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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5.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34)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2편 인생관

제4장 생사 문제


제1절 종교적 의식으로 본 사후관

  

생사문제는 인간의식의 최초 의식인 동시에 최후 의식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 점은 자유의지와 자연율(自然律)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이 자연율과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사람은 모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지로는 이렇게 하고 싶다든지 이렇게 되어야 행복이 되리라 하는 요구도, 자연율로는 도저히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금년은 가뭄[旱魃]이 심하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로써 요구하는 일이지만, 자연율은 도저히 이 요구에 맞추어지지 않는 것이다. 


당초부터 사람의 의식이 자연율에 절대 맹종적으로 복종하는 동물성과 같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연율이 자유의지에 따르든지 하였으면 좋을 일이지만 어떤 까닭인지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조화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으므로 여기서 심적 고통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이 모순 가운데 제일로 절대 부조화를 가진 것이 생사문제이다. 자유의지로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연율은 일호(一毫)도 이에 조화를 주지 않는다. 메치니코는 이를 가리켜 '인간의 부조화(不調和)*라 명명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이 모순을 조화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생긴 것이 종교생활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종교는 대개가 사후관념에 그 기초를 둔 것이다. 즉 종교는 사후관념이 가장 중요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어느덧 세상은 구식의 사후관을 신앙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화적, 우화적[寓言的] 사후관념은 현대 사람에게는 확실한 만족을 줄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가면은 일종의 미신 또는 옛날사람들의 가상적 관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에서 과학적 해석이 생기고 철학적 이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종교의 이른바 사후관이란 것은 명사만 다르고 방법만 다를뿐, 어느 것이든지 한가지로 영혼의 개체적(個體的) 인식을 인정한 점은 동일하다. 영혼이라는 개체가 사후에도 우리의 생전인식을 계속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예수의 천당설이라든지 불교의 열반(涅槃) 또는 윤회전생설(輪回轉生說) 같은 것은 가장 대표적 걸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대표적 걸작도 오늘날에 사람에게는 일종의 우화[寓言] 비유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은 새로운 사후관을 요구하게 되고 오늘날 사람의 이상에 맞는 사후관을 기다려 인간의 모순을 해결코자 한다. 그러므로 사후관은 인간의 최초의식이 되는 동시에 최후의식이 된다 할 수 있다.


(다음 "제2절 유전설로 본 사후관"에 계속)


[편역자주] 인지부조화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인지부조화 : 우리의 신념 간에 또는 신념과 실제로 보는 것 간에 불일치나 비일관성이 있을 때 생기는 것으로,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개인이 믿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간의 차이가 불편하듯이 인지 간의 불일치가 불편하므로 사람들은 이 불일치를 제거하려 한다. 인지 부조화 이론에서 나온 결과 중 하나는 자신의 태도(나는 따분한 일은 좋아하지 않아)와 일치하지 않는 과제(적은 보수를 받고 무엇인가 따분한 일을 하기)에 참여하면 태도가 행동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일치에서 생긴 ‘부조화 압력’ (그 과제가 정말로 그렇게 따분하지는 않아)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실험심리학용어사전, 2008., 시그마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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