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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5. 2021

이광수의 <소년에게> 읽기

[개벽통문-157]

[묵은숙제] 월2회, 격주 1, 3 월요일에 진행하는 "개벽라키비움 - 개벽강독회"는 2021년 2월 말 현재 23회차 모임을3 진행하였습니다. 당초 매회 1호씩을 읽기로 하였으나, 읽어야 할 글들이 많아, 23회차[2월 22일]에서는 17호를 읽었습니다. 이날은 특히 개벽17호(1921.11)부터 21호(1922.3)까지 5회에 걸쳐 연재된 <소년에게>라는 글을 이어 읽었습니다. 이 글은 춘원 이광수의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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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소년'은 10세 이상부터 20세까지, 오늘날로 치면 소년 + 청년까지를 아우르는 세대입니다. 이날 강독을 하면서 1900년대의 초기 1세대 동안[1900-1930) '소년(남녀)' '어린이' 등의 용어는 다양한 계층을 지칭하고 있음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지난주 있었던 "천도교소년회 설립100주년 기념 학술포럼"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듯이, '천도교소년회'는 만 7세부터 16세까지를 언급하고, 그 안에서도 다시 12, 3세를 기준으로 유소년과 소년을 가르기도 합니다. 또 다른 글이나 인물(소년운동가)에 따라서는 18세까지를 소년으로 보기도 하고, 여러 모로 소년의 기준이 혼재된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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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소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소년(어린이)운동의 정의나 방법론[소년을 주체로 하느냐, 객체로 하느냐 등]이 갈리기도 하고, 소년을 대하는 태도[권위적, 가부장적이냐, 민주적, 생명친화적이냐]도 갈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 차이는 단지 소년의 (연령적) 정의만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철학[개벽적-동학적이냐, 개화적-계몽적이냐 등]에 기반하고 있느냐가 더 본질적인 원인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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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에 드러나는 이광수의 '소년관'은 그에 앞서 이 시기[1920~1922) 천도교소년회 지도위원 그룹(김기전, 방정환, 박달성, 이돈화)이 보여주는 소년관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그 차별점이 도드라진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이광수도 '개벽'의 주요 필진이고, 또한 '천도교 기반'에서 성장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내면의 동학(천도교-개벽) 수용 정도에 따라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소년에게>는 또 1923년에 역시 이광수가 <개벽>지에 발표하는 <민족개조론>의 에필로그와 같은 성격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하였습니다. <소년에게>에 보이는 그의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는 더욱 정교해지고, 또 그 대상을 확대한 채로 <민족개조론>으로 비화(非化, 悲化)해 나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개조론>을 읽을 때, 당대 이광수가 받았던 치열한 비판, 비난을 일단은 탈각시키고, 처음부터 새롭게 읽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셈법이 필요한 접근이 될 것입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한국)는 일제의 잔재를 오롯이 청산하지 못한 토대 위에 위태롭게 건설되어 있다는 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21세기 들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성취를 이룩해 나가고 있다는 점, 한번 더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는 그다지 세계적인 성취(현 시점에서)를 보여주지(대외적으로)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 이중, 삼중, 사중의 배경 속에서 다시 '민족개조론'을 들여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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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들이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안창호의 <민족개조론>의 영향하에 입안되었다고 합니다.(이 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공부하지는 못한 상태임) 그러나 한편으로 <개벽> 자체의 핵심적인 키워드가 곧 개조(=개벽)이기도 합니다. <개벽>지에는 '개조'로서의 '개벽과 개조'는 용어와 '개벽'으로서의 '개조와 개벽'이라는 용어 혼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개조로서의 개벽과 개조'라 함은 '신사상을 추구하는 개화적 성향'을 일컫는, 약간은 부정적 뉘앙스가 내포된 망이라면, '개벽으로서의 개조와 개벽'은 일반적인 '개조론'과 다른 '개벽론'의 성향을 내포한 개조(개벽) 용어의 용법을 지칭합니다. 이렇듯 개조 - 개벽(<개벽>) - 안창호 - 이광수 등의 관련성을 톺아 보는 것도 <소년에게>와 <민족개조론>을 이어 읽으면서 살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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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년에게>에서 이광수는 '소년(20세 이하 청년과 소년)에게, 이 나라를  재건할 책임을 짊어지라고 당부(요구?)합니다. 이것은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라고 볼 때, 한편으로는 매우 시의적절한 요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성세대(청년선배 포함)'의 책임을 방기(放棄)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기성세대(국권을 상실하고, 자주적 개화에 실패한 세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신세대에게 기대를 거는 진보적인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아마 이광수의 친일 이력이 없었다면, 자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러한 의미의 텍스트로 회자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애늙은이[이 글을 쓸 때 이광수 나이 31세] 같은 태도[가부장적]라고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1920년대 초기)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운동 주체 형성과 미래 전략'을 어떻게 구상하였는지, 좀더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한두 대목을 직접 소개하면, 이광수는 <소년에게>에서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떠올리게 하는 '1만 전문가 양성론'을 내세웁니다. 즉 당대의 조선에 '전문가'가 없다고 하면서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광수가 제시한 '1만'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민족을 1,700만 치고 이것이 완전한 민족적 생활을 하랴면 최소한도에 1만명 이상의 전문가를 요합니다. 이제 그 개산을 봅시다.관공직에 在한 자 2천 명 / 농, 공, 상업 급 교통 등 기관을 운전하는 자 3천 명 / 교육자 2천 명 / 종교가 3백 명 / 학자 5백 명 / 예술가 2백 명 /의사 2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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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들이 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할, 쌓아나가야 할 덕목을 아래와 같이 제시합니다. "이 모양으로 저부터 개조하려는 자들이 동맹을 지어 처음 약속한 몇 가지 일, 가령 우리로 말하면, (1) 무실역행하기를 동맹하자. (2) 신의를 지키고 용기를 가지기를 동맹하자. (3) 단체생활의 훈련을 받기를 동맹하자. (4) 보통지식과 일종이상의 학술이나 기예를 배우기를 동맹하자. (5) 위생과 운동을 일생에 쉬지 않기를 동맹하자. (6) 반드시 일정한 직업을 가져 매일 일정한 시간의 노력을 하며, 금전을 저축하야 저마다 제 생활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기를 동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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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와 결부된 100년 전의 '사회변혁(독립), 개조' 운동의 맥락을 이렇게 들여다보려는 것은 오늘날도 바로 '세대간 격차, 갈등, 불화, 단절'을 매개로(혹은 그것을 결과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격변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지향 취미'로 치부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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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저모로 <개벽> 강독은 점점 흥미진진해집니다. 이러한 흥미진진함을 동력 삼아 올해 안에, 강독회팀 주관의 단행본을 발행할 계획도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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