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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5.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43)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4. 개체아에서 한울아로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자아중에 있는 변하는 측면의 나를 해탈하고 자아중에 있는 '한울아[我]' 즉 인내천의 나[我], 즉 인간격의 나[我]에 합일할 수 있을까? 그 방법으로는 수운 선생은 '만사지(萬事知)'라는 지(知)를 얻으라 하였으니 만사지의 지는 곧 직각적(直覺的) 지를 말하는데 직각적 지는 한울아[我]에 합일되는 인간격의 지를 말하는 것이다.

  

과실이 나무에서 떨어지며 비가 공중에서 떨어지며 폭포가 바위에서 떨어지는 등의 사실을 우리가 무질서하게 이것을 일일이 기억하고자 하면 제한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과 달라 법칙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졌다. 즉 이러한 복잡한 사실에서 중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에 의하여 사실을 통일할 줄 안다. 


사실은 복잡하나 진리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유일의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복잡한 사실을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만사지'이다.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라는 지(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 안에 묻혀 있는 유일의 진리, 즉 '한울'과 합일함으로써 전일을 얻을 수 있고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너로 하여금 장생하게 하고 포덕천하하게 하리라[令汝長生 布德天下矣]." 이것은 수운의 가르침[敎訓]이다. 장생이라는 말은 불장생(不長生)과 상대할 말인즉 사람은 위에 말한 진리 파지의 여부에 의하여 장생과 영멸(永滅)의 구별이 생긴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자아 중에는 더 이상이 없는[無上] 나[我], 즉 육체의 나, 즉 인간격의 나가 힘께 존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장생과 영멸의 분기점이 생기는 것이다. 무상의 나를 버리고 한울아를 취할까? 한울아를 버리고 무상아를 취할까? 이 간단한 분기점이 생사관두(生死關頭)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한울아를 버리고 무상아를 취하는 생활은 대개 이러하다. 


사람은 물질뿐이다. 수심가(愁心歌)에 나타난 노래와 같이 '사람 한번 죽어지면 만수청산(萬樹靑山)에 운무(雲霧)로다, 죽어지면 공구(孔丘)와 도척(盜跖)의 구별이 없다, 살아생전에 놀고 보고 먹고 보자, 힘 있는 데까지 방종과 사치를 다하여 이목(耳目)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며, 오관(五官)의 즐거운 바를 쫓아 놀고 보고 먹고 보자 죽어지면 그뿐이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인간격이 비열하면 비열할수록 무제한으로 나타나는 생활이다. 예부터[古來] 용열한 군주[劣君庸主], 부자(富子)의 치한(痴漢), 양반의 무능아(無能兒)로부터 거의 동물성에 가까운 무든 방탕아(放蕩兒)가 다 그러한 생활을 하여 왔다. 이러한 생활은 아무 이상이 없고 주의가 없는 겨우 동물성에 가까운 생활이다. 알아보기 어려운 생활도 아닌 동시에 연구할 필요도 없는 생활이다.


(다음 "5. 나는 나뭇잎이 아니라 나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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