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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9. 2021

다시개벽 - 제2호를 준비하며

[개벽통문-152]

몇 년 전 춘천에서 열린 "차상찬 관련 학술대회"에서 기조발표를 한 적이 있다. 필자가 "차상찬평전"을 펴낸 이력 때문이다. 차상찬이 누군가 하면, 올해 101주년을 맞이하고, 또 최근 <계간 다시개벽>으로 계승되고 있는 <개벽> 잡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편집인의 한 사람이다. 차상찬은 그 가형인 차상학이 <개벽>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회월보> 편집인인 인연으로 <개벽사>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본래는 보성전문의 법학교수로 자리매김할 요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성영어학교(?) 교사이던 둘째형에 이어, 집안의 큰 기대를 한몸에 안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의 문인들(한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차상학이 요절하면서, 차상찬은 생활 전선겸 활동 무대를 좀더 현장성이 강한 개벽사로 옮겨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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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에서 차상찬(1887)은 이돈화(1884)나 박달성(1884)에 이어 '선배 그룹'에 속하면서 김기전(1894) 등의 중진 그룹과 방정환(1899) 등의 소장 그룹과도 흉허물 없이 어울리고, 오히려 '장난끼 넘치는 선배'로서 개벽사의 분위기를 '업'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그런 점에서 박달성도 '에너지' 넘치는 데서는 매한가지였는데, 그는 아마도 장난스러움보다는 '과격'함 쪽-행동보다는 논리 면에서-에 가까웠던 것으로 짐작-순전히-해 본다-그들의 글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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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사 전체의 편집(경영)의 실질적 책임은 이돈화-김기전-방정환에 이어 1930년대-1935년까지 차상찬이 도맡았다. 물론 전 기간을 통털어 각 잡지마다 편집책임자가 별개로 있었다(예컨대 방정환은 어린이, 학생, (신)여성, 차상찬은 별건곤 등등).. 그러나 박달성이 20년대 말에서 1930년 사이에 요절하고, 방정환이 1930년대 전후로 병석과 현장을 오가다가 1931년 환원하고, 김기전도 지병으로 인하여 현장 참여가 어려워지고, 이돈화는(초기를 제외하고는) 집필 활동 외에는 교단의 기관지나 교단 운영에 참여하느라 개벽사 쪽의 관여는 별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결국 1931년 이후 차상찬이 개벽사 경영 전반을 떠안고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이 시기에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와 신여성의 편집 책임을 맡은 이가 이정호이다. 차상찬과 이정호는 개벽사의 최후를 지킨 2인이라고 할 수 있다). 차상찬과 이정호가 쓰러져가는 개벽사와 개벽사의 잡지들(마지막까지 간행하던 어린이, 별건곤, 혜성, 신여성 등)를 부여안고 고생하고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던 정황은 상상에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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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춘천에서의 학술발표에서 차상찬의 생애를 중심으로 발표하면서, 나는 차상찬과 그의 동지들(박달성, 김기전, 이돈화, 민영순, 방정환, 송계월, 이정호 외 수십 명)이 차례로 쓰러져 가거나 개벽사를 떠나 도생(圖生)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이야기하다가, 울었다. 1920년~1935년 무렵까지의 개벽사의 부침은 1860~2010년대까지의 동학-천도교의 부침의 역사와 프렉탈 구조를 이루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차상찬이 개벽사의 간판, 개벽사 간행 잡지들의 더미를 부여안고, 끝내 그것을 이어가려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과정들이(개벽사 폐문, 개벽 폐간) 내가 대학 입학 이후 그날까지 걸어온, 천도교(동학)과 개벽의 미디어-출판운동과 너무도 절절하게 오버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상찬의 그 마음이 너무도 잘 이해되어, 차상찬이 불쌍해서 울었고, 차상찬을 닮은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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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이 길어졌으나, 위의 이야기가, 이 통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이 많아진다. ㅠㅠ). '내 이야기'로 돌아와, 과거 "주간개벽"을 하던 시절(1989-1991년 사이)에서부터 최근 "개벽신문"을 하던 시기(2011-2020)까지 그 모든 고난의 여정에, 나를 도와주고, 나와 함께하였던 수많은 동지(同志)들이 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험한 길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 많은 미디어/조직 들이 결국은 실패[해산, 폐간, 해체]로 귀결되곤 했던 이유는, 돌이켜보면, 나의 인덕(人德) 없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늘 '마음'보다 '머리'가 앞서고, '꿈'을 내세워 '현실'(재정)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기에 급급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지치는 것'을 인지(認知)하고 이해하면서도, 공감(共感)하고 공통(共痛)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돌이켜본다. 다만, '홍길동스럽게도' '은덕을 은덕이라 하지 못하고' '마음의 짐으로 지고 갈 뿐'이다. - 지고 가야지, 내려 놓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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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죄업이 내 몸에 쌓이고 쌓였다. 그럴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꿈을 버리지 못하고 죄를 쌓는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죄를 씻어낼 수는 있을까? 도통(道通)을 해도, 회개하며 머리를 찧어도 씻어지지 않을 업도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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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를 무릅쓰고, 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다시개벽] 제2호 원고 교정을 보는 중에 참으로 '감격스럽고, 감동스럽고, 감사(感謝)로워서'다. 글 하나하나가 너무도 재미(!)있어서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는 사람들'이 [다시개벽]에 속속 참여하고 있는 정황이 너무도 뚜렷해서다. 그동안 주간/청년/신문개벽을 위하여 헌신하고 도와주고 함께하신 분들의 '노이무공'도 '우여성공(遇汝成功)'하게 되리라는 기대에 넘쳐서다. 이제 갓 2호를 내면서 설레발이 좀 심하다 싶긴 하지만, 참여하는 분들의 면면, 곧 동참하리라 기대되는 분들(편집위원, 필자 등)의 면면이 그러한 기대를 더높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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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운동)는 그 어느 매체보다 발행인과 편집인(주간+편집위원)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는 매체적 특성이 있는 듯하다. 그중 발행인으로서 나의 '입김'은 최대한 내려놓고, 의무적 사항(경영지원)에 충실하겠다고 대내외에 공포하였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인들의 입김에 더하여, (동인지가 아닌 한) 운동으로서의 잡지의 성패는 독자들의 반응과 참여로 결판지어지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현대의 잡지는 '참여'의 비중이 더욱 커지는 듯하다. 특히,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은 '개벽'의 길을 새로 닦고 빛내고 넓히고자 하는 <다시개벽>의 길에 있어서 독자의 참여는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책임적인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단순 반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자가 참여하는 잡지로서 '다시개벽'이 그 지향대로, '자생적 사유의 재발견'과 '인간+만물과 세계+하늘의 개벽'을 지향하고, 실현에 이지하는 길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를 간곡히 절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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