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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2.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8)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3절 물심 양론이 실제 생활에 미치는 영향


이상에 말한 유물론/유심론의 논쟁이 단지 철학계의 문제일 뿐이요 실제 생활에는 아무 영향을 주는 것이 없다면 철학계를 벗어난 일반 대중들은 조금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물/유심의 양론은 다만 철학계의 연구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화(敎化) 문제가 되어 실제 생활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관계가 있으므로, 여기에 한마디 주의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입장으로 그러할 뿐 아니라 수운주의의 입장으로서도 지기일원론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물심(物心)의 문제를 한몫 청산(淸算)하는 의미가 있기에, 이에 몇 가지 영향을 적어 두는 것이다.


1. 유물론의 한계


첫째, 이 세계를 유물론적 이론만으로 조직한다 하면 그 이해(利害)가 어찌 될 것인가.


우선 유물론의 결함이 될 만한 첫째 문제는 ‘인생은 사막’이라는 느낌(感)이 없지 않다. 사람에게서 깊고 원대하고 고상한[深遠階高] 정신적 정취를 없애 버리고 구속됨[結縛], 뿌리 없음[浮藻], 방랑(放浪)으로 흐르게 하는 결함이 없지 않다.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라면 몰라도 보통 대중으로서는 유물적 방랑의 폐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주는 무엇이냐 물질이다. 금수(禽獸)는 무엇이냐? 물질이다. 인간 내지 인간의 정신은 무엇이냐? 역시 물질이다. 한 물질의 덩어리가 역학적·기계적 작용에 의하여 괴로움[苦]으로부터 괴로움으로 흘러가는 무의미·무목적한 작난(作亂)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 느낌이 없지 않다. 여기서 인생은 고목(枯木)이요 세계는 사막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 세상이 오직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은 문득 재[灰]가 되고 만다. 사람의 원기는 가볍고 야트막하고 짤막한(輕率淺短) 데에 그치고 만다. 이 점을 살핀 유물론적 사회 지도자들은 투쟁으로서 인간의 목적을 삼고, 나아가 투쟁으로 인간 활동의 정조(情操)를 삼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유물론자는 유심론자보다 동적 방면이 강하다. 또한 투쟁의 방면이 강하다. 오늘날[現今] 유물론이 매우 동적 세력이 강해진 것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경제적 계급투쟁이 매우 고도에 달한 까닭이다. 이것은 자연의 리(理)이며 필연의 세(勢)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이 만일 대중의 의사대로 투쟁의 목적을 달성하는 새벽에는 다시 투쟁이 없어질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적 유물론은 계급투쟁으로서 역사의 본질을 삼는 점으로 보아서 투쟁이 그치는 날이 곧 유물론의 실제 방면이 그치는 날인즉 그때에는 유물론은 무엇으로 투쟁의 재료를 삼을 것인가?

그때에도 만약 방식이 다른 투쟁이 있다면 그는 러셀(1872-1970)의 말과 같이 소유욕이 창조욕으로 변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소위 창조욕이라는 것은 대개 유심적 투쟁이 될 것은 상식으로 판단할 일이다.


중국 영웅 진시황이 육국(六國)을 정복할 때는 장생(長生)의 욕심을 부릴 여유가 없었으나, 마침내 육국을 정복하고 나서 소유 투쟁을 그친 뒤에는 종교적 욕망, 즉 장생욕이 대두하여 신선을 구하기에 몰두한 사실은, 사람의 욕구가 이렇다는 것을 가히 참작하게 한다.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으로 정신적인 욕구를 추구한다. 그러나 정신도 물질의 한 측면일 뿐인가?

오늘날은 진시황이 육국을 치는 격이라 하자. 앞에 무수한 대적(大敵)이 있으므로 인생의 고유한 종교적 정조나 도덕적·예술적 정조가 솟아날 수가 없다. 그러나 진시황이 육국을 평정하던 날과 같은 날이 돌아온다면 시왕이 맛보던 유심적 정조가 대중 속에서 솟아오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즉 유심적 문화가 다시 대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단순한 유심적 기계관은 우주 문제에 대한 인생의 근본적 욕구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조금 생각하면 지각할 수 있을 듯하다.


2. 유심론의 한계


다음 유심론으로 세계관을 세운다 하면 자연히 정적(靜的)인 방면이 강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깊고 멀고 젊지 않은 듯한 느낌이 있는 것과 동시에, 눈 꼭 감고 세상을 등지고 독선자만(獨善自慢)하는 편이 많으리라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서양 도덕은 동적 방면이 많은 반면에 동양 도덕은 정적 방면이 많은 것을 보아도 넉넉히 유심에 따라 다니는 정적 타방(惰方; 게으름)을 알아낼 수 있다. 유심론은 이와 같이 정적 방면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미신과 망상이 생기기 쉽다. 당치도 않은 귀신 관념을 가정하기가 쉽고, 어림도 없는 관념으로 모든 것을 재단[尺度]하고 근거 없이 판단[臆斷]하는 폐해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유심론에서 극단의 폐해를 입은 사회에는 상류계급은 송장의 치레가 되고 하류사회는 미신의 부패가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음험(陰險)·불활발(不活潑)한 공기가 사람 속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 유심론의 세계이다.



3. 유물론/유심론의 이점을 넘어


이상은 간단히 유심 유물의 폐해를 한마디 한데 지나지 아니한다.


이제 다시 양론의 이점(利點)에 대하여 일언하면, 유물론은 동적 방면이 강한 것, 투쟁 방면이 강한 것, 현실에 치중하는 것,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유심론은 평화적 방면이 많은 것, 인생의 의의를 깊게 하는 것, 종교·예술·도덕 등의 발달을 심원케 하는 것, 위대한 정신적 연구가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아무튼 유심론이나 유물론이나 한가지로 이점과 폐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양자를 어떻게 조화한다든지 또는 인위적으로 억지로 끌어붙이거나 끌고 와서(强附率引) 합치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다 일시적 안정[姑息=임시방편, 미봉책]이며 또는 영원한 진리는 아닌 것이다.


우주의 근본은 유심도 아니요 유물도 아니다. 본래 평등일여(平等一如)한 ‘한울’이다. 우리는 이 천연자재(天然自在)한 본체 원리를 파지(把持)하는 데서, 양자의 근저(根底)를 명료하게 하는 동시에 그 작용을 천연자재하게 하며 인간 최후의 진리를 만대에 전할 수[遺傳]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한 진리가 곧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이다. 다시, 지기일원론은 수운주의(水雲主義)의 우주관이다.

(다음에 제4절 '지기일원론'으로 계속)


*[편역자주 1] 신인철학 함께 읽기 오프라인 모임은 매월 격주로 수요일 저녁에 진행됩니다. 다음 번 함께 읽기는 5월 4일(수) 오후 6시부터 진행합니다. [종로구 삼일대로 457, 수운회관 1207호]

(4월 27일, 수, 오후 3시부터는 '개벽신문' 함께 읽기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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