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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25. 2020

사회과학자는 철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가?

[잠깐독서-0037] [미디어빅히스토리입문(2)]

미디어 빅히스토리의 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원천적으로 과학은 철학자들의 과업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B.C.624~B.C.545)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B.C.610~B.C.546)에서부터 시작된 자연철학이라는 것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규명하려고 했으니, 오늘로 말하면 자연과학입니다. 그들은 자연철학자였고 과학자였습니다. 우주의 원리를 찾는 출발점이 철학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자연과학자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입니다. 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자들과 화학자들도 철학을 연계해서 공부합니다.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과학이 발견한 새로운 법칙과 이론은 철학과 제반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953)와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의 발견을 역학적으로 완성한 뉴턴의 고전역학은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근대의 철학과 자연과학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낳았으며, 급기야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는 비합리주의 철학을 잉태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를 맞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보어의 상보성이론 및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시대에서 현대물리학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새로운 물리학은 문학과 예술은물론이고 철학과 사회과학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자연과학의 흐름은 물론이고 역사와 철학의 공부는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 김동민, [미디어 빅히스토리입문] 48-49쪽



[편집자 단상] 2020년 12월 25일에 이 글을 다시 읽는 함의는, 다시 우리가 사법개혁과 언론개혁 같은 문제에 적나라하게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외부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개혁은 그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로부터의 개혁 시도는 오히려 내부의 구심력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외부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며 '구체제를 근대문명체제로 개혁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과 같은 꼴이다. 이른바 (어불성설인) '외부로부터의 개혁'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은 '개혁대상의 파괴, 파멸, 파산'일 뿐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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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법개혁(법원+검찰)과 언론개혁이 '내부로부터의 동력'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검찰이 노무현 정부 당시 '검찰 중립화'라는 '호기'를 타고 자기 권력을 강화해 온 데서 알 수 있듯이, 언론이 '언론자유'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세워 틈 나는 대로 기득권(ex.기자단) 수호와 '언론권력' 강화로만 치달아 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런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일이다. 최근 연예인 자제, 가족들이 방송을 장악하는 추세, 운동선수 출신들이 [코로나19로 인한 스포츠 부문의 한가해짐 등과도 맞물려서] 그것을 발판으로 방송계로 진출하는 것만 보아도, 현대사회에서는 '틈만 보이면' 자기의 활동 반경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온갖 종류의 권력들의 속성이다. 재벌이나 교회, 학교재단 등의 세습 체제는 하도 오래된 것이어서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고. 


2002년의 월드컵 '붉은 악마' 응원 당시 우리는 '세계로 도약했다.' 그리고 노사모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열망을 담아 노무현 정부가 탄생했다. 그때, 노무현 정부 때 우리는 빼앗긴 민주화(노태우), 배반당한 민주화(김영삼), 부패한 민주화(김대중 정권)에 이어 비로소 낡은 체제를 마감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 되는 첫 새벽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꿈 같은 일이 벌어지고, 박근혜가 5.16%(?)라는 기묘한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는 신묘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누구 탓인가? 


시대의 좌표를 잘못 읽은 것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다.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이 오히려 특이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환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시 기적같이 촛불혁명이 일어나고(이것은 결단코 세월호가 피워 올린 촛불이다!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박근혜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문재인 대통령이 출범하였다. 한때, 20년 집권, 100년 집권을 이야기할 만큼 기세 등등하던 때도 있었다. 특히 올해 들어, 지옥 같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결실을 하나하나 거두어 갈 것으로 기대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70년 동안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어 온 '권력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집요하게 흠집내기, 발목잡기를 계속해 왔다. 상처입은 호랑이가 쓰러질 때까지 따라붙는 하이에나 무리! 그렇다. 딱 그 하이에나 무리처럼 끊임없이 잽을 날리고, 치고 빠지기를 거듭해 왔다. 그들은 각개전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여럿이 한 덩어리로 움직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들의 본능이 서로의 냄새로 서로의 뜻을 알아차려 가며 일사분란하게 역할 분담을 하여 움직였다. 피맛(노무현 대통령 등등)을 본 하이에나는 마치 좀비 떼처럼 이성을 상실한, 그저, 오직, '잡아 먹는 것'에만, '권력을 유지하고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놈들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세 가지 방법' 중 두 가지가 동원된 셈이다. (1)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찌른다. (2) 찔러 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여전히 이쑤시개질은 계속되고, 여기저기 박힌 이수씨개가 즐비하고, 그 자국마다 피가 흥건하다. 그럼에도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 (3) 죽기 직전에 찌른다. 아마도 세 번째 파도는 지금까지의 에너지를 모두 등에 업고, 가히 '쓰나미'처럼 밀려올 것이다. 피냄새를 맡고 더 먼곳에서부터 떼거지로 합세한 하이에나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처럼. 


묵묵히 견디던 호랑이(들)! 죽을 힘을 다해, 하이에나들의 목덜미를 물어서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고요히 앉아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건조지대는 아직도 넓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가 없다.  그 건조지대를 건너야, 거목와 잡목이 어우러진 천연의 숲으로 아스라히 끝없는 백두대간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 돌아보면, 건조지대에도 비가 내리고, 수풀이 되살아나고, 생태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추신 :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의 조급함!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다짐해 왔던!!!) 그 성급함!을 극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결국은 언론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수레바퀴 같은 '여론몰이' 메커니즘을 혁파하는 것이다!


언론권력과 사법권력의 개혁이라는 '어불성설'은 이 비현실적[어불성설이라는 면에서]인 과제는 그 본질을 바로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언론개혁이 아니라 언론혁명이야 말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다. 해결하는 길은 백가쟁명보다, 언론-권력의 그 기레기성에 결단코 놀아나지 않는 자세이다. 젖어드는 사람들을 그 '가랑비'로부터 끊임없이 건져내는 - 그들의 눈에 씌인 콩깍지를 걷어내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언론(미디어) 이해의 과학적 시선을 확보하는 일이다. 


나는, 다시, 그렇게 생각한다. 


언론권력 개혁-혁명의 길은 과학적인 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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