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죽음 문제는 이지적(理知的) 방면에서 분석적(分析的) 해석만으로는 어디까지든지 만족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정적(情的) 또는 의지적 방면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 직접 생사에 영향을 주는 점이 크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의지로서 한번 생사 문제에 대한 단안을 내릴 때 이곳에서 무한의 희열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무한의 비약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삶과 죽음, 얼마나 철두철미한 말이냐! 우주 무궁의 이 시간 중에서, 겨우 이 시간 중에서, 겨우 이시간의 마디에서 이 몸이 생기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요, 이 짧은 이상한 생명이 어떤 순간에서 영원의 적멸로 들어가게 되는 것도 또한 이상하지 않으냐!
그나마도 순간과 찰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고 눈힘 코힘 손힘 피의 힘 내지 사지백체(四肢百體)의 힘을 다하여 자기표현이라는 한 가지 일에 국궁진췌(鞠躬盡瘁)하다가 그 모든 힘을 족히 쓰지 못할 때에 이르러 쾌히 그것의 전부를 발로(發露)하여 세상에 남겨 두고 그 나머지 깍지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흥미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이러한 즐거움을 일러 우리는 '의지의 초월 비약'이라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의 일생 정력(精力)이 외적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요 내적으로 우리 인간 속으로 초월하는 것이다. 곧 성령으로 세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에 힘써 놓은 모든 정력이 인간의 내용에서 초월 영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말한다. 이 대우주의 정력이 그 유동(流動) 온정(溫情)으로 말미암아 전만지고(前萬之古) 후만지금(後萬之今)에 없는 이만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그리하여 우주는 다시 이 무궁의 발전을 영원히 계속하게 하는 수단으로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고마운 운명을 주게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즉 인간이 직접으로 자기의 생명력을 표현하지 못하며 혹은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르러, 또는 인간의 가장 높은 심정이 자기표현으로 나타나는 희열의 전정(全情)을 감상하기 불가능할 때에 이 형체를 우주외 큰 화로[大爐]에, 이 심정을 주위의 형제에게 던져 이에 작반(作伴)하는 가장 엄엄(嚴嚴)한 파문, 가장 희열의 방기(放棄)로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이동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것을 일러 죽음이라 이름한다.
그런데 이 흥미있는 사실이 통쾌한 현실을 보통사람[常人]들은 이를 비통하게 생각하고 철학자[哲人]는 이를 흥미있게 음미하는 것이니, 역사상에 나타난 많은 쾌걸(快傑) 성철(聖哲)이 이러한 의미의 죽음의 광명을 얼마나 많이 우리에게 준 줄은 아느냐? 수많은[幾多] 옛날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우리 조선 최근에 있어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선천의 막(幕)을 닫은 수운의 죽음은 얼마나 놀라우며 경성감옥(京城監獄)에서 최후의 이슬이 된 수운의 수제자 해월의 죽음은 얼마나 거룩하냐?
"누가 끝끝내 이 신체라는 뇌옥(牢獄)에서 포로가 되기를 원하더냐? 자유의 지경에 달할 길은 사방에 열리었다. 보아라, 저 단애(斷崖), 저 바다, 저 우물 그 밑에는 자유의 서울이 누워 있지 않느냐?"
이것이 철인 세네카의 '죽음의 찬미'이다. 여하튼 죽음이라는 것은 감각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요 의지로서 초월할 것이다. 의지의 힘으로 죽음의 경애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초월은 오직 주의의 신봉에 있다. 그 마음속에 우주를 관통하는 대 주의(主義)가 서 있다면 죽음은 결코 문제가 아니다. 바다를 본 자에게 물을 말하지 말라는 말과 같이 대 주의를 품은 자에게는 구구한 죽음을 말하지 말라. 주의는 대생명의 힘이며 육신은 그에 봉공(奉供)할 만한 일종의 선물감으로 보면 그만이다.
(다음 "제4절 진리 파지와 생명"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