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 - 054
영화 <타이타닉(Titanic)>에서 배가 침몰한 후 잭(Jack)과 로즈(Rose)는 조그만 널판지에 몸을 의지하고
표류한다. 널판지가 너무 작아 두 사람이 모두 위에 오를 수 없어 잭은 손으로만 잡고 몸은 찬 바다에 잠겨 있다. 구조 보트가 나타났을 때 잭은 저체온증(低体溫症)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널판지가 더 작아서 오직 한 사람만 의지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둘이 붙잡으면 널판지 자체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우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내어 죽게 하였다면 살인죄일까? 이것이 형법학에서는 카르네아데스 널판지(Plank of Carneades)라고 부르는 오래된 사례이다. 독일체계에서는 이 경우 면책적(免責的) 긴급피난이라고 하여 책임을 면제된다고 한다. 그래서 무죄(無罪)이다.
(영미체계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합의된 교의(敎義)는 아직 없다. 오래된 것으로 미뇨네트(Mignonette)호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한 판례가 있다). 널판지에서 밀어내 죽게 한 것에 대해 살인의 불법(不法)은 있지만, 책임이 없어 무죄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법과 책임은 범죄의 근본적인 두 개의 체계 범주이다.
그렇다면 책임이란 무엇인가? 위 사례에서 보듯이 형법학에서 책임이라는 개념(槪念)은 한 사람(피고인)이 처형되느냐, 감옥에 가느냐 아니면 석방되느냐를 좌우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더이상 철학자의 상념(想念)도 아니고 일상의 언어놀이도 아니다. 그리하여 형법학자는 도대체 개념이란 무엇인가 하고 철학자에게 묻는다. 스스로 고뇌하기 위하여 철학자의 언급(言及)을 찾는 것이다.
오랫동안 책임은, 인간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법(適法)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법을 선택한 데 대한 비난(非難)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 인간의 의식적 자유의 관념이 환상(illusion)이라는 신경과학(neuroscience)의 실험이 제시되었다(Libet’s experiment). 우리가 손목을 구부리겠다고 생각하고 이어서 손목을 구부렸을 때, 우리의 생각(의지)이 손목을 구부린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 뇌의 신경세계에서는 우리의 생각(의지) 이전에 이미 손목을 구부리는 신경과정(神経過程)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측정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손목을 구부린다는 이 당연한 느낌(feeling)은 환상(幻想)이라는 것이다.
이 실험 이후로 40여 년 동안 많은 추가적 실험들이 행해졌고, 신경과학자, 철학자, 사회심리학자 등 많은 학자들이 자유의지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 책은 이 모든 논의를 재검토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책임 개념을 제시한다. 필자가 제시하는 책임 개념은 인지적(認知的) 자유의 부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면책성은 문명적(文明的) 자유의 결여(缺如)에 근거한다는 것이다.