛나는 조용한 맛은 더욱이 정다운 기분을 돕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유리창으로는 시가의 전등불이 꿈같이 끔벅끔벅 보이고 이 속에서 청국 국수장수의 불면서 지나가는 호적(胡笛) 같은 소리가 몽환곡(夢幻曲)같이 들려오면 또 나는 그 소리와 그 정경에 마음이 끌려서 어느덧 고국 꿈을 꾸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덧 높다란 2층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내 방을 '몽환(夢幻)의 탑(塔)' '몽환(夢幻)의 탑(塔)'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고요한 밤에 잠 아니오는 눈으로 깜박깜박 전등 불친 나는 시가를 내려다보고 앉았으면, 정말 몽환탑이라 하게 됩니다.


이 집 주인은 생화(生花) 교수(敎授) 하는 사람이어서, 늘 출장 교수를 하느라고 낮이면 집은 텅 비어 있고, 음식은 자취를 합니다. 조그마한 솥에 쌀을 씻어 담아서 와사(瓦斯) 불에 올려 놓으면 직시(直時) 밥이 되니까요. 저녁에 새로 지어 먹고 남겨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데어 먹고는 학교로 갑니다. 반찬은 의례 조선식으로 두부찌게, 깎두기, 무나물 등류를 역시 내 손으로 만들어 먹습니다. 퍽 재미 있어요. 이러고 밥 지을 때마다 성미(誠米: 천도교인들이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숟가락씩 뜨서 정성의 심고를 드리고, 모아서, 한 달에 한번 교회에 헌납하는 쌀)도 지성껏 뜹니다. 주인 일녀(日女)가 보고 웃겠지요?


대강 이렇게 쓸쓸하나마 쓸쓸한 중에도 억지로라도 재미를 붙이고 학생 시대의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종이도 모자라거니와 손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께 부탁할 것 몇 마디는 내(來)월호 편에 쓰기로 하고, 아직 이만 그치켔습니다. 내내 건전히 크시기 바랍니다.


학년 진급 시험이 가까워오니까 복습에 곤(困)하시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 후 얼마 아니하여 즐거운 즐거운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4월 5일, 천도교 창도 기념일)이 옵니다. 따듯한 새봄과 함께 즐거운 천일기념이 점점 가까워 옵니다.


63.1.19 눈 오는 날 고국을 그리우며 [*63년 = 1922년, 천도교 연호인 布德63년을 말함]  



..소파가 쓴 이 글을 읽고 천도교소년회 대표 이학인이 쓴 답신 편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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