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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1.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7)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을 다시 읽는다-

2. 유심론의 근원론


생명과 물질의 기원에 관한 한 발견-재발견-수정-재수정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다음 유심론의 말을 들어 보면 이러하다. 


유심론자들은 먼저, 원래 유물론은 알기 쉬운 증거를 들기 때문에 누구든지 긍정하기 쉬우나 그와 반대로 유심론은 유물론처럼 통속적인 설명을 시원하게 할 수 없는 심원한 원리를 포함하였다. 그러므로 근대에 들어 유심론이 유물론보다 민중에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유심론의 원리가 잘못된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제 유심론의 입장에서 유물론을 비판[批難]하는 몇 가지 조건을 들어 보면 

첫째,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왜 그러냐 하면 물질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 구극(究極)의 원리가 큰 문제가 된다. 

최근까지도 물질의 본체는 원자에서 끊기고 만다고 하던 것이 원자 위에 전자가 생긴 뒤에는 물질은 일층 무한소(無限小)의 방면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리하여 전자를 가지고도 물질의 근원이 여기에 끊긴다고 단언하지 못하게 되었다. 만고(萬古) 전자의 밑에 다시 깊은 근저(根底)로 상상한다면 구극에는 물질의 근원이 영(靈)이냐 물(物)이냐를 분별치 못하게 될 것이다. 


물질의 구극은 필경 우리의 정신적 인식만이 남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극의 물질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 자신의 인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생각되는 우리 자신의 감각을 제외하고 나서 따로 무엇이 있느냐 하는 데서 유심론의 근거가 굳어진다. 그렇다면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이 정신보다 먼저 생겼다든가, 뇌세포가 물질로 되었다든가 하는 논리는 발붙일 여지가 없지 않느냐? 


물질의 근원은 비물질적인 것인가? 오늘날 물리학의 연구 성과는 물질의 궁극적 근원(출발점)은 '파동'이라고 말한다. 그 '파동'은 '정신'이라고 해도 틀렸다고 장담할 수 없다.


둘째는 우리가 어떤 기성물체(旣成物體)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 물체가 크다든지 작다든지 또는 색이 희다든지 검다든지 하는 특징을 귀납[集合]하여 가지고 그로부터 그것이 무슨 물건이라는 추상적(抽象的) 개념을 얻어낸다. 그러나, 어떤 물체의 색체(色彩), 형상(形狀), 우연성[偶性] 같은 것은 다 우리 자신의 인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 

즉 우리 자신의 개념을 제(除)하고 나면 따로 물질이라는 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은 정신을 예상(豫想)치 아니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질이라는 개념을 세우고자 하면 정신이라는 개념을 먼저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난관(難關)이 있다. 인식의 순서로 말하면 정신이 먼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물질[의 존재]을 무엇에 의하여 아느냐 하면 정신을 통해 안다고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신을 먼저 예상치 않을 수 없다. 즉 인식이라는 것을 예상치 않고는 물질을 확인할 수 없다. 물질을 확인한다는 말은 정신을 확인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물질보다도 선존조건(先存條件)이 된다.

 

원래 유물론의 장점이라는 것은 그 연구하는 방법에 특장(特長)이 있다. 물질을 연구하여 차례로 물질의 내용을 탐구해 본 결과 물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유물론의 연구법이다. 

즉 외계의 물질을 차례로 연구하여 그 귀결(歸結)을 얻는 조직적 방법이다. 유심론자와 같이 다만 마음속에서 관념으로 셈을 해 보는 것이 아니요, 알기 쉬운 외계 물질로부터 연구를 시작해 가지고 그 귀결을 얻는 것이다. 즉 정확한 객관적 방법에 의하여 유물에 귀납(歸納)하는 것이요, 결코 주관으로써 불확실한 일을 긍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따져 두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객관적 방법은 그 증거상 정확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역시 주관에 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무슨 연구든지 주관이 없이 객관만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이 정正이냐 부否냐 하는 판단하는 것은 필경은 의식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것이 바른 인식이다.’ 하는 최후판정(最後判定)은 의식의 직분(職分)이다. 즉 의식이 최후표준(最後標準)이 된다. 아무리 정확한 기계로 측정할지라도 기계만으로 정확해지는 것이 아니요, 기계의 측정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며 정신이다. 즉 객관은 측량(測量)과 방침(方針)이며 주관은 그 표준이라는 말이다. 여기에도 정신이 선존조건이 된다. 


인간의 정신(의식, 마음)은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있는가. 아직(21세기 현재) 그 전체 매커니즘은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셋째는 우리가 우리 의식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식은 연장성(延長性)이 없는 것이므로 연장성이 있는 물질과는 달리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사람의 생리(生理)를 물질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여 이에 미루어 의식계를 동일하게 측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즉 생리작용으로서 의식계의 사실까지 일률적으로 결론내리고자 하는 것은 너무도 외람된 것이다. 유물론자 포크트(1817-1895)는 사람의 사상과 뇌수(腦髓)의 작용을 비교하여 사상과 뇌수의 관계는 마치 담즙과 간장(肝臟)의 관계와 같으며, 소변과 신장(腎臟)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다. 즉 뇌수작용으로 사상이 나오는 것이 간장과 신장에서 담즙과 소변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유심론을 정복하는 데에 너무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신장이 소변을 제조하는 것은 이것이 유형으로 유형을 제조하는데 지나지 아니하나 뇌수에서 사상이 생긴다는 것은 유형에서 무형이 생기는 것인즉 전자와 후자는 원래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은 유심 유물론이 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우주 본체를 다투는 논점의 대강이다. 이 양론은 고대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흘러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 [편역자 주1] 역시 오늘날의 '물리학' '생물학'의 수준으로 보면, 수정가감할 내용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편역자가 오늘날의 '물리학'이나 '생물학'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하다는 것... 읽다가 궁금한 것은 검색을 통해 확인하면서 읽어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1장은 '본체론'에 가까운 것이어서 좀 어렵고,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새로운 인간 - 신인" 철학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 시간을 두고 최대한 쉽고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달거나 부연설명을 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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