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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02. 2020

유범(流帆)

방정환, <개벽> 창간호(1920.6.25) 수록

[소설 <유범>은 방정환이 <개벽> 창간호에 '목성(牧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3.1운동 직후 학생 시위를 기획하는 세 사람의 동지(친구)들 사이의 애정과 번민을 소재로 한다. 풋풋한 청춘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삭제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문 전체를 싸고 도는 봄"을 갈구하는 문제적 작품이다. 이러한 운동적 상황 외에 작품 전편에 걸쳐 당대의 사회상도 흥미진진한 상상력을 발동케 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3.1운동 이후 학생들의 사회(독립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도 있다.(사실은 그 장면은 민족대표33인의 참여 과정을 모티프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역자 생각). 여기서 유범은, 인왕산 자락에서 바라보이는 '한강'을 따라 흘러가는 돛배를 말한다. '帆'은 돛이기도 하고 작품 내에서는 '깃발'로 읽히기도 한다. '깃발'은 당연 '태극기'를 연상케 한다.][현대어역: 박길수] 



<개벽>에 게재된 소설 '유범' 4행이 일제 당국에 의해 삭제되었다. 

따뜻한 봄 어느 토요일 오후이다. 

나날이 포근해지는 봄볕은 이날도 따뜻이 평화롭게 비치어 붉으락푸르락 꽃 피려는 시(詩) 같은 산 밑 동리(洞里)가 꿈속 나라같이 고요히 있어, 봄볕에 빛나는 모양이 마치 가는 소리로 양춘(陽春)의 곡(曲)을 연주하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봄이다!’ 

모두가 봄이다. 

산도 봄, 물도 봄이고, 사람도 봄이고 공기까지도 봄 공기이다. 

그 부드럽고 따사한 봄바람에 섞이어, 

가장 유창하고 가장 평화로운 노래 소리가 독립문 전체를 싸고돈다. 

그것은 무악(母嶽)재 고개 왼쪽 인왕산 꼭대기 성벽 끝(곱은 성) 위에 세 사람 청년 남녀가 천사같이 서서 양춘(陽春)이 온 것도 알지 못하고, 갑갑한 속에서 지내는 형제를 위하여 높이 부르는 위안의 노래 소리였다.


망향가도 마치고 이제 악몽이라는 애련한 옥중가(獄中歌)를 마치자, 혜숙(惠淑)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었다. 

들고 섰던 수첩을 접어 양복주머니에 넣으면서 중식(重植)이가 

“오늘은 그만 내려가지.” 

하고 돌아가기를 재촉하니, 혜숙이가 수건을 접으면서 팔짱을 끼고 서서 산 밑 붉은 담을 힘없이 보는 동호(東昊)를 향하여, 

“내려가시지요.” 

하고 자기는 중식이 앞에 서서 내려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 산 밑 담 안을 들여다보며 잠잠히 섰던 동호는 말없이 발을 돌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내려간다. 

혜숙이는 스무 살이 못 되어 보이는, 흰 얼굴이 둥글고 눈 시원하게 생긴 여자로, 지금 어느 고등학교에 통학하는 학생이고, 중식이는 그 오라비로 OO전문학교 법과에 통학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동호는 중식의 가장 친한 친구(信友)이니 어느 법학교에 통학하는 청년이다. 

소솔의 지리적 배경 

키만큼씩 자란 소나무 사이로 이리 구불 저리 구불한 성벽을 끼고 내려오는 세 사람은 모두 잠잠하다.

앞에 선 혜숙이가 두 손을 들어 낯을 스치는 솔가지를 이리저리 헤치어 가면 똑 그대로 중식이는 뒤를 따르고, 동호는 중식이의 발자국을 그대로 디디려는 듯이 따를 뿐이다. 

한참이나 잠잠하고 내려가다가 이때껏 말없이 있던 동호가 

“그 수건을 흔들던 사람이 아마 신우석(申禹錫)이지…?” 

하니까 중식이가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알 수가 있나?” 

한다. 

“글쎄, 사람은 많지만은 방이 그 방이니까….” 

“바로 그 방인가?” 

“응, 그 방이지….” 

하고는 잠깐 후에 

“그 방에 지금 셋이 있나 둘이 있나 그렇지….” 

다시 잠잠하여졌다. 세 사람은 벌써 선바위재를 훨씬 지나왔다. 

잠잠히 오던 혜숙이가 

“에그, 벌써 저녁 차입들을 하고 와요.” 

하는 소리에 본즉 성 바깥 언덕길을 넘어 은행나무 밑을 지나 터진 성 길을 밟아 부인네가 2, 3인씩 차입 식기를 들고 올라온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면서 중식이가 양복 앞자락을 헤치고 시계를 꺼내 보더니 

“에그, 벌써 네 시 오 분 전인 걸….” 

한다. 

이제 얼마 아니 있어 오늘도 저문다. 감옥 굴뚝에 무럭무럭 쏟아지던 검은 연기도 지금은 조금씩조금씩 흘러나온다. 


서대문감옥 전경.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뷰는 대체로 이 정도일 듯하다.

세 사람은 성 터진 곳 사직골과 독립문의 분기점인 성 길에 이르렀다. 중식 이와 혜숙이는 성 밖 행촌동으로, 동호는 성안 도렴동으로 세 사람이 헤어지려면 이곳에서 헤어질 곳이다. 

세 사람은 할 말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아서 머뭇머뭇하다가 길 옆 성돌 우에 우뚝이 섰다. 모두 성 밖을 향하여. 

금화산(金華山) 위에 가까워 온 석양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부드러운 풀밭 위에 비스듬히 길게 던졌다. 봄날은 저물기도 평화롭게 저문다. 

어디서인지 따뜻한 남국을 노래하는 듯한 버들피리 소리가 봄 소리답게 느리게 들려오고, 무악재 비탈길에 삿갓 쓴 나무꾼들이 소와 함께 한가히 넘어간다. 

세 사람은 성벽 위에 서서 원근의 춘경을 바라보고 있다. 

“저기 저 허연 것이 무얼까요? 오빠.” 

혜숙이가 손을 들어 남대문 정거장 쪽을 가리킨다. 

“어대?” 

하고 중식이가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을 주시한다. 남대문 정거장 그 넘어 동막(東慕) 벽돌 만드는 큰 굴뚝 옆에 무슨 집인지 서양 철(鐵) 지붕이 있고, 그 뒤는 푸른 수목이 있고 그 푸른 수목 뒤로 무엇인지 허연 것이 보인다. 

“그게 무슨 기(旗) 아니게?” 

“거기 무슨 그렇게 큰 기가 있겠어요?” 

“글쎄, 그래도 기는 기야….” 

이러는 판에 옆에 묵묵히 섰던 동호가 

“그게 기가 아니라 돛입니다. 거기가 물이 아니 보여 그렇지 한강일 것입니다. 배에 돛 달린 것이오. 저것 보시오. 그동안에 벌써 이 아래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배는 벌써 저만큼 갔습니다.” 

딴은 돛인 것이 분명하다. 돛이 아니면 저렇게 모르는 동안에 위치가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빠는 기라고….” 

“그럼 왜 자기는 몰랐던가?” 

셋이 다 같이 웃었다. 그러나 중식의 웃음만은 그리 쾌활치 아니한 쓴웃음이었다. 

동호는 다시 

“세월의 흐름이 저렇게 빠른 것입니다. 저 배가 모르는 동안에 위치가 변해진 그만큼 세월이 모르는 동안에 지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을 이룰 기회라는 것도 저렇게 모르는 동안에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이 잠시 동안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이러고 있는 동안에 어떠한 기회, 어떤 세월이 모르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네-. 정말 너무나 세월 가는 게 무정해요.” 

혜숙이가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조금 돌리면서 숙인다. 

“그야 세월 가는 것이야 빠르지. 그러나 그것은 세상 전체의 일이지 그중에 어느 누구에만 한해서 그렇게 빠른 것이 아니니까. 이 세상, 이 지구에 생존하는 사람으로서 인력으로 어찌하지 못할 그런 것을 개탄해서야 소용 있나? 세월 가는 것이 빠른 것만 개탄하려 해서야 잠도 못 자고 쉴 새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세상 흐름과 함께 병행한다 하면 며칠 가서 그 육신이 파괴될 것이냐 말이지….” 


중식의 이 말에 동호는 잠자코 서서 대답을 하려도 않으며 그는 강 넘어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혜숙이는 어쩐 일인지 숙인 채로 있는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세 사람은 다시 잠잠히 서 있다. 해는 산 윗선과 닿았다. 하늘이 점점 불그레해 온다. 

행촌동, 송월동, 옥천동, 관동 일대에 저녁연기가 오르고 은행나무 밑 잔디에 온종일 널었던 유지(油紙)를 노인 두 분이 거두기 시작한다. 

이윽고 동호가 먼저 성 길로 내려서면서 

“자-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하니까 중식이가 

“가지!” 

하면서 따라 내려서매, 혜숙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시원히 들지도 아니하고 중식의 뒤를 쫓는다.

“집에 아니 다녀 가려나?” (중식) 

“바로 가지-. 꽤 늦었는데…. 모레 학교에 그것 가지고 갈 터이지? 주의해 하게….” (동호)

“염려 말게. 우리 학교는 염려 없네.” (중식)

“혜숙 씨! 만만(萬萬) 주의해 하실 줄 믿습니다.” (동호)

“네-. 감사합니다.” (혜숙)

허리를 잠깐 굽혀 인사하였다. 

“야-. 그러면… 내일 또 나올 터이지? 내가 들어갈까?” (중식)

“내가 나오지. 오후에.” (동호)

이렇게 하여 중식이와 혜숙이는 성 밖으로, 동호는 성안으로 헤어졌다. 


중식이는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롱펠로우의 시집은 손에 들었지마는 그 시집 책은 펼 생각도 없이 멀건이 걸어서 은행나무 밑에 이르렀다. 무엇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산보하러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머리가 무겁고 갑갑하므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머리가 흐리고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걸어서 성 위로 올라가서 반반한 성 돌 위에 앉았다. 경성 시가의 찬란한 전등이 크나큰(宏大한) 조명과 같이 눈앞에 보인다. 

‘아, 이 시가(市街). 이 속에 움직이는 몇 십만의 인물 그 속 그 틈에 섞이어 남모르는 큰 활동을 나는 동호와 함께 시작한다. 그렇다. 그것은 과연 상쾌하고 용감하고 가치 있는 활동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오면 잠시나마 모든 번민을 잊어버리고 정신과 원기가 새로워지고 마치 눈앞에 보이는 크나큰 시가가 자기 것같이 자기의 손에 좌우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아-. 그 협력자인 동호는 지금 저 도렴동에 있다. 이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는 사람 많은 세상, 자기의 일을 방해하고 자기를 침해하려는 인물 많은 세상에서 다만 하나 믿고 의논하고 손목 쥐고 끝까지 일할 친우 동호…. 

그러나…. 아, 그러나 혜숙에게 대한 자기의 마음이 만일 연모(戀)라 하면! 사랑(愛)이라 하면! 유일한 친구인 동호는 사랑의 적이다. 

아아, 대의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할 친우를 연적(戀敵)으로 보게 되는 비열한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지고도 그래도 무엇을 하겠다고…. 

아니다. 아니다!! 혜숙이는 나의 동생이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부르짖었으나 그러나 동호의 편지가 혜숙에게 있는 것을 본 후부터는, 동호의 말에 혜숙이가 찬동하고 혜숙의 말에 동호가 귀를 기울일 때마다 좋은 심기는 가지지 못했다. 금하려도 금치 못할 일종 질투의 마음을 아무리 해도 누르는 수가 없었다. 

동호 같은 매부를 갖게 되면 혜숙이도 얼마나 행복할지 모르고, 나도 얼마나 안심되고 기쁠지도 모른다. 가장 사랑하는 혜숙이를 가장 믿는 친우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 그러나 지금 와 보니까, 자기의 혜숙에게 대한 연모의 생각도 남의 아무것보다도 지지 않는 것이었다. 혜숙이, 혜숙이…. 내가 어떻게 혜숙이와….’

이렇게 헤매는 중식의 머리에는 지금 자기 집 안방 전등 밑에서 책 보고 있을 혜숙의 모양이 떠돈다. 그리고 뒤미처 어렸을 적 일이 꿈속같이 생각난다. 


소설 속 공간적 배경이 되는 행촌동의 오늘날 모습... 중식이, 동호, 혜숙은 이 성곽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지금부터 꼭 13년 전 중식이가 일곱 살이고 혜숙이가 여섯 살 되던 해, 꽃 지고 앵두 익던 첫여름 어느 날이다. 

집안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홀로 되신 어머니 한 분 손에 귀엽게 자라는 중식이가 어머니 상 앞에서 늦게야 아침을 먹고 뒷동산에 올라가 홀로 놀고 있는데, 일전에 새로 이사해 온 옆집 동산에서 혼자 풀잎을 하나씩 둘씩 따고 있던 계집아이가 철망을 붙들고 넘겨다보며 

“이애, 너 그거 뭘 하니?” 

하고 물으므로,  

“이거? 깜팽이 돈 만든다. 동그랗게 깨트려서….” 

하고 대답하느라고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건 만들어 무엇 하니?” 

“많이 만들어 돈치지….” 

“이애, 그것 고만두고 이리 와 비사치기하자, 응? 여기서 말 만들어 가지고…. 싫으냐?” 

“그럼 네가 이리 넘어오너라. 우리 집 동산이 앵두도 많고 넓지….” 

“나는 싫다. 그까짓 앵두만 많으면 좋은가. 꽃도 없으면서…. 네가 이리 넘어오너라. 내 철망을 들어줄게-.” 

“싫으면 그만두어라. 그까진 비사잡기 아니하면 죽나? 나는 돈이나 치겠다.” 

하고 중식이가 돌아서니까 그 소녀는 그만 섭섭한 듯이 

“이애. 나는 가려 해도 우리 어머니가 꾸중하실까봐 그래….” 

“어, 오너라. 응? 어서….” 

하면서 중식이가 밑의 철 줄을 발로 밟고 그 위의 철 줄을 손으로 번쩍 들고 

“자- 어서 넘어 오너라.” 

하니까 소녀는 주저주저하다가 필경은 넘어왔다. 

그래서 두 아이는 의좋게 놀았고 점심때가 되는 줄도 모르는데 뒤꼍 장독대에 고추장 푸러 오신 중식의 모친이 

“이애, 점심 먹어라.” 

하시며 소녀를 보시더니 

“이앤 웬 애냐?”

고 물으시므로 이웃집 아이라고 했더니, 귀여우신지 같이 와서 점심 먹고 놀라 하신다. 소녀는 더러워진 손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어 머니가 꾸중하셔요.” 

한다. 

“아니다. 괜찮다. 내가 너의 어머니보고 말해 줄 터이니 중식이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아라. 응?” 

“싫어요. 매 맞아요.” 

“아니야. 내가 있다가 너의 어머니보고 말하면 매 안 맞는다. 어서 오너라.” 

이렇게 모친은 소녀를 데리고 와서 상추쌈 해 점심을 먹이시면서 기쁜 듯이 웃으며 보고 계셨다. 

조금 후에 뒤꼍에서 소녀 찾는 큰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고 소녀는 손에 들었던 상추를 도로 놓고 그리고 얼른 일어나지는 않고 앉아 있다. 그때 중식의 모친이 뒤꼍으로 돌아가니까 울타리 저쪽에서 부인 하나가 넘겨다보며 

“거기 우리 집 계집애 안 갔어요?” 

한다. 

“예- 왔습니다. 와서 놀기에 불러서 지금 점심을 좀 먹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귀엽게 생겼어요?” 

이렇게 하여 또 모친과 모친이 사귀었다. 그래서 알고 보니까 새로 이사 온 그 소녀의 집도 과부의 집이라, 부인 홀로 외로이 소녀 하나를 귀엽게 기르며 지내는 집이었다. 

그래서 사귄 지 열흘쯤 될 때 울타리 하나를 두고 사는 과부와 과부는 서로 형제의 의를 맺고 살림까지 같이 하다시피 되었다. 따라서 소녀와 중식이도 남매가 되어 6세인 소녀가 7세인 중식이를 오빠로 부르게 되었다. 그 소녀가 혜숙인 것이다. 

이렇게 같은 경우에 있던 두 집은 한집 속같이 되어 사이의 울타리까지 터놓고 혜숙의 모친은 중식이를 자기 친아들같이 믿고, 중식의 모친 역시 혜숙이를 자기 딸로 알고 귀엽게 기르게 되었다. 

그렇게 두 집안이 가장 화목하게 지내는데 불행히 이태 후에 혜숙의 모친이 풍병으로 세상을 버리매 혜숙이는 아주 중식의 집에 있기로 된 것이다. 


주인공들이 헤어지는 장소가 이쯤은 아니었을까?.. 행촌동 딜쿠샤 가옥 앞의 은행나무.

친오빠로 믿고 친동생으로 알고 하여 한집, 한 어머니 아래서 길리우기를 10여 년이나 하여 장성한 지금까지 아무 연태(變態) 없이 지나왔는데…. 

작년 봄에 옥에 들어가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지나간 2월에 나온 동호와 일을 의논하게 되자 동호와 혜숙의 교제가 점점 가까워짐으로 인하여 내가 새로운 번민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때까지 내가 혜숙에게 대한 마음이 오라비가 누이동생에게 대하는 그것뿐만 아니었던 것이다. 

‘아, 무서운 연착(戀着)의 마음! 비열한 속정(俗情)! 그 때문에 내가 동호의 의견과 배치(背馳)가 되다니…. 아아, 아니다, 아니다. 혜숙이는 나의 누이다. 동호는 나의 신우(信友)이다. 오오, 내가 이런 마음을 먹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죄이다. 죄인이다. 요즈음 3인이 모일 적마다 내가 자주 동호의 의견에 반의(反意)를 표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의 발동인 줄을 혜숙이도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동호 앞에서는 입을 다물려는 모양이고, 어느 때는 피하기까지 하는가 보다. 아아. 동호와 나와의 우의가 벌어질까 하여 혜숙이는 그렇게까지 하는데…. 아- 나는 나는…! 생사를 같이하려는 친우를 연적으로 보게 되었구나. 아아….’

중식이는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턱밑을 스쳤다. 밤은 벌써 깊어 간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불야(不夜)의 성(城)은 역시 찬란히 휘황(輝煌)하다. 중식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리 번민을 하느냐 하는 듯이 조그만 별들이 천연스럽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는 망연히 창천을 보고 앉았다. 나오는 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표백가의 일절이 새었다. 


나아갈까 돌아갈까 북극광의 아래를 

아라사는 북쪽 나라 가이없도다. 

서쪽에는 해가 지고 동쪽에는 날이 밝아 

오종(午鐘) 소리 들립니다. 저- 중천에 

울기에는 너무 밝고 가기에는 어두워 

먼 촌에 등잔불이 껌뻑거리네.


무슨 마음으로 부르는지 애연(哀然)한 노래 소리는 봄밤(春夜)의 보드라운 야 암(夜暗)을 새어 멀리 음파를 전하는데…. 하늘은 적적 세상은 고요한 속에 밤은 조금씩 조금씩 깊어간다. 


필 듯 필 듯 하던 꽃이 이제는 활짝 피었다. 흰 것은 살구꽃, 노란 것은 개나리, 붉은 것은 철쭉이다. 

개나리와 복사꽃 봉오리 진 가지를 꺾어 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되었다. 

동호는 학교에서 나와 책보를 그대로 던져두고 집을 나서서 사직골 도정궁(都正宮) 앞 한적한 너멍골로 꽃구경을 하며 거닐어 고성의 턱에 이르러 흥화문(興化門) 대궐의 경계인 구석진 잔디 위에 앉았다. 

구석진 곳이니까 성 넘어 다니는 행인도 아니 보이고 그 근처로 오는 사람도 없어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성벽 위라 거기 앉아도 성외 성내가 눈앞에 보인다. 더구나 곱게 아름답게 꽃피고 버들 푸른 시 같은 곳곳이 잘 보이는 것이 동호의 마음을 만족케 한다. 

원래 침묵성인 동호는 집을 나설 때부터 이때까지 입 한 번 벌리지 아니하고 역시 잠잠히 잔디 위에 앉았다. 

성내와 성외를 두루두루 보았다. 여염집 담 안에 한 나무 두 나무 섰는 것이 외롭게 고요히 꽃피어 있는 것이 더욱 흥취가 있었다. 한참이나 보다가 다시 시가를 내려다본다. 모두가 봄이다. 시가도 봄에 싸여 있다. 

아아. 어디서인가 봄 왔다고 느리게 부는 호드기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동호의 일신도 봄다운 느낌에 싸였다. 

“아- 세상은 봄이라고 떠들지만은 내일은 종로 모퉁이에서 또 몇 백의 몸이 얽히겠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던 동호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중식이와 혜숙의 모양이 한데 어울려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다. 분명히 중식의 태도가 때때로 변할 듯이 되는 것은 혜숙이 때문이다. 

혜숙이와 중식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형친제로 알고 자랐다. 20이 넘은 이때까지! 그러나 중식이가 혜숙에게 대하는 마음에는 중식이 자신도 인식치 못하는 별다른 사랑(愛)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그것이 당자(當者)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제3자인 내가 자주 오게 된 때부터, 아니 내가 혜숙이를 사모하게 될 때에, 이때까지 숨겨져 있던 그 사랑이 비로소 발동된 것이다. 그래서 근래 중식이는 그 마음을 억제하려고, 억제하려고 무한 고민하는 중인가 보다. 

아아! 대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불고(不顧)하는 의기 있는 중식이도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는 그렇게까지 속을 태우는구나…. 그러하리라. 지극한 열정가인 그는 의례 그러할 것이다. 대사를 계획하는 우리 사이에 다른 파란은 일으키지 말아야겠고 그렇다고 혜숙에게 대한 마음은 억제하려야 억제할 수는 없고…. 그는 고민할 대로 고민할 것이다. 

아아. 대사를 앞에 둔 우리가 이런 일로 가슴을 태우니 참으로 세상이라는 게 우습다. 무슨 일로 조물주가 사람을 낼 제 정이라는 것을 넣었던가. 사랑의 본질인 정! 그것 때문에 이런 때 이런 일로 번민을 하게 되니, 사람이 세상에 난 것이 이미 죄라고 한 말이 과연이다. 아, 중식 군과 혜숙 씨, 혜숙 씨와 나!

눈치를 안 혜숙 씨도 퍽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나와 중식이와의 우의(友誼)를 상(傷)치 않게 하려 고민하는 것이다. 남모르게 다 각기 속태우는 번민! 이것으로 인하여 세 사람의 사이는 조금씩 벌어져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나는, 이 동호(東昊)는 중식이 남매의 사이를 벌어지게 한 자이다. 나로 인하여 친남매보다 더 의좋게 살아가던 생활이 파괴된다면…. 아! 나는 죄인이다.

아아. 나는 가리라. 중식이 남매의 파란(波瀾) 없는 生活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중식이와 나와의 영원한 우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 엉퀴 중에서 내 몸을 빼리라.

나의 일생의 기념일 풋사랑인 이 사랑을 희생하여 그 남매의 진정한 사랑을 살리리라. 그리고 아무것으로도 바꾸지 못할 신우(信友)를 잃지 말리라.

그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애인(愛人)의 옆에 있으면서 그를 사모(思慕)하는 정(情)을 금할 수 있으랴.

아- 세상은 죄악(罪惡)이다. 정(情)은 죄악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속에서 헤매이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고 양복 윗옷 단추를 빼고 그리고 힘없이 일어섰다.

시가의 소연한 소리는 역시 멀리 와글와글 들리고 남산턱 뾰죽집의 서편 류리창이 석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번득이고 있다.

동호는 다시 돌아서서 성 밑 행촌동을 내려다보며 중식이와 혜숙이를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며 또다시 돌아섰다.

내일. 내일은 또 큰소리가 나고 또 몇이 얽히겠구나. 그래서 또 철창 생활을…. 

오오, 옳다. 내일부터 내 몸을 내 맘대로 어쩌지 못하게…. 오오, 그렇다. 

다시 그네와 만나지 못하게…. 아아, 내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겠다. 그렇다. 그렇게 하자. 그러면 중식이 남매의 사랑도 살리고 신우(信友)를 영원히 잃지 아니하겠다.

이렇게 결심한 동호는 다시 잔디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는 이미 산 뒤에 숨고 불그레하던 여홍(餘紅)이 차츰차츰 사라지며 조금씩 조금씩 희미희미해 온다.

동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볼 때에는 일찍 뜬 별 하나가 깜박깜박 빛나고 있었다.

그날 밤 아홉 시 중식이의 집 건넌방에서 남폿불 하나를 에워싸고 7, 8인의 학생이 내일 일을 의논하는 중이다.

“어찌 했든지 내일 오후 두 시에 맨 먼저 나서서 소리 칠 사람이 있어야겠소. 물론 미리 각오하고….”

이 소리에 의외 의례 남아 있어서 뒷일 할 동호가

“그것은 염려 마시요. 내가 하리다.”

“아니 동호 씨는 남아 있어야 뒷일을….”

“아니오. 뒤ㅅ일은 여러분이 계시니까 나는 안심하고 내일 들어갈 터이올시다.”

“아-니, 동호 씨는 반드시 남아 있어야….”

“아니오. 내가 내일은 하기로 결심하였으니까, 이제 그것은 다시 의논 맙시다. 다른 것 또 의논할 것 없나요?”

“인제 다른 것은 별로 의논할 게 없지마는….”

“그러면 헤어지십시다.” 

이러케 대강 의논을 마치고 일시에 헤어지기도 주의가 되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드문드문 대문을 나서서 컴컴한 골목 속으로 몸을 감추고 헤어져 갔다.


한 20일 후이다.

거드럭거리던 봄철도 이제는 늙기를 시작한다.

꽃으로는 복사꽃이 한창이고, 개나리와 살구꽃은 시들은 지 오래이다.

토요일 오후이다. 세 사람이 토요일마다 가던 곱은 성 위에 가서 중식이와 혜숙이가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길이다.

“동호가 그저 종로에 있는지 이리 넘어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벌써 넘어왔지 이때껏 있겠어요?”

“수부(受付)에 가서 이런 사람 넘어왔느냐 하니까 모른다던걸? 종로에 가 물어보면 일절 모른다고….”

“에이, 깍쟁이 같은 놈들….”

이렇게 동호의 안부를 몰라 하는 중식이와 혜숙이는 어느덧 성 터진 곳에 이르렀다. 전 같은면 늘- 이곳에서 동호와 작별하던 곳이라 이곳 성 위에서 한참이나 머물다가 갔지마는 오늘은 벌써 해질 때가 되니까 그대로 서서히 내려가기로 하였다.

성 밖 길로 내려서서 두 사람은 좁다란 풀밭 길로 행촌동 자기네 집을 향하여 가며 안부 몰라 궁금한 동호 이야기를 하는데, 그네가 천천한 걸음으로 은행나무 밑에 이를 제, 해는 산머리에 걸려 자못 낙일(落日)의 광경이 장관이라. 중식이와 혜숙이는 발을 멈추고 섰다.

이때 지금 두 사람이 지나 내려온 성벽 위에 우뚝이 서서 은행나무 그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는 양을 보고 빙그레- 웃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두 사람이 이야기하던 동호이다. 들어간 지 20일 만에 설유(說諭) 받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동호는 자기가 무사히 나온 기쁜 소식을 두 사람에게 고할 수가 없었다. 나온 줄 알면 또 자주 만나게 되겠고, 자주 만나면 또 세 사람 가슴속에 번민이 생기겠으니까….

이렇게 하여, 사랑으로 사랑을 구한 동호는 모른 체 하고 성 위에 서서 은행나무 그늘 푸른 잔디 우에 자못 화목하게 나란히 섰는 것을 보고 말없이 빙그레 웃고 섰는데, 걸쳤던 해는 아주 숨고 하늘에는 여홍(餘紅)이 불그레 보찻빛을 이루었다.

평화로운 만춘(晩春)!! 동리마다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세상은 저- 끝에서부터 조금씩 어두워 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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