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 <천도교회월보> 제128호(1923년 1월호)
[역자 주] 방정환은 1920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서 1923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즉 천도교소년회에서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던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까지 소파 방정환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923년 3월호로 창간한 <어린이>지도 소파가 일본에 체류하던 당시 <색동회>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창간호를 발행하였습니다. 경성에서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던 천도교소년회의 1922년 1월 당시 대표는 이학인(1903년생)이었습니다. 이학인은 평북 태천 출신으로 1914년에 입교하여, 천도교소년회에서 활동하고, 1930년대에는 일본에 유학하며 천도교동경종리원 종리사(교구장)과 천도교청년당 동경부 감찰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아래 글은 당시 서울(경성)에 있던 이학인이 동경에 있는 소파 방정환에게 보내는 글입니다. 소파를 '선생'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 ] 안의 글자는 역자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선생님 신유년[1921]을 섭섭히 송별하자 다시 우리 몸을 떨게 하던 겨울을 송별하였습니다. 반가워라 임술년[1922]이 돌아오자 일기(日氣)가 따뜻한 첫봄(初春)이 돌아왔습니다. 신년(新年)과 신춘(新春)을 아울러 맞는 저희들은 더욱 새 사람이 되려고 하며, 새로운 꽃이 피려고 합니다.
선생님! 저 정변[庭邊-마당 가]의 사쿠라는 새 꽃이 또 피려고 꽃봉오리가 차차 커 갑니다. 그 꽃이 피면 각색(各色) 나비가 너울너울 춤 출 터이지요.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 꽃에 따뜻한 키쓰를 주며 무슨 불평을 가졌던 사람들도 그 꽃으 보고 평화이 웃음을 웃을 터이지요. 더욱이 꽃 같은 처녀의 부드러운 손으로 그 꽃을 어루만지며 앵도(櫻桃) 빛같이 불그러한 입술로 그 꽃에다가 사랑스러운 키쓰를 줄 터이지요. 그 꽃은 사람에게 평화를 주고 즐거움을 주는 그 꽃입니다.
저희는 아무 병 없이 슬픔 없이 괴로움 없이 그 꽃과 같이 피려고 늘 배우며 뛰놀며 커 갑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금전(金錢)이 없는지 의식(衣食)이 없는지 슬픈 울음 소리가 늘늘 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천국(天國)에나 온 것같이 즐겁게 뛰놉니다. 이 세상은 저희 천지(天地) 같습니다.
선생님! 우리 조선 사람은 왜 진실한 사람이 못 되는지요. 희망이 많은 자기의 딸을 왜 기생으로 팔아먹으며 희망이 많은 자기의 자제(子弟)를 왜 학교에 아니 보내는지요. 저희들은 그런 것을 보면 마음이 좋지 못하여요. 또 우리 학교 선생님 한 분은 학생들에게 제일 무섭게 굴더니, 일전에 어디서 강연할 때에는 학생과 선생이 한 동무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술 담배 안 먹는다고 하더니, 예배당 문전(門前)만 나가면 왜 담배와 술을 먹는지요. 그리하고도 족히 천당에 갈 터인지요. 또 천도교인은 인내천(人乃天)이니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니 하면서 사람을 한울과 같이 대접하지 않는지요. 그리하고도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이 될까요? 모두 다 말뿐입니다.
남녀 평등을 부르짖는 그 사람은 왜 자기 여편네를 때리며 이년 저년 하는지요. 또 사회를 개조하느니, 세계를 개척하느니 하는 그 사람은 왜 기생집, 술집만 가는지요. 그리하고도 족히 남녀평등이 되며, 사회를 개조하며, 세계를 개척하게 될 터인가요?
저희는 늘 늘 기도하기를 '귀솔께 떠들지 말고 손과 발을 놀리며 뜨거운 땀을 흘리며 한 가지라도 실행하소서!' 하고 빕니다. 말 아니하고라도 사람을 한울과 같이 대접하는 그 사람이 포덕광제할 사람이며, 놀새없이 사회를 위하여 노력하는 그 사람이 참으로 사회를 개조할 사람입니다. 말로만 몇 백년, 몇 천년 떠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금주회(禁酒會)니 금연회(禁煙會)니 하고 떠드는 것을 보면 술담배 안 먹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 회 문전만 나서면 또 먹습니다. 그것도 금주 금연회인지요. 아아 선생님, 모두 말뿐입니다. 일전에 선생님은 이런 글을 주셨지요.
앞줄(좌->)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 뒷줄(좌->)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세상은 오농 믿지 못할 것뿐이요 허위뿐이고 모순뿐이고 불공평뿐이고 백에 한 가지 믿을 것이 없습니다. 도무지 사회란 것이 분명 확실한 것이 못 되고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결코 사회를 믿고 목표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자기는 자기에 철저하여야 합니다. 세상 아무것도 믿지 말고 자기는 자기로서만 걷고 자기의 갈 곳만 가야 합니다.
라고 하셨지요. 선생님! 저희들은 금주회니 금연회이니 하는 것이 시끄러워서 미리 숨과 담배를 아니 먹으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허위와 공상 많은 사람이 안 되려고 합니다. 씨 있고 깨끗하고 확실하고 철저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고 배우며 점점 커 갑니다. 저희는 장래에 나아가 입 다물고 무엇이든지 실행하고자 합니다. 저희는 실행이 천국인 줄 압니다. 이 쓸쓸하고 허위만 남은 이 세계라도 천국을 만들기까지 실행하면 지상천국을 베풀 줄 압니다. 선생님, 노아자(魯亞子)[춘원 이광수]라는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누가 '너는 무엇이냐?' 하면 '나는 조선의 운명이요'라고 대답하라"고 하였더이다. 저희는 노아자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조선의 운명이 되려고 합니다.
저희는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쓸쓸하고 냉랭한 이 사회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개척할까
기울어져 가는 이 사회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바로잡을까
봄이 오지 못하는 이 사회에
우리가 봄이 오게 하자
말로만 실행하는 이 사회를
우리가 실지로 실행해 보자
소년아 소년아 모이여라 엉키어라
꼬이 피려는 우리 소년회로
한울님도 딴 어른이 아니다
우리도 한울님이 될 수 있다
소년아 소년아 우리의 손발로
우리의 사회를 개조해 보자
손생님! 저희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배우며 뛰놀며 커갑니다. 저희는 장차 자라나서 위에 노래 부른 것을 실행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선생님! 이 눈 오는 날 고국을 기리워하며 쓰신 '몽환(夢幻)의 탑(塔)에서'[다음에 소개함]라는 글을 보고 저희는 선생님을 대한 것같이 기뻐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제 꿈에 선생님이 오셔서 웃는 낯으로 "여러분에게는 대신사[수운 최제우 선생] 같은 이도 있고 독일 황제 카이제르 같은 악마도 있고, 공중에 뜬 비행기도 있고, 여러분에게는 없는 것이 없으니, 대신사가 되고자 하거든 대신사 되기까지 공부하면 틀림 없는 대신사가 될 수 있고, 카이제르 되고자 하면 카이제르가 되기까지 공부를 하면 틀림없는 카이제르가 될 수 있고, 비행기를 제조하여서 타고 날아다니고자 하거든 비행기를 제조하기까지 공부를 하면 능히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닐 터입니다." 하고는 큰 기선(汽船)을 타고 미국 유학 가신다고 망망한 창해(蒼海)를 건너가겠지요. 그리하여 우리들은 손수건을 바람에 날리며 만세를 불렀지요. 우리 형님께서는 잠자면서 무슨 만세를 부르느냐 하면서 깨우겠지요. 눈을 떠 보니까 꿈을 꾸었어요.
선생님! 동양대학(東洋大學) 높은 학교에서 철학을 연구하지요. 우리는 언제 커서 선생님과 같이 외국으로 유학 갈는지요. 저희들은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선생님 자취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취미(趣味=재미)있다지요. 저희는 배우며 뛰노는 것이 제일 제미있습니다.
선생님. 작년에 우리 조선동포를 위하여 그 뜨겁고 괴로움을 불구하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요. 금년에도 많이 많이 노력을 하여 주옵소서. 선생님이 너무 지리하겠기에, 이만 하고 붓대를 놓습니다. 겨를 있으면 차호에 말씀 드리기로 하옵고요.
선생님이 사회를 귀히 여기거든
저희를 많이 사랑하여 주옵소서!
삼천리 강산에 불그레한 무궁화
만발하게 피려고 준비중입니다.
저희들은 이 무궁화같이 피려고
배우며 뛰놀며 점점 커 갑니다.
익선동 61 고요한 방에서 '몽환의 탑에서'란 글을 읽으며 두어 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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